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시가로 보는 현대인의 삶 - 14

고려가요는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순우리말로 불리던 노래를 우리 문자가 없어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가(이것을 ‘사리부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글 창제 이후에야 비로소 기록할 수 있었는데 당시 유학자들의 고루한 사고방식이 가사 기록에 장애가 된다. 상당수의 고려가요가 이른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누명을 쓰고 기록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즐거워하는 가사라는 뜻이지만 그 내용이 음란하니 기록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남녀가 서로 즐거워하는 노래 가사가 어떻게 곧바로 음란한 가사로 규정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다만 그 판단의 기준이 당대 유학자들의 고결한 윤리의식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21세기에 조선의 윤리의식을 따져 무엇하겠는가마는 그런 기준으로 고려가요의 상당수가 유실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현재 남아있는 고려가요 중 그나마 ‘남녀상열지사’로 알려진 노래는 <만전춘별사> <이상곡> <쌍화점> 등이다. 모두가 정확한 해석이 어려운 고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비유와 상징이 동원되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노래들이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자고 싶다거나 ‘회회아비’나 ‘우물의 용’과 부정한 행위를 했다는 등의 가사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 완곡한 표현과 상징어를 동원했음에도 음란한 가사라고 규정했던 유학자들의 높은 윤리적 기준에 존경을 표하게 된다.

고려의 민중들이 조선의 민중들보다 더 음란했을까? 조선시대의 윤리적 기준이 고려시대의 그것보다 더 높아진 것일까? 유교의 전래로 사람들의 도덕적 성품이 더 고상해진 것일까? 대답은 모두 부정적일 것이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저 당대를 지배한 가치관이 달라졌을 뿐이다. 어떤 가치관과 어떤 잣대로 대상을 보는가에 따라 각각 다른 판단을 내릴 뿐이다. 고려시대의 가치관으로는 아무 거리낌 없이 부르던 노래들이 조선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남녀상열지사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지금 저 노래들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조선시대 유학자들처럼 음란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고려가요의 남녀상열지사를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수용할 정도의 시대가 되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아도 시대는 변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진다. 대상을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진다. 대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인식적 수준도 다양하게 발전한다. 고려가요를 남녀상열지사로 보던 조선시대에 비해 지금이 훨씬 더 음란한 사회가 된 것이 아니다. 예전에 비해 훨씬 넓은 인식적 수준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관이 존재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다양성도 확보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해 민감하다.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 우리가 쓰는 글 한 줄이 누군가에게는 행복과 위안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어느 시대에는 즐거웠던 노래가 어느 시대에는 남녀상열지사가 될 수 있듯이. 우리가 가진 인식의 틀은 어느 정도의 그물코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가진 가치의 시각은 어느 만큼의 스펙트럼을 펼치고 있는지 늘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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