-
사진뉴스
콩나물신문
1970.01.01
-
바람의 결이 확연히 다르다. 길가 플라타너스 잎 색이 짙어졌다. 가로수 그림자에서도 가을 냄새가 난다. 새파란 하늘이 창에 다가와 얼른 나와보라 부른다. 나는 프러포즈를 받은 여자처럼 겅중겅중 나갔다. 며칠 전만 해도 비어있던 벌막공원 벤치에 나 같은 사람들이 앉아서 첫 가을에 취해 있다. 나무 그네에 앉아 핸드폰을 보는 젊은 아가씨도 르누아르의 책을 보는 여인처럼 아름답다. 공원을 한 바퀴 걷다가 숲에 둘러싸인 정자로 가보았다. 원두막 같은 정자는 마침 비어있었다. 나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숲을 바라보았다. 진녹색의 잎사귀들, 이
사람사는이야기
조귀순 수필가
2024.04.23 09:55
-
등에서 콩이 튀었다. 아침밥도 먹기 전인데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손님을 모시고 들이닥친단다. 집 구조만 보러오는 것이라지만 어디 그런가.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내보이는 일이기도 하니, 벌써 여러 사람이 왔다 갔는데도 온다는 전화만 받으면 어디부터 치워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여전히 방방거린다.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세간살이들도 웬일인가 싶어 정신이 번쩍 들고, 강아지도 덩달아 우왕좌왕이다. 구석구석을 털어내고 닦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에 걸린 수건과 발판을 같은 톤의 색으로 맞추고 슬리퍼도 새것으로 교체하여 최대한 깔끔하고 정갈하게
사람사는이야기
한명희(수필가)
2024.03.31 12:38
-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본다. 띠별로 출생 연도에 한마디씩 풀어 놓은 말이 재미있다. 신문을 대충 훑어보고 청소며 빨래를 몰아쳐서 한다. 집 떠나있는 아들이 오는 날이다. 월화수목은 느긋하게 살다가 주말만 되면 살림하는 주부가 된다.세탁소에 들렀다. 서너 해 보아왔건만 아주머니는 처음 본 듯 늘 데면데면하다. 하긴 살갑게 대하는 거보다 편할 때도 있다. 아주머니가 옷을 내주면서 웬일로 말을 건넨다. “화장 안 해도 얼굴이 깨끗하셔요.” 집 나서려면 군빗질에 립스틱 정도는 바르는데 민낯으로 보였나. 그래도 아주머니 말이 싫지는 않다.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4.02.21 12:18
-
경기도의회 교육행정위원회 김미리 위원장(더불어민주당, 남양주2)은 21일 오후 경기도 보건건강국 국장실을 방문하여 유영철 보건건강국장 등 관계 공무원을 면담하고, 남양주시 평내호평지역 주민 12,843인의 서명이 담긴 ‘경기도 도립병원 유치 염원’ 서명부를 전달했다.김미리 위원장은 경기도가 동북부 지역에 공공의료원을 신규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한 후, 이를 남양주에 유치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왔다. 9월에는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열약한 남양주 지역의 의료 현실을 지적하고 ‘균형있는 공공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남양주 백봉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3.12.25 21:11
-
신호등은 빨간색이다. 길 건너편 사람들은 화가 난 듯이 이쪽을 노려보고 서 있다. 나도 덩달아 건너편 그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왜 그러고 있느냐 말하는 것처럼 “끼익!”하고 시내버스가 지나간다. ‘이 도시 부천에도 87번이라는 숫자를 달고 다니는 버스가 있구나.’ 스쳐 지나간 버스 뒤꽁무니를 멀거니 바라본다.신호등이 초록색 불로 바뀐다. 그제야 사람들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피아노 건반같이 희고 검은 건널목을 가뿟하게 오간다. 나도 건너가야 한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서 있다.‘기억이란 마음 내키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3.11.28 14:49
