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덕 님은 부천에서 풀무원을 만든 원경선 옹의 딸이자, 원혜영 국회의원의 여동생입니다. 남편 김준권 님과 경기도 포천에서 농장을 꾸려 나갑니다.  - 편집자 주)

어제 내 고향 부천에 다녀왔다.
이제는 대도시가 되어버린 부천과 고향이란 말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내게 자랄 적의 기억이 그대로 따뜻하게 남아있는 부천은 마음으로부터의 나의 고향이다.

여러 해 동안 부천 소명여고의 동문회를 맡고 있다가 어제 동문회 총회를 열고 믿음직한 후배에게 동문회장을 넘겨주었다. 여고의 동문회장은 힘들다고 잘 안 하려고들 하는 바람에 장기집권(?) 했는데 등을 떠다밀긴 했지만 맡아준 그 후배가 정말 고맙다.

40년 전에 소명여고를 졸업했는데 이제까지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께서 6.25 전쟁 후에 공동체를 시작하셔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사람들과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동네와 떨어진 도당리 산 기슭에 우리집이 있었다. 후에 우리집 마당을 통과하여 산으로 길이 났다. 길을 만든 회사가 준공 허가를 받느라고 길 옆에 심었던 회초리 같았던 벚나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름드리 나무로 자랐다. 만발한 벚꽃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부천시는 도당산 벚꽃 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벚꽃 축제 기간이면 꽃구경하러 밀려드는 사람들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미어져서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는 오빠 집으로 제대로 걸어 갈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집에서 많은 공동체 식구들을 데리고 농사지어 먹고 사느라고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언니, 오빠에게 서울 변두리에 방 한 칸 얻어준 것도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나보고는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소명여중에 가라고 하셨다. 소명학교에 찾아가서 교장 수녀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교육관이 뚜렷한 좋은 분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소명여중 입학 원서를 사다가 쓰시고 나보고 교장 선생님 도장을 받아오라고 해서 가져갔더니 교장 선생님이 불같이 화를 내셨다.

이게 누가 쓴 거야. 글씨도 엉망이고!

나는 교장선생님이 우리 아버지가 직접 쓴 것을 모르고 내가 쓴 줄로 알고 야단치시는 줄 알고 아버지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데 알고보니 나를 소명여중에 보내려는 아버지께 화가 나서 글씨를 트집잡은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악필이긴 했다.

그 때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고 들어가던 때였다. 공부 잘해서 서울에 있는 소위 좋은 중학교에 들어가면 그 학생이 다닌 초등학교에서도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나를 소명여중에 보내겠다고 하자 교장선생님이 말렸는데 아버지가 듣지 않으시고 소명여중 입학 원서를 써 왔으니 화가 나신 것이었다. 부모만 그 애를 길렀냐, 우리도 잘 가르쳤다, 며 아버지께 화를 내셨다고 했다.

소명여중에서는 내가 와 준 것이 신통했던지 입학식 날 나의 6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불러 전교생 앞에서 감사장을 드렸다. 부상으로 은수저 한 벌도 드렸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중학교 평준화가 이루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지만이 때문에 중학교 입시를 없앴다는 말이 돌았다. 어쨋든 그 때부터 부천에 사는 애들은 다 부천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소명은 그 당시 부천에 있는 유일한 여학교라서 부모들은 아이들이 소명학교에 가는 걸 좋아했다.

나는 소명여중고 6년을 다녔다. 중학교 3년은 빨간 세일러복, 고등학교 3년은 곤색 세일러복을 입고서.
어느 해 봄에, 시험기간이라고 학교에 남아서 늦게까지 공부를 한 날이 있다.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다. 밤에 운동장으로 걸어 나오는데 아카시아 향기가 강렬하게 맡아졌다. 학교 뒤의 원미산에서 흘러나오는 그 향기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지금도 코 끝에 남아있는 것 같다. 아까시가 표준말이 되었다지만 나는 아카시아라고 말해야만 그 향기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 아카시아 향기 진동하던 원미산은 15년 전에 커다란 길이 나느라고 뚝 잘려 버렸다.
 

 고3 때. 대학입학 예비고사 수험표.

 

대학을 졸업하고 소명여고로 돌아와 국어선생이 되었다. 내가 입었던 것과 똑 같은 곤색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선생님! 하고 부르는데 어찌 그리 어색하던지. 처음에는 저학년이 복도에서 자기들 선배더러 언니! 하고 부르면 나를 부르는 줄 알고 휙 돌아본 적도 여러번 있었다.

담임을 맡았던 반 아이들에게 점심으로 밥만 싸오라고 해서 우리집에서 쌈장을 만들어다가, 집에서 기르던 상추를 한 광주리 따서 가져가 교실에서 함께 먹기도 했으니 나름 열심인 선생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 있던 게 몇 년 되지 않았지만 그 때의 제자들은 지금도 찾아오고 연락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한 아이가 결혼한다고 신랑될 사람과 함께 우리집에 찾아왔는데 그 남편감이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자기와 결혼할 사람이 우리 선생님, 우리 선생님, 하니까 내가 나이가 많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과 내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가 결혼한 후에 내게 깍듯이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대해서 처음보다 더 민망하기도 했다.
 

 고2 담임반 아이들과 함께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갔을 때.>


결혼하여 큰 애를 낳고 소명여고를 떠났다. 교장수녀님께서는 막내까지 낳아 초등학교 보내면 도로 와라, 하며 보내주셨다. 그 분은 내 여고 시절의 은사이셨다. 학교를 그만 두신 후에는 북한 돕기를 힘써 하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녀복이 아닌 몸빼 바지를 입고서 북한을 누비셨다고 한다. 그 수녀님은 북쪽에서 신뢰하는 몇 안되는 분에 들어간다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부천에서 멀리 떨어진 양주에서 유기농업을 하는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 소명은 아스라한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다 동문회가 조직되고 애쓰는 선배들에 대한 인사로 행사 때 얼굴을 내밀다 보니까 내 차례가 되고 말았다. 거리도 멀고 시간을 낼 형편도 안 되어 나중에, 나중에, 하면서 미루었지만 더 핑게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어제 아침 일찍 소명에 가서 이것저것 필요한 준비를 했다.
동문회 행사를 다 마치고 그동안 함께 일하고, 또 일 할 후배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늦게 돌아오는데 왜 그런지 감상적인 마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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