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이 트인다』서평

‘집을 고치면서 저와 함께 작업했던 친구들은 무엇을 이 공간에 채워 넣을 것이냐에 대한 것보다 살아가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습니다.’(『숨통이 트인다』 164쪽) 녹색당 비례대표후보이자 오늘공작소 대표인 신지예 청년이 이 책에서 하는 말이다. 오늘공작소는 필시 범용기술을 활용하자는 마을 공동체이고 풀뿌리결사체일 것이다.

너나없이 무엇을 또 소비할까라는 소비주의에 붙잡혀 있는 세태임에도, 더 할 수 없이 평범한 신지예와 그 친구들은 공동주거공간을 한 뼘만큼이라도 더 크게 쓰고자 채워 넣기 보다는 비워내고 나누는 데에 더 집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을 챙기지 않을 때 우리들의 삶이 위협 받을 것임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이들에게서 미친 시장화 포섭에 단호하게 저항하려는 ‘소박한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녹색 당신의 한 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숨통이 트인다』는 정치책이다. 이 책은 녹색당 비례대표후보들이 왜 정치판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하고 있고, 4월 총선에 내놓는 의제별 정책공약을 풀어 놓았다. 지금 우리는 무슨 말로 정치얘기를 나누면 좋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정치공동체로서의 우리는 누구나 괜찮지 않고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들의 정치 감수성은 오로지 나쁜 정치로부터 자극을 받고 있으니까다.

밥상이 불안하다

“이게 나라냐”라고 울부짖는 청년은 서글프게도 나쁜 정치의 창으로 나라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지만 결론은 분통터짐이다. 불안한 밥상이 정치의 소산이듯이 나쁜 나라 역시 정치의 결과일터이니 좋은 정치를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지속가능한 정치의 싹은 망가졌고, 어디서도 다시 찾아볼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속도보다는 방향을 바로하기 원하는 녹색당이, 소외된 비주류·소수·약자들의 희망과 또 배제되어 온 주변 의제들까지 꼼꼼히 챙겨서 이 책 하나로 꾸렸다. 만 13세가 되면 정당에 가입하고 정당 활동을 보장받게 하자는 의제는 신선하기 까지 하다. 정치가 나이든 사람들만의 전유물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제1당은 새누리당도 더민주당도 아니고 무관심당이다.(10쪽) 투표하지 않는 유권자, 정치에 관심 없는 국민이 절반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쁜 공기와 물이 정치무관심의 결과라면, 나쁜 일자리가 저질 고용을 주도하는 것도 거기에 연유하기는 마찬가지다. 말하지 않는 무관심이야말로 사영화된 정치를 재생산해내고 확대하는 강력한 동력일텐데, 기득권 정당들은 이러한 정치무관심을 오히려 즐기고 있다.

1번 후보 황윤은 트인 숨 소리로 외칩니다. “저에게는 세월호, 밀양, 메르스, 후쿠시마, 뼈만 남은 북극곰이 모두 다 하나로 보입니다.”라고. 달라 보이는 이들이 실은 통제 받지 않는 시장의 식민지가 된 지 오래인 이 사회가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모양만 다른 동일한 재앙이라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종간 장벽’이라는 엄한 자연법칙을 허물고 나타나는 ‘인수공통 전염병’역시 인간 탐욕의 결과임을 경고한다.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 그는 어린 아들의 눈으로 비인간 동물들의 슬픈 삶을 들여다보았었다. 그리고는 ‘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25쪽)라고 출마의 이유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한 나라의 위대성과 도덕성은 동물들을 다루는 태도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일리 있는 생각에 동의를 구하며, 비인간 동물에게 친절한 인간이 되자고 울먹인다.

왜 우리네 삶은 숨통이 완전 막힐 만큼 팍팍해졌을까. 진짜 의제 자리를 가짜의제로 채워 넣는 기득권 정치의 관행이 한 몫을 했음에 틀림없으리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없는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줄반장 한 번 해본 적 없었던 전교조 출신 이계삼은 비례대표후보로 나섰다. 지난 4년간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을 하면서 절감한 것도 바로 정치의 부재다. 그리고 심각한 위기에 처한, 내용 없는 대표성 정치의 맨 얼굴과 수없이 맞닥뜨리면서 대안민주주의를 고민해 왔다.

정당이 국가화하면서 그 존재감은 아예 망가졌고, 정치는 관료제에 종속되면서 껍데기만 남았다. 이계삼은 약탈적 자본주의경제가 망가뜨린 자연과 정치를 복원할 힘이 바로 여성성에 있음을 믿는다. 그는 녹색당의 대표적 차별성도 생명을 잉태할 줄 아는 여성성으로 규정한다.

