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건을 대리하는 직업인 노무사는 가끔 인생 상담까지 요구받는 경우가 있다. 가난한 노동자가 산업재해(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경우, 그 노동자와 가족의 생계는 막막하다. 상담을 하다 보면 가족들의 절박한 요구가 전이되어 상담이 버거울 때가 종종 있어 감성적인 노무사들은 산재사건을 기피하기도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감성으로 좀 더 세밀한 상담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결론을 이끌어 낼 때도 있어 보람을 느낀다.

노동자와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담고 있다. 나는 평소 이런 사례를 모아 사연이 있는 노동자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번엔 가족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어떤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50대 산재 노동자의 친구

2013년 늦가을, 지방에 소재한 한 버스노조위원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지역의 노무사들이 산재를 기피하니 와서 상담해 달라는 것이다. ‘나라고 별 수 있을까?’라는 마음이었지만 재해자의 절박한 마음을 생각하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재해자는 50대 버스기사였고, 중환자실에서 뇌경색으로 한 달 동안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있었다. 나는 병원 앞에서 재해자의 친구와 노조 위원장을 만나 상담을 시작했다. 다행히 재해의 업무관련성을 입증할 자료는 위원장이 제공해 주기로 약속 받았다.

그는 “소수노조 위원장으로서 운신의 폭이 좁지만 산재를 당한 조합원을 두고 볼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스페어기사’들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설명해 주었다. 스페어기사는 정규직 기사들처럼 고정적인 정규노선을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기피하는 노선에 주로 배치된다. 따라서 운행조건이 열악하고 정거리․장시간 운행이 많다. 재해자는 2년 가까이 스페어기사를 맡아왔고, 뇌경색이 발병한 달에는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로 돼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회사에 더 잘 보이려고 힘든 노선을 거부하지 못했고, 무리하게 노선을 운행하던 중에 쓰러진 것이었다.

재해자의 친구는 간절한 표정으로 “산재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돈을 모았다면서 착수금을 건넸다. 재해자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서 착수금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무척 의아해 하면서 ‘친구 관계가 각별한 분이구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재해자의 사연을 듣고 친구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됐다.

재해자는 10년 전 덤프트럭 운전을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고생(당시 산재 신청하지 않음)한 적 있다. 그 후 부인은 경제적인 문제를 이유로 이혼했고, 최근까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은 몇 달 전에 군대에 입대한 상태여서 환자를 돌볼 수 없었다.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재해의 업무관련성도 문제지만, 개인적인 질병에 대한 소명도 중요하다. 그래서 건강보험공단 자료와 개인 병력에 대한 자료 등 서류를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친구는 환자의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친구는 환자의 아들이 병역 제외사유에 해당한다고 병무청에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병무청에 산재서류 일체를 보내어 아들이 병역에서 일시 제외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들이 병역의무에서 일시 제외되었고, 환자 개인 병력에 대한 자료도 모두 준비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아들과의 연락은 곧 끊겼다.

‘산재인정’을 가장 기뻐한 친구

작년 봄, 관할 질병판정위원회를 처음 가 보았다. 고속버스로 편도 4시간, 지리를 모르니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1시간 걸려 질병판정위원회에 도착했다. 그날 심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척 쓸쓸했다. 게다가 다음날 보류 결정이 내려져 더욱 허탈했다. 주당 70시간이 넘는 근로시간을 입증하는 것은 노선도와 왕복 운행 횟수로 가능했다. 하지만 10년 전에 발병했던 뇌졸중의 재발 여부 때문에 아주 어려운 케이스였다. 결국 질병판정위원회의 위원들도 10년 전 발병 당시의 병원기록 전체를 요구했고, 사건은 보류되었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10년 전 병력까지 모두 검토한 재심의 위원들은 이번 재해가 업무에 기인한 과로 및 스트레스와 관련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1달간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이던 재해자는 의식이 돌아왔다. 어느새 그는 친구의 극진한 돌봄으로 재활의지도 강해졌다. 친구는 이틀에 한번 꼴로 병원에 들러 환자를 목욕시키고, 농담을 나누는 등 보호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재해자는 뇌손상이 심해 예전 같은 건강을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했고, 누군가의 간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작년 9월, 재해발생 1년이 다가 오자 관할 지사는 “환자가 입원치료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 자문의사협의회 결과”라며 “3개월 후 통원”을 통보했다. 반신불수의 환자를 누가 어떻게 통원시킬 것인가? 그러자 그의 친구는 환자가 갈 수 있는 병원을 수소문해 보았다.

입원 종결로 반신불수 환자가 머물 수 있는 의료시설은 없었다. 작년 11월 근로복지공단에 입원연장을 재차 요청했으나, 두 번째 열린 자문의사협의회는 겨울까지만 입원을 인정하고 2월 이후 통원을 결정을 했다.

산재로 통원치료를 하라는 뜻은 건강보험으로 입원치료를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회보험 체계는 산재환자는 산재보험 재정으로, 건강보험 환자는 건강보험 재정으로 운영되게끔 되어 있다. 따라서 중복치료가 발생한다면 이중수급이 되어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병원들은 일제히 산재환자의 건강보험 적용 입원을 거절했다.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다면 통원치료를 결정 받은 산재 환자가 일반 병원에 입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 자문의사협의회가 있던 날, 친구는 자신의 차에 반신불수 재해자를 태우고 왔다. 나는 산재병원으로 옮긴다면 입원 연장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대전 산재병원으로 옮기자”고 재해자를 설득했다. 그러나 재해자는 “친구와 고향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설득할 명분이 없었다.

‘깨복쟁’이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우정

나는 재해자와 그 친구가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 궁금했다. 재해자는 “깨복쟁이(어린)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고등학교 학창시절 자신은 ‘주먹’이었고 친구를 도와줬었다고 했다.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들의 ‘찐한 인연’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가정을 꾸리고 바쁘게 살다 보면 서로 잊고 멀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나이 오십을 넘기고도 깊은 우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친구에게 “재해자가 전생에 (친구의) 생명을 구해준 인연이었나 봐요.”라고 했다.

입원 종결일은 다가왔다. 친구는 수소문 끝에 재해자를 ‘장기요양보험제도’로 들어갈 수 있는 요양원으로 입소시키기로 했다. 요양원은 ‘간병’이 아니라 ‘수발’ 개념의 서비스만을 받을 수 있다. 이곳에서 수발이라도 받지 않으면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재해자의 처지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통원 치료는 장애인 택시를 정기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여전히 중복 수급 문제가 남지만 역시 다른 선택이 없었다.

옛말에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세상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족은 ‘비빌 언덕’이다.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는 국가의 ‘사회보장시스템’이 비빌 언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의 사회보장시스템이 ‘온전한 비빌 언덕’이 되지 못하는 우리 현실에서 50대 산재 노동자의 ‘친구’는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다. 보호자가 된 그 친구의 인생에 재해자는 돌봐야 할 가족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까지 친구의 짐을 지고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 여전히 그런 우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그 우정이 막다른 길에 내몰린 재해자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다.

출전 : 개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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