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곡에 사는 음악인 ‘불혹소년’의 이야기

 

 

어느 날 콩나물신문 사무실에 ‘불혹소년’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 꾸러미가 나타났다. 종이 꾸러미를 헤쳐 보니 놀랍게도 음반이 나왔다. 구불구불한 손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도 끼워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사집인 듯했다.
 
시디를 컴퓨터에 넣고 음악을 틀었다. 첫 곡이 흘러나왔다. 경쾌한 연주에 얹혀 나오는 힘 있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을 때만 해도 며칠 뒤 부천 역곡역 가까이에 산다는 불혹소년, 한재영 씨와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곡 북부역에 있는 어느 커피집에 들어가 한재영 씨와 마주앉았다. 어쩌다가 이름을 그렇게(?) 짓게 되었을까?
 
“불혹이라는 나이에 이르면 대부분 먹고살기 힘들어 꿈 같은 건 잊어버리고 살잖아요. 나이 먹다 보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이 묻기도 하고요. 하지만 소년은 그렇지 않죠. 소년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이름이에요.”
 
중학생 때 우연히 사서 듣게 된 본 조비(Bon Jovi)의 음반으로 처음 음악에 빠지게 된 한재영 씨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음악만 듣고 사느라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를 마치고 나서는 ㅂ대학교 작곡과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4년을 공부했음에도 먹고살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클래식 전공한 음대 졸업생들은 대부분 유학 다녀와서 대학 강사로 뛰거나 음악학원에서 레슨을 하는데 저는 도저히 그럴 여건이 못 되서 방황을 좀 했죠.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어요. 부천에 있는 공장에서도 일했고 노가다, 배달, 주유소 알바 같은 일도 했어요.”
 
대학에서 배운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재영 씨는 십대 시절에 듣던 음악들을 조금씩 다시 듣기 시작했고 결국 거기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들을 들으니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고향에 온 거 같고. 그때가 마침 홍대 같은 데서 ‘인디’ 밴드들이 자리를 잡던 시절이었는데, 그런 친구들이 별다른 자본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 하며 사는 걸 보니 저한테도 자극이 되더라고요. 용기도 얻었고요. 그래서 다시 기타를 잡고 조금씩 곡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일 마치고 들어와 혼자 기타 치면서 살을 붙여 간 곡들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완성되어 한 곡 한 곡 쌓여 갔다. 곡이 점점 늘어나자 한재영 씨는 음반을 만들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연주든 편곡이든 웬만한 건 스스로 직접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대전의 어느 주유소에서 일을 하며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으니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었다. 혼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숲속에 들어가거나 다리 밑으로 내려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마저도 수줍은 성격 탓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니 정작 한재영 씨가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지르며’ 노래한 건 정식으로 녹음할 때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주유소가 아침 6시 출근이고 오후 4시 퇴근이었어요. 퇴근하고 밖에서 연습 좀 하고서 숙소에 들어와 자다가, 새벽 1시쯤에 일어나 출근할 때까지 녹음을 했어요. 처음엔 숙소 방에 장비를 갖다놓고 녹음을 했는데 그게 너무 힘들어 나중엔 근처에 작은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 거기서 녹음을 끝냈죠.”
 
일은 부천에서 가장 많이 했지만 ‘노가다’를 뛸 경우엔 전국을 다니며 숙소 생활을 해야 했다. 기타를 칠 시간은커녕 음악 들을 시간도 없었다. 부모님 일을 1년쯤 도와드려야 했던 적도 있었다. 한재영 씨는 대학 졸업하고 음반 낼 때까지 걸린 10년이라는 시간 중에서 연주나 작곡에 집중한 시간은 채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대전에서 올라온 지는 한 달쯤 됐어요. 1월 27일에 음반 나오고 나서 거기 정리하고 부천으로 올라왔죠. 지금도 부천에 있는 주유소에서 일해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끝내 작업을 마친 1집 음반에는 한재영 씨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가 그대로 녹아 있단다.
 
