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다녀와서

(수원청소년 문화센터는 수원시 예산을 지원받아 해마다 답사 경비 절반을 보조하는 형식으로 수원청소년 30여 명을 모집하여 4박 5일 여정으로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다녀온다. "2014년 수원청소년 청년백범 답사단"은 2014년 12월 20일 출발하여 24일 귀국하였다. 아래 글은 이 답사에 참여한 수원 동원고 1학년 배성근 학생의 여행기이다. - 콩나물신문 편집팀)  

 

배성근(중국 남북 해염호에서 촬영)  

11월 모의고사를 보던 날, 교실 뒤 게시판에 붙어있는 한 공고문을 보았다. 수원 청소년 문화 센터에서 청년 백범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친구들끼리 이번에 학교에서 수련회도 못가고 수학여행도 못 가는데 중국 한번 가보자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 반이 단합이 잘되어서 10명이나 신청하겠다고 했다. 29명 중에 3분의 1이 넘는 인원이 우리반이였다.

나는 이번에 중국에서 친구들과 좋은 경험을 쌓고 발전한 중국을 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한국사에서 근현대사를 배웠는데 범위가 겹쳐서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고, 이번 기회에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활동하셨던 곳을 방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여러 방면에 걸쳐서 일제강점기 때의 나쁜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고, 이러한 잔재들을 고치려면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역사탐방이 좋은 기회일거 같아서 신청하였다.

중국으로 역사 탐방을 가기 전에 사전 교육을 받았다. 두 번의 토요일은 수원 청소년 문화 센터에 가서 공부하였고, 그 다음 토요일은 많은 독립투사들이 안장된 효창원과 백범김구기념관,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중국에서 돌아오신 후 암살당하시기 전 까지 머무르셨던 경교장,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지어져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다녀왔다. 비록 시험기간이였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알지 못하면 중국에 가도 역사탐방이 아닌 그저 관광을 다녀올 것 같아서 참석하였다. 시험공부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경교장 - 김구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머무르던 곳

백범기념관에서 역사 교육

교육 중에 홍소연 실장님께서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꿈꾸었던 나라가 무엇 이었을까 하고 물어 보셨다. 나는 잘 몰랐다. 김구 선생님께서 진정으로 꿈꾸었던 대한민국이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홍실장님께서 김구 선생님께서 원하시던 나라는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라고 알려 주셨다.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일제의 억제와 탄압 속에서도 부강한 나라가 아닌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를 원하셨다니 말이다. 나는 빨리 중국에 가서 김구 선생님이 바라던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가 무엇이었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백범기념관에서 단체 촬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말고사가 끝났다. 같은 주 토요일 새벽 다섯 시 삼십분까지 수원 청소년 문화센터로 집합이었다. 아침잠이 많아서 일어날 수 있을까 불안하였지만 무사히 잘 일어나서 제시간에 도착했다. 하지만 늦은 사람이 있어서 출발 시간이 늦어져 약간 언짢았지만 이해해주었다.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보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하루 평균 이용객이 몇 만이나 된다는 말이 실감났다. 출발하기 전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사려했는데 출발시간이 늦어진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시간 약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첫날부터 일정이 빽빽했다. 서금로 거리, 보경리 청사, 훙커우 공원, 예원 야경 구경, 황포강 야경을 구경하니 하루가 금방 갔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순식간에 지나갔다.
 

보경리 상해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만국공묘에 묻힌 독립지사 석물 앞에서 모두 큰 절을 올리다. 다른 독립지사들도 김구 선생처럼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홍구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뀜)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이번 역사탐방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많은 것들 중 마음에 와 닿고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첫째로는 중국이었다. 나는 중국이 잘 사는 나라인줄은 알았지만 상하이를 보고 나니 이렇게까지 잘 살줄은 몰랐다. 자동차의 상당수가 벤츠, 아우디, BMW 등등 외제차였다. 또한 황포강에서 상하이 야경을 보니 아직까지는 아니지만 몇 십년 안에 뉴욕을 뛰어넘는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상하이 황포탄에서 본 야경. 왼쪽에 둥그런 모습으로 동방명주 빌딩이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화 의식수준은 경제의 발달을 못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저우 서호에서 ‘인상서호’라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이 만든 호수 위에서 하는 공연을 봤다. 너무 화려하고 멋졌다. 야외공연이라 추웠는데도 추위를 잊게 할 만큼 잘 만든 공연이었지만, 옆에서 중국인들이 자꾸 떠들어서 언짢았다.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데 박수를 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인사하는 도중에 나가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나와서 인사하는데 박수 쳐주는 이가 없어서, 나와 내 친구들이 열심히 박수를 쳐주었다.

인상서호 공연 모습. 호수 위가 무대라서 배우가 물 위를 걷는 듯이 보인다. 

 

인상서호 공연 모습. 호수에 있는 물을 잘 이용하여 환상적인 공연을 펼친다.  


두 번째로 기억에 가장 남았던 것은 한국과 중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김구 선생님과 쑨원이었다.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김구선생님과 다른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힘들었고, 나라를 위해 힘썼는지 다 알려면 평생도 모자라겠지만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특히 보경리 청사는 건물이 작고 허름했지만, 그 안에서 김구 선생님이 대한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맞서 싸웠을 것을 생각하니 그 작고 허름한 건물이 무척 커 보였다. 한편 쑨원은 유일하게 중국의 공산당과 대만의 국민당 양쪽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쑨원의 묘에 갔었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과연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처럼 묘가 크고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정치적 이념이 다른 두 당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는지 궁금했다.

