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릿속 위인과 가슴 속 위인

중3 때인 1976년 고입 연합고사를 앞둔 가을 하늘은 늘 찌뿌듯했다. 또래 아이들은 연합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고등학교 진학조차 어려운 나에게는 청명한 가을 하늘은 없었다. 누나와 형이 그랬듯이 중졸로 끝내야 하는 가정 사정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형도 공부를 좋아했지만 가정 사정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유리 가게 점원으로 가 그 때까지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공부벌레인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꼭 가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10년 넘게 여섯 식구가 단칸방 살이를 했어도 별 불평이 없었던 내가 결국 고입 시험 앞에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처지가 된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자전거를 고치다 손을 베이고 말았다. 부랴부랴 아까징끼(빨간 소독약 ‘머큐로크롬액’의 그 당시 용어)를 찾기 위해 방 서랍을 뒤지는데 웬 고서적 같은 낡은 공책이 손에 잡혔다. 호기심에 얼른 펼쳐 들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공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버지의 젊었을 때의 일기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무섭고 무뚝뚝한 아버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분이 쓴 섬세한 일기장이라니….

 

어느 정도 읽었을 때 온몸이 묘한 감정으로 휩싸여 옴을 어렴풋이 느꼈다. 사실 이 때까지의 아버지 인상은 조금 과장을 한다면 두려움 자체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우면서 숱하게 벌선 기억이 아버지에 대한 전체 이미지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남매가 비오는 날 울타리 없는 마당에서 토끼뜀 뛰는 장면은 동네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기도 할 정도이다.

파란 펜글씨로 촘촘히 써내려간 일기. 금단의 사과를 몰래 먹듯 나는 살살 떨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너무 떨려 얼마 동안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일기장이 나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만은 틀림없다. 일기는 아버지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시골 할아버지 댁을 가출하면서 시작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오산 시골 초등학교만 마치고 할아버지 농사를 도와 드리다가 군대에 가셨다. 제대를 했을 때는 농사로는 먹고 살기가 너무 싫어 할아버지 만류에도 가출을 하셨다. 그래서 가출 처음으로 안착한 곳이 경기도 수원시 권선동이었는데, 훗날(나의 중학교 시절) 아시아의 전설적인 역도 연수가 된 안지영 선수 집 머슴살이였다는 것이다.

막상 가출은 했지만 별 기술도 없고 해서 장사를 하기 위한 밑천 마련을 위해 잠시 몸을 의탁한 셈이었다. 이때부터 몇 해 동안인, 아버지 20대 청춘의 고뇌가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막상 농사짓기 싫고 많은 돈을 벌려고 가출했지만 농사지을 때 이상으로 고생한 얘기하며, 그래도 이를 악물고 반드시 성공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하며….

안지영 선수 집에서 나와 목장에서도 몇 해 일을 하셨는데 처음에는 젖을 제대로 못 짜 갖은 꾸지람을 받았던 얘기하며 그야말로 머슴으로서의 온갖 고생이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의 20대 초반의 일기장을 본 셈이었다. 너무 떨려 더 이상의 일기를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일기는 20대의 기록만을 담고 있었던 듯하다.

 

나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본 뒤 두렵기만 했던 아버지가 자상한 내 마음의 위인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쉽게 아버지와의 관계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힘든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시면 나도 모르게 잽싸게 뛰어나가 아버지의 힘든 짐을 받아들게 되었다. 그 전에는 공부해야 되는데 하면 마지못해 나가 파김치가 된 아버지를 맞았지만 일기장을 본 뒤로는 힘찬 청소년으로 뛰어나가 아버지를 맞았다. 이렇게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나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 나도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열어 가리라."

그래서 나는 현실상 어려운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꿈을 과감히 접고 대신 스스로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추가했다. 공부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이 아니라 검정고시를 볼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의연해질 무렵 우리 집 가정 사정을 잘 아시던 수원 중학교 담임선생님 홍승복 선생님께서 국비로 배울 수 있는 철도고등학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셨다. 나는 적성에 관계없이 아무 주저 없이 이 학교를 선택했다. 공무원이 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공무원 월급이 박봉이라는 것을 모르기도 했지만, 공무원이 최고라는 아버지 말씀대로 따른 셈이었다.

