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있음을... 최한금 할머니
“나는 할 말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내 얘기를 하면 끝도 없어, 그래서 하기 싫어. 아유, 고생고생…. 내가 부지런하니까 먹고 사는 거야.”
할머니는 “바뻐.”라며 걸음을 빨리 했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따라다니기로 했다.
할머니는 늘 부천자유시장에 있다. 비가 와도 날이 춥거나 더워도, 자유시장에 나간다. 아침 8시, 9시 어느 때는 10시. 대중없이 나와 대중없이 들어간다. 시장이 쉴 때만 할머니도 쉰다고 했다. 주로 자유시장 구름길입구에서 박스를 정리한다.
이름은 최한금(79), 아버지가 지어줬다. 학자와 같이 공부에 매진한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최한금 할머니는 목포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남의 집 살림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나갔단다.
“얘기를 어따 다해. 말도 못해. 내가 참고 남의 집에 살았어. 하루 품삯으로 쌀 한 되씩을 받았어. 도둑년으로 몰릴 때도 있었지. 남의 것 한 번도 욕심 내고 산 적 없어. 별 소리 다 들어도 내가 돈 벌려면 별 수 있어.”
목포에서 남의 집 살림을 하다가 충북 음성으로 갔다. 음성에서도 남의 집 살림을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아이 네 명을 낳았다.
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부천으로 올라왔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안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눈만 뜨면 이 일 해. 밥 해먹기도 바뻐.”
할머니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바지런함이 지독할 정도다. 주변 상인들은 할머니를 돕기도 하고 박스 위치를 알려 주기도 했다. 요즘 들어 자유시장 구름길 입구에서 박스 정리 하지 말라는 항의를 받는다고 했다. 바로 앞에 횡단 보도가 있어서, 보행자가 방해 받을 수도 있으리라.
자유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큰 길은 놔두고 골목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박스가 쌓여 있었다.
“나 챙겨가라고.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니까, 여기다가 모아줘. 상인들이 종이를 주잖아, 주는 것도 정해져 있어.”
‘시장 장사가 잘 돼야, 박스도 많이 나오겠어요?’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박스가 많이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시장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스 테잎을 자르고, 손수레에 박스를 쌓는다. 박스 팔러 고물상 갈 때 빨랐던 걸음이었는데, 할머니는 다리를 절뚝였다.
“발바닥이 아퍼, 하도 댕겨가지고. 그전에는 한 발짝도 못 다녔어. 티눈에 아프고, 발바닥이 아프지. 앉은뱅이로 많이 다녔는데 티눈을 또 뺐어.”
고물상이 6시만 되면 문을 닫는다고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시장 상점들이 쭉 늘어선 큰 길로 다시 나왔다. 리어카를 끌고다니며 커피 파는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박스 가져다 놨으니까 가져가요.”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가니 커피 박스가 있다.
“커피 아줌마가 갔다 놨고만. 아침에도 놨었는데…. 아유, 그러니까 내가 살지.”
온종일 박스를 줍고 나르는 데도 고물상은 두 번 밖에 못 간단다. 한 번 갈 때마다 4천원 조금 넘게 받는다고 했다. 하루에 8천원을 버는 셈이다.
바깥 일을 하니, 더울 때보다는 쌀쌀할 때가 일하기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뭐든지 더울 때가 나아요, 더울 때가 나아. 추울 때는 오그라 들잖아, 몸뚱이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손수레에 반절 쯤 박스가 찼다. 할머니를 돕겠다고 손수레를 밀려 하니, 너무 무겁다. 할머니는 천하장사다.
“내가 못할 형편이 돼야 쉬지. 나는 끝까지 허는 거여. 나는 일하는 게 좋으니까, 못허게 되면 못허는 거고. 딴 건 없어 이걸로 끝나는 거야.”
일을 마친 할머니는 빗자루로 주변을 말끔히 쓸어 냈다.
박새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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