-
목뒤로 차가운 물체가 뚝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손에 쥐고 있던 뽕잎은 어디 가고, 손끝은 서늘한 누에를 주무르고 있다. 누에채반 안에 누에 한 마리, 뽕잎을 찾아 헤매다 졸고 있던 나를 깨웠다.부모님은 부업으로 누에를 쳤다. 누에치기는 농사와 달리 비교적 짧은 기간에 끝난다. 가을걷이까지 현찰 구경하기가 힘든 농촌이다. 가족 모두 현금 마련을 위해 누에치기에 매달렸다. 이 시기 집안 풍경은 태풍이 휩쓸고 간 뒤끝 같다. 누에 밥인 뽕잎 주기에 지친 식구들 얼굴은 노란 달맞이꽃을 닮아간다. 사람이 누에를 키우는지 누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3.11.03 09:12
-
비탈길을 오르자 정상이다. 작은 언덕 같다. 육지는 이미 꽃이 다 졌는데 섬은 이제 한창이다. 꽃이 늦게 핀다는 이름의 만화도(晩花島), 이름이 괜한 게 아니었나 보다. 연분홍색의 복숭아꽃이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고 벚나무가 꽃잎을 눈처럼 털어내자 일행이 환호한다. 꽃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뻐해도 되는 걸까. 잠깐 피었다 지는 꽃을 눈처럼 맞으며 아래로 내려가니 소나무와 나지막한 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이다. 하얀 꽃에 향기가 짙은 찔레나무 순을 꺾어 입에 넣는다. 풀냄새에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닝닝한 맛의 찔레를 어릴 때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3.10.17 19:05
-
김장하는 날 세 여자가 모였다. 그중 가장 젊은 20대 여자는 새댁이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탔다. 남매를 가진 40대 여자는 나서기 좋아했다. 상대방 말이 끝나기 전, 자기주장이 자동판매기처럼 툭툭 떨어져 나온다. 60대 초반 여자도 있는데 그녀는 외향적이다. 머슴처럼 일하면서 속으로 젊은 그녀들을 부러워했다. 외향적인 여자가 삶은 고구마와 커피를 내놓았다. 먼저 고구마를 먹기 시작한 40대 여자가 어려워서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새댁에게 같이 먹자고 권했다. 새댁이 다가와 고구마를 집으며 결혼 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사람사는이야기
임수임
2023.08.30 21:36
-
병실은 비좁았다. 큰길가라 차 소리까지 왕왕거려 교통사고로 부딪힌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댔다. 먼저 들어온 그녀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알고 지내는 주변 사람들과 달랐다. 첫 대면이 특히 그랬다. 한번이라도 웃어본 적이 있을까싶게 뚝뚝한 표정이다. 나를 위아래로 훑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길게 붙인 속눈썹에 까무잡잡한 피부, 거기다 새빨갛게 바른 입술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말할 때마다 내는 콧소리는 거래처 사장님이라는 남자가 오면 더 심해졌다.남자가 들어오면 여자는 가림막을 빙 둘러쳤다. 가려진 커튼 뒤에서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3.08.09 19:42
-
도시는 좋은 것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오명(汚名)을 뒤집어써 도시 안의 좋은 것들도 다 가려져 버릴 때가 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안 좋은 일로 긴 세월에 걸쳐 쌓아온 도시의 이미지가 훼손되기도 한다.‘말뫼의 눈물’은 스웨덴 남부 항구도시 말뫼가 2002년 지역 대표 조선업체인 코쿰스의 크레인을 울산 현대중공업에 단돈 1달러에 팔면서 슬퍼했던 풍경을 묘사한 말이다.말뫼는 1970년대까지는 스웨덴의 조선 산업을 이끄는 대표적 공업단지였다. 그러나 조선 산업의 쇠퇴로 인해 1979년 말뫼 시는 코쿰스의 조선 설비를
