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 민씨 13대손 맏며느리 정해춘 할머니

까치울초등학교 옆길로 쭉 걸어가면 마을이 하나 있다. 신식 건물들이 더러 들어선 이 마을에서, 그 집은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철문을 열고 30m남짓 걸어 들어 가니 오래된 기와집이 보였다.
눈썹이 하얗고 동그란, 검정개가 짖었다. 집 안에 있던 아주머니가 나무 대문을 빼꼼 열어 본다.

 
60대 중반 아주머닌 줄 알았던 정해춘씨는 80세란다. 호칭이 바뀌는 순간이다.
“내가 여기 시집 온지는 60년이 다 되었어. 여기서 산지는 30년 정도 되었고.”
정해춘씨는 지금은 돌아가신 민경흥 할아버지의 아내이자, 여흥 민씨 맏며느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중매로 만났다.
“나는 충청도 조치원 사람이에요. 6.25때 변씨가 우리 마을로 피란을 왔어. 변씨 대고모네 조카가 민경흠씨 였던 거지. 처음엔 우리 집안이 중인 신분이라고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었대. 족보를 보니 정씨 며느리가 있었던 게지. 그래서 왔어.”

▲ 민경흥씨와 정해춘씨의 결혼사진. 하얀 한복이 인상적이다.
마을에서 전통혼례를 치렀을까? 궁금했다. 정해춘 할머니는 아니라고 했다.
“아니죠. 동원예식장에서 했어. 하얀 한복에 면사포 쓰고.”

정해춘 할머니는 이 마을은 피란 골이었다고 한다.
“옛날에 여기가 피난 곶이였어요. 예전에는 초가상간 집들 몇 채 있었어. 이 마을엔 여흥 민씨네 일가가 많이 살았어. 우리가 큰 집이었고.”

지금의 집 형태를 갖추게 된 건, 정해춘씨의 시어머니 때이다.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수리했다고 한다. 집 나이는 100 여년. 이 터에서 14대를 이었으니 오래된 공간이다.
“시어머니가 이 집을 지을 때 늘 그랬대, 언제 집을 완성하나. 목수 다섯 명이 와서 공사를 하는데 문짝만 만날 짜더래, 문짝만. 이 집 전체에 들어간 문짝이 130짝이래요. 그렇게 힘들게 만든 집이에요.”

▲ 작은 마루? 복도? 고택 안엔 숨은 공간들이 많다.
민경흥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군인이었다. 그래서 결혼하고 2개월 남짓 이곳에서 살다가, 분가했다.
“맨날 원주, 춘천 따라다니느라 여기를 못 지켰어요. 자녀들 교육 다 시키고 큰 딸 시집가게 될 때, (이곳으로)들어왔지요.”
분가해 사는 동안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빈집으로 둘 순 없어 다른 사람에게 집을 맡겼더니, 엉망이 되었다.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 방 저 방, 천장에서 비가 세지 않는 방이 없었다고 한다.

▲ 마루에서 바라본 안방. 할머니가 생활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들어올 때 수선을 해가지고 들어왔지. 불 때는 아궁이로는 못 살지. 보일러도 넣고 공사했어.”
마당 한 켠에는 우물이 있다. 우물로 물을 길러 마시다가 이제는 모터를 놔, 자동으로 물을 끌어 올린다. 아직도 우물물을 쓴다고 했다. 해마다 수질검사를 하는데 늘 합격 받는단다.

“집에서 살면서 불편한 건 없어요. 특별한 건, 안방에 화장실이 없는 게 불편해요. 한 밤중에 화장실을 가려면 문지방을 다섯 개는 건너야 가잖아, 그게 불편했지.”
방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보일러실로, 보일러실에서 화장실로. 그렇게 문지방을 넘어 다니다가 안 되겠다 싶어, 요강을 하나 장만했다. 뒤뜰에 내놓고 요긴하게 쓰고 있다 한다.

“30년 전에 여기 들어올 땐 어수선했어. 아는 사람도 없지, 마을 사람들은 땅값이 오르니까 팔고 나가지, 어수선했지. 그래도 내가 지켜야 돼. 그래서 들어왔는데, 내 생활은 다 서울에 있잖아. 차타고 나가는 거야. 동네 사람들은 흉도 봤겠지. 저 집 큰 댁 큰 며느리는 맨 날 나간다고, 못 살 겄는 게비다고(못 살겠는가 보다고).”

▲ 십 년도 넘은 땔감. 보일러를 장만해놓으니 쓸 일이 없단다.
잘 살아 왔다. 집에 들어오던 해에 큰 딸 여우고, 이 년 뒤 둘째 딸도 여웠다. 아들 장가도 보냈다.
“지금 불편한 건 며느리가 여길 안 살라고 햐. 며느리는 한국인인데 러시아에서 자랐어. 아들이 모스크바 대학에서 만났어. 아들 결혼하고 와서 3년 살았는데 문화차이가 크니, 힘들었겠지.”

며느리가 한국어를 배웠지만 받침 있는 발음을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도 기억나. 우리 아들이 정홍인데, 며느리가 발음을 못하니까 늘 ‘저놈이, 저놈이’ 이렇게 발음하더라고. 또 한 번은 며느리한테 우리 둘째 딸하고 몇 살 차이 나는지 물었더니 이러는 거 있지. ‘그년이요.’ 9년 소리가 그년이여.”

여흥 민씨네 추억이 깃든 공간. 그런데 이 집 옆으로 도로가 난다고 했다.
“사랑채 옆을 지나간다고 하더라고. 사랑채까지 내가 쓸고 닦고 할 수 없으니까...나 죽으면 이 집 어쩌나 싶은데 딸들이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

삶을 오롯이 맡겼던 이 집이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의 선택이 우선일 것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 정해춘 할머니가 졸업한 조치원여자고등학교. 학교깃발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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