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부천 이야기 ⑪

▲ 1980년대 부천로가 뚫리기전 매봉재의 산자락이 도당마을까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부천시 제공)

매봉재 언덕위에 위치한 도당마을

부천에 도당(陶唐)마을이 있었다. 현재의 도당동을 있게 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마을의 흔적조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도당공단이 조성되어 있다. 도당 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다. 한번 흩어진 사람들은 다시 모이지 않는다. 단지 도당마을에서 살던 추억만 되새기고 있거나 그 존재가 사라질 뿐이다.
부천로에서 김포공항 쪽으로 가다보면 도당사거리가 나온다. 도당사거리에서 왼쪽 산언덕에 도당마을이 있었다. 산이 어디 있고 언덕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 매봉재 아래 도당마을이 도당공단으로 조성되고 부천로가 뚫리면서 좌우로 공장들이 들어선 모습(부천시 제공)

산언덕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부천의 대부분의 마을이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해에서 밀려오는 바다 밀물이 들이칠 때 수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언덕위에 마을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도당마을, 약대마을, 시우물은 굴포천하고 접해 있었기에 사람들은 특히 수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금은 도당공단을 조성하면서 많이 깎아내려 언덕인지, 평지인지 거의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수도로가 야트막한 언덕길을 이루고 있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도당마을은 매봉재 서쪽 산자락이 뻗어내린 곳에 위치해 있었다. 1980년대 찍은 사진을 보면 도당마을이 산언덕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일제강점기 때 한강에서 영등포, 신월동을 거쳐 고리울, 멧마루를 통과한 뒤 도당, 약대를 거쳐 제물포까지 상수도 물을 끌어오면서 만들어진 수도길이 관통하는 자리이다. 현재는 수도로라고 한다. 이 수도로에 한강물을 끌어가던 토관이 묻혀 있었다.

도당마을의 어원 풀이

1789년도에 조사한 호구총수에는 부평부 상오정면 도당리(都堂里)로 되어 있다. 이때 상오정면에 속하는 오정리, 내촌, 도당리, 삼정리, 약대리에 186호의 집들이 지어져 있었고, 상오정면에는 총652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당리에는 약 37호의 집이 있고, 약 13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집들은 한군데에 모여 있지 않고 띄엄띄엄 있었을 것이다.
1911년도 당시 지리정보를 전해주는 조선지지자료에는 부평군 상오정면 도당리(陶唐里)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보다 더 늦은 1917년도에 편찬한 신구대조에도 도당리(陶唐里)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도당동(陶唐洞)하고 한자가 다른 도당(都堂)마을로 해석하면서 ‘마을에 해묵은 나무가 있었다. 도당마을 사람들은 시월 상달이면 이 나무에 음식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지금은 그 흔적이 없지만 도당(都堂) 당집이 있었다’라고 했다. 호구총수의 조사 결과와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도당마을엔 해묵은 나무의 흔적이 없고, 도당(都堂)의 흔적도 없다. 마을 사람들이 도당제를 지냈다는 기록 또한 없다. 마을 사람들이 전해주는 유래에서도 도당제에 대한 것은 없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러한 내용들이 전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도당이라는 땅이름에 기대어 도당제가 행해졌을 것이라고 지레짐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도당(陶唐) 마을은 조선지지자료, 신구대조 등에 기록되어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이지만 땅이름을 가장 꼼꼼하게 조사하고 정리한 것이어서 신빙성이 제일 높다. 호구총수가 마을 단위로 조사를 했다면 조선지지자료는 마을뿐만 아니라 산, 봉우리, 고개, 골짜기, 하천, 보, 평야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주막까지도 기록한 걸 보면 치밀하고 악랄하게 진행된 일제의 한반도 통치 기초자료로 쓰였음을 두말할 필요가 없다.
도당(陶唐)은 언덕이나 산, 둑, 성을 뜻한다. 매봉재 산을 중심으로 여러 산언덕이 있었다. 약대에서 도당마을로 들어오는 길엔 분둣재라는 고갯길이 있었다. 현재 부천태양공구상가로 불리는 곳이다. 이 분둣재 뒤에는 붕어마루가 있었다. 분둣재 서쪽 너머인 약대초등학교 근방에는 반갑재라는 고갯길이 있었다. 지금도 이곳은 고갯길이다.
그 다음으로 도당에서 멧마루(원종)로 갈 때 대추마루를 넘어야 했다. 이 대추마루는 도당사거리에서 도당소공원 사거리까지 가는 길에 있다. 수도로의 한 부분이다. 지금도 언덕길로 오르막이다. 길을 낼 때 대추마루를 아주 낮게 깎아내지는 못했다.