사람사는이야기
윤강
2023.07.23 11:44
-
부천을 대표하는 시민사회운동가이자 아너소사이어티로 잘 알려진 정인조 부천희망재단 명예이사장의 자서전 출판 기념식 및 토크콘서트가 7월 11일(화) 17:00~19:00, 롯데백화점 중동점 10층 롯데문화홀에서 개최됐다. “70여 년간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며 자서전 '철이 덜 든 철학자'를 출간하였습니다. 서툰 글이지만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삶에서 맺은 인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담았습니다.”라는 소박한 초대의 말로 시작된 이번 출판기념식 및 토크콘서트에는 조용익 부천시장을 비롯해 김만수, 장덕천
사람사는이야기
이종헌 조합원
2023.07.19 13:29
-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이 이뤄지는가 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온 국민은 다시 고향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대대적인 피난을 해야만 했다. 복잡한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가족도 부친께서 군 보급대로 강제 징용되시고, 남은 3남매와 어머니 넷이서 고향을 떠나 매서운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공포에 휩싸인 채 1·4 후퇴 고통스러운 길을 나서야 했다. 용산 기차역 화물열차 속에는 벌써 콩나물시루처럼 한 사람도 들어설 틈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열차 꼭대기에 깔아놓은 판넬 발판 위에 겨우 자리를 잡고 웅크리고 앉아서 보름 동안 밤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3.06.30 11:14
-
어느 해부터인가 나물을 캐는 것으로 봄을 맞고 있다. 이른 봄나물 중에 으뜸은 뿌리가 튼실한 묵은 냉이이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한겨울을 이겨 냈으므로 그 풍미가 남다르다. 또한 산이나 들에 다른 나물이 나오기 이전에도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라서 더욱 귀하다. 그런데 올해 봄엔 캐지 못하고 냉이 철을 지나쳤다. 내가 코로나에 감염되고, 감염된 어르신들을 직장에서 돌보느라 봄의 통과의례를 치를 겨를이 없었다.오늘 점심시간에 봄 햇살이 좋아 모처럼 내 근무지의 옥상 하늘공원에 올라갔다. 지난해 갖가지 꽃나무와 채소, 한 철 꽃들로
사람사는이야기
김명숙
2023.06.15 10:29
-
밥그릇 이종숙 누구에게나 빛나는 하루는 빈 그릇을 채우는 일 밤새 지어낸뜨거운 가슴으로허한 속을 채워다오차곡차곡 차올라너그러운 하루를 만들어다오 네가 진정 우러러 보이는 것은목숨하나 일구기 위해온몸을 내어 주는 일 누구에게나 빛나는 하루는하얗게 쏟아지는 밥이 아니고마음을 뜨겁게 덥히는 울음과 웃음비워도 비워도 다시 채워지는밥그릇을 안고 가는 일 이종숙 시인 프로필경기도 부천 출생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국제PEN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부천시인협회 회원, 수주시동인 제1시집 『이름도 외로움을 탄다』(2015)제2시집 『푸른
사람사는이야기
콩나물신문 편집위원회
2023.05.22 10:23
-
동네 내리막길 위를 리어커에 폐종이상자를 가득 싣고 내려오는 여자가 있다. 헐렁하게 묶은 짐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몇 발자국 못 가 편도 2차선 도로 위에 폐종이박스가 고무줄 풀리듯 미끄러져 내렸다. 여자는 당황할 것도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이 느긋해 보인다.나는 집을 향해 올라가다가 멈추었다. 도와줄까. 모른 척 그냥 지나칠까. 주변 상황으로 보아 아무도 그녀를 도와줄 것 같지 않다. 차선을 막고 있어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그래도 자기가 처한 상황 내에서 열심히 일하는 그녀가 좋아서 거들었다. 그녀