“음악 안에서는 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요. 제가 후회하거나 가슴 아파하던 내용을 누구한테 얘기할 수 있겠어요. 그런 건 부모님한테도 얘기 못해요. 근데 그게 음악 안에서만큼은 자유로워져요. 가슴 속에서 절절하게 느꼈던 얘기들을 음악을 통해 풀어 낼 수 있다는 게 참 좋아요.”
 
불혹소년 1집에 있는 노래 ‘있을 때 잘해요’의 가사엔 이런 부분이 있다.
 
그때는 몰랐었지 그게 그렇게 소중한 건지 / 난 그저 당연한 줄만 알았지 뭐 / 그땐 왜 몰랐을까 / 왜 진작 잘 좀 할 걸 그랬어 / 난 그저 나만 잘난 줄 알았지 뭐 / 참 바보 같이… / 있을 땐 몰라요 / 그러게 말야 / 있을 때 잘해요
 
혹시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쓴 가사 아니냐고 물어보았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대전 주유소에서 일할 때 만든 노래예요. 숙소에 TV가 없어서 DMB로 TV를 봤는데 어느 날 제 잘못으로 그게 부서져 버렸어요. TV를 못 보게 된 거예요. 한낱 DMB도 있다가 없으면 그렇게 아쉬운데 다른 건 어떨까 생각해 보니 사랑도 물론이고 모든 것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쓰게 된 가사예요.”
 
음악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살아 왔다면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갈등을 겪었던 시간들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께’라는 애절한 노래의 가사를 보면 더욱 그랬다.
 
아프지만 마세요 그럼 됐어요 / 속 끓이지 마세요 그냥 웃어요 / 때론 너무 외롭고 힘드실 때도 있겠지만… / 이제 그만 쉬세요 맘이 아파요 / 저는 걱정 마세요 기운 낼게요 / 못난 아들 만나서 여태 고생하시네요 / 엄마 아빠 사랑해요 말은 못해도… / 죄송해요 이말 밖에는…
 
“음반 나오고 부모님한테 들려드렸는데 가사가 너무 슬프고 우울하다고 하시시더라고요. 부모님은 제가 음악하는 걸 반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너는 음악 안 하면 절대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걸 하며 살아라’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제가 음악 말고는 취미도 없고 따로 만나는 친구도 없고 음악 외에서는 행복을 찾지도 못할 걸 부모님이 다 아시니까요.”
 
 
불혹소년의 1집 음반 시디는 종이로 만들어진 작은 꾸러미에 들어 있다. 표지에 그려진 그림도, 뒷표지에 적힌 곡 제목들도 모두 한재영 씨가 손수 글씨를 썼다. 시디와 함께 들어있는 가사집에도 한재영 씨의 손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시디도 제가 공시디에 한 장씩 구웠어요. 굳이 공장에서 백 장 천 장 찍어 봐야 어디 줄 데도 없고 집에 쌓아 두고 있으면 괜히 마음만 아플 테니 그때그때 필요한 수량이 있을 때마다 직접 굽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죠. 표지에 있는 그림도 제가 그렸고요. 매번 손으로 그리니 아마 나중에 만든 표지일수록 그림이 더 나아져 있을 거예요. (웃음)”
 
작곡, 작사, 편곡, 연주, 노래, 녹음, 그리고 그림까지 모두 혼자 힘으로 해 냈다. 기타, 베이스, 키보드, 봉고, 쉐이커 등 웬만한 악기도 직접 연주했다. 게다가 음대를 졸업한 뒤 갖가지 일자리를 옮겨 다니던 끝에 10년 만에 낸 음반이다. 자그마한 종이 꾸러미에 담긴 자신의 1집 음반을 처음 손에 쥐게 되었을 때 한재영 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엔 제가 만족할 만한 음반이 나오게 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음반을 만들게 되니까 제 인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음반 냈으니 이제 음악인으로서 어떤 활동을 해 나가야 할 텐데 그게 막막하니까 솔직히 성취감 같은 건 별로 못 느꼈어요. 홍보는 어떻게 하고 공연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음악 만들 때가 더 재밌었죠.”
 