여성성의 힘으로

이번 총선에서 정당득표율 3%를 달성하는 것은 그들과 녹색당의 공동목표다. 양 대당이 독식하는 기득권 정당구조와 경제가 오히려 정치를 통제하는 왜곡된 판을 뒤집기 위해 녹색당은 단 한 석이라도 반드시 원내 교두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녹색당의 3% 득표는, 국가와 정당이 자주성을 포기한 지 오래인 한국정치에게도 의미 있는 사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마저도 의심받기 일쑤인 대의제의 반민주성을 알기 때문에, 녹색당은 ‘추첨제’를 통해 당내 제비뽑기민주주의를 확장해가는 중이다. 또 비례대표의원 한 자리가 오면 한 후보가 4년이 아니라, 두 후보가 2년씩 국회의원을 나누어 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더디더라도 과정을 중시하는 숙의를 통해서 ‘정치를 유예한 경제성장’이 아닌 ‘탈 성장의 정치전환’을 선택하기로 했다.(93쪽) 이로써 탈 성장 경제가 인간의 행복을 결코 저해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유일한 정당이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낙동강살리기운동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수질개선특별법이 성안되는 성과로 이어지게 한 1세대 환경운동가 구자상 비례후보의 출마변이 특별하다. 그가 환경활동가로 살아 온 지가 30년을 넘어간다. 형극의 땅으로 변한 온산공단을 찾아 간 때가 1985년이었다.

농부가 된 것도, 대안에너지 활동가가 된 것도, 반핵활동가가 된 것도 그 연장선 위에서라 가능했다. 2015년 드디어 고리1호기가 폐쇄될 때 그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 한 의제도 현재진행형이지 않은 것이 없다. 자본 앞에서 비틀리고, 유착관료제 앞에서 기형이 되어, 어느 것 하나 보장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제도화까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의 길에 나서기로 했다.

노동이 해방되기 위해 기본소득을

“막연히 추구하던 인권이란 것이 기본소득이라는 경제적 시민권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102쪽) 처음 들어본 듯 한 이 말을 청년 김주온 후보는 자신의 다른 말로 이렇게 풀어줍니다. “어떤 사회가 되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사회면 좋겠다고 답하겠습니다.”라고.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이 해방되기 위해’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생활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회구성원이 공동체를 고민할 수 있기 위해서도 기본소득은 필수라고 한다.

그는 또 말합니다. 재난조차 모두에게 평등하지가 않다고.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이들은 가난해서 못 떠나는 이들과 약한 이들의 몫이니,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정치를 하자고 제안한다.(109쪽)

프란치스코 교황은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좋은 시민이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라고 바꾸어 말해도 맞는다.
청년후보 김주온은 ‘물대포로, 악법으로 국민을 손수 공격하거나 시혜적으로 베푼 쥐꼬리만한 자원을 놓고 없는 사람들끼리 다투게 만드는’정부를 응징하기 위해서도 시민이 정치화하기를 바란다.

시민이면 정치 관여해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사회, 유통기한이 다 된 삼각 김밥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우리들 자신의 팍팍함, 정치인 코스프레만 넘쳐나는 비정치의 현장 등 정치의 부존재가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정치지형에 긍정적 균열이 가해져야하지 않겠는가? 온 시민의 재정치화를 위해 이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오히려 녹색당 밖의 사람들 특히 소수자 입장에 서기를 꺼려하는 분들이 많이 접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녹색당의 생각은 얼마든지 사방팔방으로 퍼 날라져도 좋으니까. 정치 현장에 뿌려져서 우리의 숨을 트는데 도움이 된다면 『숨통이 트인다』는 그 출생의 사명을 다 하게 될 것이다.

서평인에게 이 책에 글 한 줄을 보태도록 허락한다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이름을 적고 싶다. 전우익 선생은 노신의 『광인일기』를 들어, 이 책의 77쪽에 이렇게 적었다. “그럼 민중이 진짜로 변혁의 주체가 되자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고 물을 때 노신은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 같군요. ‘민중이 피해자 의식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가망이 없다. 민중을 단순한 피해자로 쳐 버리면 민중을 언제까지나 역사의 객체로 삼는 것이며, 그래서는 그들이 결코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 의식은 사실은 무의식 속의 가해욕과 같은 것이고, 민중이 피해의식에만 사로잡혀서는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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