다행히 합격해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씨의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급하게 선택한 진로였을까? 적성이라는 것이 중요하는 것을 나는 철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쉽게 진로를 다시 바꾸지는 못하고 방황의 숲을 헤매게 되었다.

다행히 독서와 교외 동아리 활동(한글학회 부설 한글나무, 지도교사: 오동춘, 1977~1979)으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때 친구들과 읽었던 외솔 최현배님의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이란 책이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슬기롭고 옹골찬 국어학자가 되어야겠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용성(‘庸性)’이라는 한자식 이름에서 토박이말 이름(슬옹)으로 바꾸었다. 친구들에게 이 기쁜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 몰래 이름표를 바꿔 달고 다녔다. 일주일만에 선생님께 들켜 뜯기고야 말았지만 다행히도 그 전 날 찍은 사진이 남아 그 때의 열정을 증언해 주고 있다

철도 공무원과 10여개의 일자리를 전전하면서, 고학으로 대학원까지 마칠 때까지 힘들 때마다 나의 힘이 되어 준 것은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초등학교 때 흠모했던 위인들이 내 머리 속의 위인이었다면, 중학교 때 갑자기 찾아오신 아버지는 가슴 속의 위인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20대에 처절하게 증오했던 가난의 설움을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셨다. 막내인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단칸방 살이를 벗어나지는 못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여동생도 가난 때문에 감기를 제 때 치료하지 못해 내가 세 살 때 폐렴으로 죽었다. 세 살 때 기억은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동생이 죽은 충격적인 사건 때문인지, 아버지께서 붕대를 감던 모습하며 야산에 묻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원 공군 비행기장 옆에 살았던 우리는 그곳의 라면과 누룽지 부스러기를 한 포대씩 사다가 한 달 내내 끓여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목장에서 겨우 자전거를 구입하시고 자전거로 빈병을 모아 파는 장사부터 시작해서 오토바이로 아이스크림을 배달하는 배달업을 10여년이나 하셨다.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아까워 버리지 못하셔 상자째 집으로 가져오셨다. 그래서 삼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이삼십 개의 ‘하드’를 먹어 치웠던 기억이 새롭다. 많을 때는 배탈날까봐 끓여 먹기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결국 내가 대학원을 마칠 때쯤 트럭으로 배달을 하시면서 자수성가를 하셨지만 환갑 몇 년 뒤에 그만두셨다.

 

수원 안룡초등학교 학부모대표로 부모님 말씀을 낭독하시는 모습 

도매업을 그만 두실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사는 처지가 되셨지만 몇 년 째 15년 된 트럭을 버리지 못하셨다. 그렇다고 자가용으로 쓰지도 못하고 결국 13년 된 ‘봉고’랑 맞바꾸셨다. 최근 레저용 비싼 차를 살 형편도 되시지만 굳이 13년 된 중고 봉고를 택하신 아버지. 상당한 재산을 종친회 장학금으로 내놓으신 아버지. 가난의 한을 화려한 돈으로 풀지 않으시는 아버지. 어쩌면 아버지는 지난 날에는 할 수 없이 가난한 삶을 일기장에 그렸지만 이제는 그것을 추억으로, 다른 것으로 일기장을 채우실지 모른다. 오늘 밤, 아버지께 일기장을 보여 주십사 졸라야겠다.

아버지가 마지막 타고 다니시던 봉고 

* 출전 : 김슬옹(2013). 열린 눈으로 생각의 무지개를 펼쳐라. 글누리. 12-17쪽.
 
* 김슬옹님 아버지는 연안김씨 오산 종중에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일기장은 기회가 되면 책으로 출간하겠다고 합니다. 1960년대 농촌과 목장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는군요. 김슬옹님이 허락하여 이 글을 옮겼습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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