 

중산릉(쑨원의 묘). 중국인들이 쑨원을 대접하는 크기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김구 선생님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쑨원은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포르투칼령이었던 마카오와 불과 30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동양과 서양, 두 문명의 접경 지역이었다. 그러한 배경 때문일까. 그가 받은 교육 역시 그러했다. 그는 고향에서 전통적 교육을 받은 후, 그의 형 쑨메이에게 가서 호놀룰루에 있는 기숙학교인 이올라니 대학에 다녔고, 거기서 기독교 교리와 서구학문을 배웠다. 이후 그는 의사 자격증을 취득 했지만 의사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의식적으로 계몽 시킬 수 있는 정치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12년 쑨원은 신해혁명을 일으켜 부패했던 청 왕조를 몰아내고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賻儀)를 폐위시킴으로써 중국에서 군주제국가는 사라지고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이 성립하였다. 쑨원은 구제도를 타파하고, 서양열강으로부터 벗어나 인민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쑨원은 또한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로 유명하다. 그는 태평천국의 혁명사상을 이어받아 중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하였고, 그가 살아있었을 땐 막강한 영향력으로 화합을 강조해서 국공합작을 이루어 냈다. 쑨원은 공산주의를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에도 호의적이었고, 특히 공산당이건 국민당이건 다 같은 중국인이니 힘을 합쳐서 외세를 몰아내고 새 나라를 세우자면서 민족화합을 이끌며 중국인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임시정부에도 많은 후원을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1968년 쑨원에게 독립운동가에게 주는 건국훈장을 드렸다.

중국에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김구 선생님이 있다. 쑨원은 중국에서 나라의 아버지라 칭하며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몇몇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김구 선생님을 폭력으로만 일제에 대항한줄 아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김구 선생님을 테러리스트라고 까지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이번 역사탐방을 하며 김구 선생님이 원하시던 대한민국의 꿈과 열정을 볼 수 있었다.

김구 선생.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에서-

일제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김구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독재의 나라가 아니라 자유의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결국 김구 선생님은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를 원하셨다.

 


그렇다면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는 한명이 노력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높아져서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된다. 나는 왜 김구 선생님께서 사비를 털어가며 학교를 지어 청소년들 교육에 힘을 쓰셨는지 이해가 갔다. 교육이 미래다.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려면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높아져야하고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려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징(남경)에 있는 대학살기념관. 일본의 만행을 찾아내고 정리하여 후손들에게 교훈을 새겨 주는 곳이다.

요즘 한국의 교육을 생각해봤다. 분명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교육 체계가 잘못 된 부분이 상당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선진국에 들어가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교육만은 근현대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일제 식민 교육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고 그 잔재들을 고쳐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개혁해야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현재 교육에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교육을 개혁하고 개정한다고 하면 일단 부정적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고등학교 1학년부터는 한국사가 필수로 바뀌었지만 그전 까지는 한국사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다. 이것도 일제의 식민 교육 중 하나였고 오랜 시간동안 개혁되지 않았었다. 또한 2011년 학생 인권조례가 발표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다녔던 남경의 금릉대학(현 남경대학)도 방문하였다.

나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2년간 하다 왔는데 처음 갔을 때에 무척 놀랐다. 선생님이 체벌을 하거나 인격적인 모욕을 주거나 하지 않으셨다. 거기서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욕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체벌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학생들이 교권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선생님을 더 존경하고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이런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려고 몇 백 년이 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도 이런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학생을 체벌함으로써 하는 교육은 일제의 무단 통치 때 하던 총칼 차고 했던 교육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해 주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좋은 취지를 반대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이 많았는데 그들은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해 주다보면 교권이 추락하고, 학생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여론이었고, 그런 여론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학생인권조례 발표 이후에도 여전히 체벌을 하시는 선생님이 계시고 상당수 선생님께서는 학생에게 욕을 하시며 인격적인 모욕을 준다. 나는 학생을 체벌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맞아야지 정신을 차리는 것은 짐승도 할 수 있다. 사람은 맞지 않아도, 몸으로 느끼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하고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서 쇠사슬학원을 보았다. 말 그대로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쇠사슬로 잠궈 놓고 계속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졸거나 시간을 낭비하면 점심시간도 박탈해 버린다. 나는 과연 이것이 의미가 있는 공부일까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감금시켜놓고 고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공부의 목적이 많이 변질 된 것 같다. 자신의 꿈도 정하지 않고 그저 등급에 맞춰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말 그대로 학생들이 상품화 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찾아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해 보인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최소한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구 선생님이 귀국하여 1946년 강화 합일학교를 방문했을 때 남긴 휘호 ‘홍익인간’.
지금도 강화 합일학교에 잘 보관 되어 있다.


나의 꿈은 경기도 교육감이다. 현재 경기도 교육감이신 이재정 씨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교육적 악습을 폐지하고 개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개혁을 맹목적으로 반대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보여서 안타깝다. 대한민국이 앞서나가려면 문화가 진보하여야 하고, 진보된 문화를 가지려면 청소년들을 잘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똑똑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인성교육을 시켜야 한다. 나는 요즘 같은 시대의 인재는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쑨원 선생님처럼, 김구 선생님처럼 대한민국의 교육을 개혁하고 싶다. 열심히 공부하여 꿈을 이루어서 그때는 학생들이 경쟁이 아닌 협력, 협동을 배웠으면 좋겠다. 또한 학생 개개인들의 의식을 향상시켜 줄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그때에는 청소년들을 잘 교육시켜서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보아 100년, 200년 뒤에는 대한민국이 김구선생님께서 바라시던 문화가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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