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 하늘 푸른 들을 울어 예는 파랑새 되리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늴리리.

 

한하운은 1919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부터 양복을 입고 자라났는데, 이는 매우 부유한 집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26년에 함흥 제일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한 한하운은 내내 우등생이었고 음악과 미술에 뛰어났다.

한하운은 1931년 봄에 몸이 무거워지고 얼굴이 붓기 시작하였다. 의사가 나병인 줄 모르고 온천 요양을 하면 낫는다고 하여 한하운은 여름방학 때 금강산에 가서 온천욕을 하였다. 증세가 나아져 집으로 돌아온 한하운은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였다. 이듬해 함경남도에서 수험생 열아홉 명이 전라북도 이리 농림학교에 응시하였는데 유일한 합격생이 한하운이었다.

한하운은 1학년 때부터 육상경기부에 가입하여 장거리 선수로 활약하다가 공부를 소홀히 한다는 부모의 꾸지람 때문에 3학년 때 운동을 단념하였다. 하지만 상급학교 수험공부 대신 원고지에 시나 소설을 습작하던 그해 겨울에 한하운은 누이동생의 친구 R과 사귀게 된다. 한하운은 자서전에서 R을 하얀 목련같이 맑고 소소한 여학생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리 농림학교 5학년 때인 1936년 봄, 한하운의 팔다리에 심한 신경통이 생겨 밤잠을 잘 수가 없었고 몸 전체에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갔다. 그를 진찰한 경성대부속병원(지금의 서울대부속병원) 의사는 나병이니 소록도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였다. 한하운은 의사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정말 나병이라면 R을 어떡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며칠 뒤에 다시 담당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는데 오른쪽 손목 부위를 칼로 찔러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한하운은 나병 진단을 받고 금강산으로 요양하러 떠났다. 금강산에서 온천을 다니며 나병에 효과가 있다는 약을 사서 한 달 남짓 주사를 놓자 궤양이 사라졌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계속 금강산에 머물러 있던 한하운에게 R이 찾아왔다. 한하운은 R에게 나병에 걸렸다고 고백하였다. 한하운이 R의 행복을 위해 깨끗이 이별해야 한다고 말하자 R은 자기가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또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참되고 행복한 삶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한하운은 R에게 함흥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였지만 R은 여름방학 동안 병시중을 하겠다며 돌아가지 않았다.

한 달 뒤 개학을 앞두고 R과 헤어진 한하운은 다음 해에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서 도쿄의 성계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한하운이 고등학교 2학년 때 R은 Y여고보(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한하운을 찾아왔다. 그녀는 도쿄 T여전(여자전문대학) 가사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도쿄에서 R과 일 년쯤 있었을 때 한하운의 몸에 또 이상이 생겼다. 완치된 줄 알았던 나병이 재발하자 한하운은 공포감과 절망감에 허둥거리며 귀국했다. 그는 도쿄를 떠나면서 R에게 병이 재발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한하운은 고향에 들렀다가 또다시 도피하듯이 금강산으로 갔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하운은 죽음같이 사무쳐오는 고독과 슬픔 속에서 R을 그리워한다. 그가 금강산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가량 지난 1939년 어느 여름날 R이 한하운을 찾아왔다. R이 떠난 뒤 한하운은 그녀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한하운은 1939년 10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열 달 동안 중국어 공부를 하고 베이징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다. 1941년에 베이징대학 농학원 축목과에 입학한 한하운은 협화의과대학에 다니는 동포 여성 S를 만나게 된다. S는 한하운에게 고향으로 가지 말고 베이징에서 함께 살자고 요청한다. 그 무렵 한하운은 나병이 재발하여 요동의 온천으로 가서 치료하다가 여순에서 6개월간 하숙 생활을 하였다.

병세가 매우 좋아져 베이징으로 돌아온 한하운은 S를 찾아갔다. 한하운은 1943년에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S의 부탁대로 베이징에 계속 머물기 위하여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다. S의 사랑을 받아들인 한하운은 그녀에게 자신이 나병 환자라고 고백하였다. 처음엔 헤어질 구실을 대는 거라며 믿지 않던 S는 끝내 “참 보람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다.”라고 말하면서 소리를 높여 슬피 울었다. S는 사랑을 후회하지도 않고 또 원망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다음 날 S는 한하운을 찾아왔다. 중국 돈 300원과 자기의 금반지를 내밀면서 돈은 병 치료에 쓰고 금반지는 기념으로 언제까지나 간직하여 달라고 했다. S는 자기가 보고 싶을 때에는 반지를 보며 눈물을 흘려주고 영원히 행복하기를 빈다는 말을 남겨 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며칠 후 S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고광석 저, 《시인의 가슴을 물들인 만남》에서

 

 

《시인의 가슴을 물들인 만남》 서평 (출전 : 학교도서관저널 2013년 6월호)

시어에 마음을 빼앗겨 본 사람은 그 표현을 쓴 시인이 궁금해지고, 그 시인을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만큼 시를 통해 시인을 만나서 깊이 사랑할 수 있기는 어려울 듯싶다.
현대시와 고전시를 넘나들면서 아름다운 시어가 탄생하기까지 시인의 영화 같은 삶을 재현해 낸 노력에, 그 마음에 숙연해진다.
각 시대의 아픔과 개인적 고뇌와 세상에 대한 열정이 흘러 넘쳐 쓰인 시가, 달라진 세상에서도 울림이 있는 것은 시인의 삶에 대한 공감 때문이리라.
그 공감을 또 다른 애정과 고민과 사랑으로 표현한 글에 마음이 먹먹해 시를 읽을 때처럼 한동안 허공을 응시해야 했다.
시와 시인들을 사랑하는 저자의 애정 어린 시각이 이야기가 있는 시로 재탄생되어 읽는 내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시어의 의미가 덜 와 닿아 시가 늘 멀뚱한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그 시어에 마음을 빼앗겼던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강애라 서울 대치중 국어교사(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회장)

* 이 책은
학교도서관저널 2013 올해의 책,
책따세(책으로따뜻한세상만드는교사들) 2013 겨울방학 추천도서,
2015 서귀포시민의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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