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린고비 열전 5

 1992년 11월, 나는 제대와(정식용어는 "소집해제"임) 함께 취미활동으로 등산을 하기로 했다.
 몇 번 산을 다녀보니 더덕이나 잔대같은 약초도 캘수가 있고, 곰취나 당귀같은 나물도 뜯을 수가 있어 좋았다. 거기에 높은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운동도 되고, 술 한잔은 덤이었다. 또 운발이 좋을 때는 함께 오르는 여성친구들도 사귈 수 있는 그야말로 일타삼피의 취미가 등산이었다.
방위를 받으면서는 군복에 군화를 신고 다녔는데, 민간인신분이 되고 나니 그런 촌스런 복장은 내 자신도 쪽이 팔렸다. 그래서 수풀에서 나오는 뱀도 한방에 짓밟아버릴만한 튼튼한 등산화를 한 컬레 사기로 맘먹었다.

 

 1993년 초, 부천대학 입구 산마루산장에 가서 등산과 배낭을 샀다.
 첫 눈에 보아도 투박한것이 튼튼해보였고, 산장지기 말로는 소가죽이라서 방수도 잘된다고 했다. 바닥 창도 요즘에 쓰이는 고무본드 접착이 아니라 실밥처럼 끈끈한 무엇으로 꿰어놓았다. 내가 보기에도 단단해 보였고, 메이커도 K2라서 드러내놓고 신을만했다.
 등산화를 사고 처음 오른 산은 원주 치악산이다. 보통 사람이 치악산을 구룡사에서 올라가면 비로봉까지 세네시간은 오른다. 당시에 나는 뛰어서 한시간 20분에 올라가기도 했다. 신발이 좋아서였는지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미친듯이 나는듯이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다.
 그렇게 K2등산화와 함께 십 수년을 걸었고 뱀도 꽤 여러 마리 밟아 잡았고, 나물이나 산약초도 많이 캤다. 한 해에 너댓 번씩 산을 다녀올 때마다 내 등산화는 앞축이 까지고 물에 젖고, 딱딱해지기 시작했고, 밑창도 닳기 시작했다. 역시 세월 앞에서는 나도 노화되어갔고 신발도 노화되어갔다.
 그 동안 아내의 등산화를 새로 살 때마다 나도 새로운 등산화를 사고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늘 참았다. 등산화 매장에 가서 최신의 신발을 신어보면 확실히 가볍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낡은 등산화를 버리는 것이 조강지처를 버리는것 같고 의리를 버리는것 같아 차마 바꾸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뒤꿈치 부분이 낡아 찢겨지면서 등산화를 신고 장거리 산행을 하면 뒤꿈치가 붓고 까지며 물집이 잡혔다. 이제 오래 신는 게 힘들어지면서 나의 등산횟수는 확실히 줄었다. 어느 산을 가려고 하면 등산화 신고 뒤꿈치가 까지는 기억에 산 자체를 가지 않거나 운동화를 신고 다녀오곤 했다.

 그러다 드디어 20년 기념으로 새로운 등산화를 구매했다.
 요즘은 나의 오래된 K2 등산화를 대신해서 칸투칸 중등산화나 트랙스타 경등산화를 자주 신는다.
 K2등산화는 일년에 한번 정도 원미산이나 가고 텃밭에 갈때 신는다. 뭣 모르는 사람이 보면 원미산가고 텃밭 다니면서 신발은 히말라야급 신는다고 흉볼지도 모르겠다.ㅎㅎ
 그래도 아직은 버리고 싶은 맘이 없고, 신발장에 고이 넣어놓기엔 미안한 마음이다.
 나중에 K2에서 25년된 등산화나 30년된 등산화를 최고 제품으로 바꿔주는 이벤트는 안 하려나?
 긴 인내심으로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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