 

▲ 도당마을 언덕위에 있는 건물

 

 여러 개의 고개가 겹쳐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거칠고개가 멧마루(원종)까지 이어진다. 거칠고개는 한자로 황현(荒峴)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주 거친 고개’라는 뜻으로 읽히지만 어원은 여러 고개가 겹쳐 있다는 뜻이다. 수도길로 쭉 이어지면서 경인고속도로를 넘어가는데 이 길도 들쑥날쑥 언덕길이 이어지고 이 언덕 좌우에는 많은 집들이 지어져 있다.
여기에 도당마을에서 겉저리(춘의)로 가는 길에 장고개가 있었다. 도당에서 현재부천공구상가를 거쳐서 가는 고갯길이다. 지금은 부천로로 표기되어 있다. 이 부천로가 생기기 이 전에는 가늘고 긴 장고개 길을 걸어 겉저리로 왔다. 백만송이장미공원이 있는 개롱지에서 안골로 이어지는 고개를 절고개라고 했다.
이렇듯 많은 언덕, 고갯길이 있는 것은 도당마을 일대가 주로 산언덕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도당(陶唐)은 ‘질그릇 도(陶), 당나라 당(唐)’이 아니라 ‘언덕이나 산, 둑, 성(城)’을 가리킨다.
도(陶)의 어원은 ‘둠’이다. 둥그런 모양의 산이나 산언덕을 가리킨다. 부천의 은데미, 간데미에서 ‘데미’도 같은 뜻이다. 멀미(원미산)를 벌응절리에선 둔대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둔이 둠으로 그 뜻이 같다. 이 둠이 ‘덤, 돔’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으로는 ‘도’로 바뀐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미, 도매, 도마’로 바뀌기도 했다.
충청북도 진천에 도당산성(都唐山城)이 있는데 ‘도읍 도(都)’를 쓰고 있다. 우리말 돔이 도로 바뀌면서 ‘도(都), 도(陶), 도(道), 도(挑)’로 표기되었다.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냥 표기한 것이다.
당(唐)은 ‘담’이 그 어원이다. 백제가 스물두개의 담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 담이다. 백제어인 ‘다라, 드르’에서 온 말로 백제 읍성인 담로를 감싸고 있는 토성을 가리킨다. 토담이라고 한다. 집 울타리를 가리켜 담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서 온 것이다. 담도 둠에서 온 말이다. 그렇지만 둠에서 발전해서 토성 같은 성이 쌓여져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도당(陶唐)은 ‘산언덕, 성(城)’의 의미를 갖고 있기에 백제의 읍성을 둘러싼 성(城)처럼 ‘산언덕이 감싸고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없다.

▲ 2015년 개롱지 분수대에서 바라본 매봉재의 매봉

도당산은 없다. 거기에 매봉재가 있다.

도당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서 도당산이란다. 이 도당산은 지도에도 없고 실제도 없는 허구의 산이다. 그런데 부천시민들은 건강을 위해 도당산을 오르고, 이 도당산 이름을 따서 도당산 수목원, 도당산벚꽃동산, 도당산벚꽃축제, 도당산장미축제, 도당산둘레길 등으로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다.
반대로 부천 대장동에서 가까운 서울 오곡동에 도당산(陶唐山)이 있었다. 김포공항 활주로를 만들면서 이 도당산은 사라졌다. 이 오곡동도 조선시대에는 부평에 포함되었다. 거기에다 고리울(고강동)에 도당산(陶唐山)이 있었다. 이들 산도 도당(陶唐)으로 쓰고 있다. 야트막한 산언덕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조선지지자료에 우산방죽산, 개롱산, 매봉재산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니까 도당마을에서 비롯된 도당산은 기록에 아예 없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새롭게 그 이름을 얻더니 기존의 산이름을 밀어내고 주인이 되었다.

▲ 2010년도 매봉재 우산방죽골 벚꽃동산

우산방죽산은 도당벚꽃동산으로 유명한 골짜기가 우산방죽골이다. 이 골짜기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개롱산은 부천백만송이장미원이 있는 오른쪽 골짜기인 개롱지에서 따온 것이다.
매봉재산은 산꼭대기의 높이가 106.5인데,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 부른다. 매의 어원은 ‘뫼’이다. ‘미, 뫼, 메, 매’ 등이 산을 지칭한다. 매골, 매실, 뫼실, 매곡, 매동, 매산, 맷골, 묏골, 매재 등으로 쓰인다. 전부 산이라는 뜻이다. 봉은 봉우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매봉은 ‘산봉우리’라는 뜻이다. 재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그 하나는 고개를 가리킨다. 매봉을 관통하는 고개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고개는 아니다.
다른 하나는 ‘자’에서 온 말로 산이라는 뜻이다. 자섬은 산이 많은 섬을 가리키고, 자작골은 작은 산골, 장자골도 작은 산골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매봉재는 그냥 ‘산봉우리’라는 뜻이다. 뒤에 매봉재산이라고 붙인 것은 의미가 없다. 그냥 붕어마루를 붕어마루산, 상살미를 상살미산, 멀리를 멀미산이라고 하는 것과 똑 같다.

▲ 2012년도 우산방죽골 벚꽃동산에 나들이 나온 아이들

부천시의 상징새는 보라매이다. 매봉에서 매를 ‘송골매, 보라매, 황조롱이’ 같은 맹금류로 해석해서 생겨난 결과이다. 매봉재는 보라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음이 그 어원 해석으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도당산은 어디에도 없고, 매봉재로 불러야 맞다. 그런데 이미 부천시민들의 머리 속엔 도당산이 자리 잡아 버렸는데 어찌해야 하나? 이는 작동산이 없는데 작동산이라고 최근에 부르기 시작한 것과 같은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글ㆍ사진Ⅰ한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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