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사람들일수록 함께 살아야 해

보증금이 없던 나는 상경을 하고 첫 2년 동안은 한 몸을 누일만한 ‘방’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리고 비슷하게 살아가는 친구들이 모여 처음으로 ‘함께 살아보자’고 작당히 구한 곳이 바로 나의 여섯 번째 집, ‘세탁기’ 사건이 벌어진 집이었다. 대학교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괴안동 홈플러스 뒷동네(당시에는 딸기부동산 뒷동네라고 불렀다)였다.

당시 21살, 22살이었던 여자친구 4명이 각자 가지고 있던 돈, 부모님에게 빌린 돈을 모아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다세대 주택을 마련했다. 우리가 들어가기 전에 그 집에 살던 분들은 오랜 다세대 주택 생활을 청산하고 아파트를 당첨 받아 이사를 가게 된 분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탁기, 렌지, 책상 등 몇몇 쓸만한 가구를 주셨다.

우리는 책상과 옷가지들을 모아놓은 ‘생활방’과 잠자는 ‘쉬는방’으로 나누어 생활했다. 비슷한 관심사와 취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모여 살다보니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렇게 함께 살기 이전까지는 다들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살아왔는데, 함께 장보고 밥 먹고 산책하고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조잘대는 소소한 일상은 이전의 힘겨움과 외로움을 잊기에 충분했다. 물론 종종 구성원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나 불편함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졌던 식구회의에서 의견을 조정하기도 하며 나름 공동생활의 틀을 갖추어 나가며 살아갔다.

그렇게 함께 산 지 3개월 쯤 지났을 무렵, 한 친구가 오후에 혼자 집에 있을 때 위층에 살던 집주인이 찾아왔다. 전세입자가 세탁기가 고장 나서 돌려달라고 연락이 왔단다. 그리고 그 다음날 집주인이 세탁기를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뭔가 이상하여 전세입자에게 전화해보았더니, 그 분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셨다. 집주인이 잔머리를 굴려 우리 세탁기를 가져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집주인이 딱 잡아떼었다. 집주인 동생은 오히려 큰소리로 쏘아대기까지 했다. 우리는 순리로 해결하기는 어렵겠다 싶어 경찰서에 갔다. 경찰관은 이것은 엄연한 절도이니까 고소를 하고 싶으면 고소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합의를 하는 게 가장 좋다며 자신들이 전화를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경찰의 전화에 겁을 먹은 집주인은 곧바로 세탁기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상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에서 나왔다. 사실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한 대 새로 사면 될 일을, 무슨 오래된 세탁기 한 대로 경찰서까지 가냐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당시 세탁기는 그저 빨래를 빠는 기계를 넘어서, 어린 여성들이 살아가는 월세집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집에 이사해서 그 사건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혼자 살다가 그런 일을 당했더라면, 그렇게 용감하게 맞서고 세탁기를 돌려받을 수 있었을까? 함께 살았으니 가능했던 일이지. 힘없는 사람들일수록 함께 살아야 해”하고 말이다. (글: 김혜민 - 부천 지역 청년 주거 협동조합을 꿈꾸는 단체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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