사람사는이야기
황정순
2023.05.19 08:23
-
새초롬하게 피어나는 배꽃이 도담도담하다. 청초하고 우아하여 은근한 기품이 있다. 흙살 고운 땅의 숨결을 머금고 명지바람에 수줍은 미소를 흩날린다. 배꽃 옆을 스치면 속된 티끌 하나 없이 맑고 달큼한 향기가 살포시 안겨 온다. 바지랑대에 걸친 빨랫줄에서 탕탕한 햇볕을 즐긴 옥양목의 새물내처럼 담백하다. 굽이치는 꽃물결에 맑고 순한 바람이 불면, 일렁이는 꽃구름처럼 아련하다. 오래전 땅보탬 하신 아버지의 고향에 들렀다. 무심한 산자락에 봄바람을 즐기는 진달래가 으밀아밀 산빛을 깨우고 있었다. 골짜기에 점점이 박힌 생강나무꽃이 여린 미소
사람사는이야기
김태헌
2023.04.09 10:18
-
20세기의 우리나라에서 피아노는 자동차와 카메라, 냉장고, 컬러TV 등과 함께 부의 상징이었다. 나는 영문학과에 재학 중 약학과 선배들을 따라 작은 교회에 다녔는데 예배실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있고 아름다운 여집사님이 피아노 반주를 하셨다. 뒷좌석에 무협영화의 주인공처럼 준수한 남 집사님이 돌이 막 지난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던 모습과 피아노 선율에서 느껴지던 뭐라 단정하기 어려운 따뜻한 아픔 같은 미묘한 울림도 기억에 남아있다. 잠자는 숲속 미녀나 라푼젤 같은 동화를 읽을 때처럼 몽환적 아름다움이 잔잔하게 스며오는 것 같았다. 여름
사람사는이야기
홍명근
2023.03.24 10:39
-
집은 은신처이고 가족은 추억의 저장고다. 나 홀로 사는 집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지친 몸과 마음을 풀 수 있는 고요한 휴식처와 같다. 소박한 수도승의 거처 같은 적막한 곳이지만, 붓꽃 향기가 그윽한 한옥에서 사는 일상을 꿈꾼다.절망도 사치인 시절이 있었다. 대기업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주식에 투자하면서 우리 가족은 불행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졌다. 연못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점점 규모를 줄여가다가 토굴 같은 반지하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죽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남은 가족의 서울살이는 비참했다. 세 들어 살았
사람사는이야기
김애란
2023.03.03 10:17
-
석벽 강수경 내 고향 진부 윗쌀면 버드나무거리로 가는 길등줄기 오싹해지고 오금 저리는낭떠러지 모롱이 길어머니 살아계실 때 이름이라도 알아놔야지 하다하다 전화로 묻는다- 엄마, 거기 있잖아요. 엄마랑 따끈한 청귤차 마시던 엘림 카페 옆에 있던 그곳. 몇 년 전만 해도 지나다녔는데 지금은 도로가 생겼지요. 거기 운동기구도 생겨 매일 운동 가시잖아요. 황새들 무리 지어 사는 울울창창한 곳. 지나가려면 쭈뼛 긴장되어 무섬증이 나던 곳. 거기를 뭐라고 불렀지요?- 어, 거기. 거가 만과봉이지 아마.- 아니, 거기는 월정사 들어가는 입구 월정
사람사는이야기
강수경
2023.02.28 09:47
-
찬란하게 말랐다. 비바람도 눈보라도 온몸으로 맞았음이다. 밟힘도 꺾임도 없이 원시림 같은 건초여서 찬란하다. 거목 한 그루 없이 넓은 습지를 차지한 갈대들과 잡목들이 겨울 철새들에게 품을 내어주며 안식의 계절을 보낸다. 어떤 바람도 소란 떨지 않을 것 같은, 고요하나 충만한 자유가 느껴지는 곳. 2월의 소래습지다. 입춘이 지나고 어스름이 검은 갯벌에 내리는 저녁, 갈대숲엔 겨울 철새들이 푸르르 날고 일과를 마친 물오리들은 갯벌 기슭에 삼삼오오 모였다. 갯벌 사이로 흐르는 바닷물에 초저녁 멱을 감는 녀석들이 변성기 덜된 목소리로 갯벌
사람사는이야기
최숙미
2023.02.03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