올해로 39살인 한재영 씨는 내년이면 마흔 살, 불혹이다. 불혹은 ‘더는 마음이 무엇에 홀려 갈팡질팡 헤매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헤매지 않으려면 마음을 비끄러맬 수 있는 튼튼한 기둥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한재영 씨에게는 음악이 바로 그것일 테지만 이 세상에서 음악인으로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홍보를 하려면 공연을 해야 할 텐데 저는 혼자니까, 인터넷에 구인광고를 내서 같이 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같이 기타 치며 공연할 딱 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는데 잘 안 찾아지네요. 그리고 음반에 담긴 것들 말고 곡들이 더 있긴 한데 그걸 어떻게 발표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싱글로 한두 곡씩 발표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어요. 이번에 음반에 실린 여덟 곡을 한꺼번에 작업하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앞으로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느냐는 물음을 던져 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음악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려주기만 할 뿐이었다.
 
“음반을 하나 내긴 했는데 반응이 거의 없어요. 사람들이 들어보지를 못하니까요. 제 주변의 몇몇 사람들만 듣는 게 전부예요. 돈과 열정을 비롯한 제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들었는데도 그렇다면 과연 음악 활동이란 걸 얼마나 지속해 나갈 수 있을까, 고민이 안 될 수가 없는 거죠. 당장 다음 작업은 시작할 수 있기나 할까.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은 나이 먹을수록 더 커지는데 난 어쩌면 좋을까. 즉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할까’가 아니라 ‘음악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고민으로 가는 거예요. (웃음)”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하는 한재영 씨의 얼굴은 대책없이 해맑기만 했다. 나는 아직 던지지 않은 뻔한 물음을 들이밀었다. 콩나물신문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디를 사 주시거나 음원을 구입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지만 솔직히 거기까지는 기대하지도 않고요. 무단 복제도 좋고 불법 다운로드도 좋으니 최대한 제 음악을 많이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하니까요.”
 
불혹소년의 음악을 들어보려면? 음원은 웬만한 음원 사이트에 다 올라가 있고 시디도 몇몇 온라인 음반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다. 유튜브(youtube.com)에서 ‘불혹소년’으로 검색하면 몇 곡이 나온다. 블로그(blog.naver.com/aitlt)나 페이스북(facebook.com/aitlt), 카카오톡 아이디(40boy)를 통해 직접 음반을 요청해도 된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재영 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년과 소년이 아닌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나이가 어리다고 다 소년은 아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다 소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아마 소년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을 전혀 모르거나, 세상을 잘 알지만 마치 전혀 모르는 것처럼 세상과 대책없이 맞서거나.
 
불혹소년 한재영 씨는 내년이면 정말 불혹이 된다. 먹고사는 일이며 부모님 모시는 일이며 대책없이 몰아치는 온갖 일들이 아마 그때도 한재영 씨의 마음을 갈팡질팡 헤매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내년에도 한재영 씨는 음악이란 것을 손에서 놓지는 않을 것 같다. 다른 것에는 휘둘리고 혼란스러워해도 딱 하나 음악만큼은 놓치지 않는다면 내년에마저 ‘불혹소년’이라 불려도 괜찮지 않을까.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불혹이고 어떤 것에도 대책이 없는 것이 소년이라면, 불혹소년이야말로 한재영 씨에게 딱 맞는 이름이 아닐까.
 
그의 음악은 우울하지만 따뜻하다. 딱히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살면서 저렇게 대책없이 따뜻해도 될지 걱정마저 든다. 그러나 그 ‘대책없음’이 불혹소년의 가장 큰 매력이다. 40년 가까이 살아 오며 이제야 인생에서 가장 큰 대책없음과 마주하게 된 한재영 씨에게 짝짝짝 손뼉을 쳐 주며 응원해 주고 싶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한재영 씨와 역곡역 근처에서 짜장면 한 그릇씩 먹기로 약속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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