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은 목화씨를 몰래 가져오지 않았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11세 때인 1341년에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 가서 살았다. 그곳에서 10여 년 동안 지냈는데 총명하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원 황실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1349년에 평생의 연인인 노국공주와 결혼했다.

1351년 12월에 원나라 황제는 고려의 충정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렸고, 충정왕의 삼촌인 그가 귀국하여 국왕이 되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몽고식 변발과 복제를 폐지했고, 1356년에 왕권 이상의 권세를 누리던 기철과 그 일당을 숙청했다.

친정 오빠(기철)가 죽자 원나라의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할 기회를 틈틈이 엿보다가 1363년 5월에 덕흥군을 왕으로 앉혔다. 그해 12월에 덕흥군과 함께 고려를 침공한 원나라 군대는 이듬해 1월에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패해 도망간다.

기황후가 공민왕의 폐위를 결정했을 때 공민왕은 기황후를 달래기 위해 사신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사신단에 서장관(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으로 합류한 사람이 바로 문익점이다.

문익점(1329-1400) 

기황후는 고려 사신단이 원나라에 도착하자 그들을 포섭하여 공민왕을 배신하고 덕흥군을 따르도록 하였다. 일부 사신들은 끝까지 절개를 지켰지만 사신들 대다수는 공민왕을 배반했다. 그래서 문익점을 비롯한 고려 사신들은 대부분 기황후의 명대로 덕흥군과 원나라 군사들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갔다. 그런데 평안북도 정주에서 고려와 원나라 군대가 맞선 결과, 최영과 이성계의 연합군이 승리하고 덕흥군은 패퇴한다.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선택했던 사신단은 역적으로 몰려서 귀국하지 못하고 원나라에 머물다가 고려를 떠나온 지 1년 6개월 만에 고려로 돌아갔다. 이때 문익점이 고려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 바로 목화씨이다.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는 수출금지 품목이 아니었고, 강남뿐만 아니라 강북에서도 목화를 생산하고 있었다. 따라서 문익점이 기황후에게 협조하지 않아 강남으로 귀양 갔다가 귀국길에 목화씨를 붓두껍에 몰래 넣어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은 파직이 된다. 그는 씨앗을 들고 고향에 가서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3년간 온갖 정성을 쏟아 목화 재배에 성공한다. 그리고 목화를 널리 퍼뜨린 공을 인정받아 1375년 관직에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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