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이 마음의 불을 켜 길이 환하다
잎사귀 마다 달고 있던 등불이 겨울이 되어
몸뚱이로 침잠(沈潛)한다
그 등불을 따라 조릿대며 수크령이 커간다
이들도 조심히 등불을 켜지만
얼음조각이 등줄기를 쓰다듬을 땐
뿌리에다 등불을 단다

겨우내 땅밑은 온통 뿌리들이 내는 불빛으로 환하다
그 환한 불빛을 받으며
두더지는 자신의 생을 건 모험을 시작한다
봄이 되어 파헤치는 길이 산골짜기에 가득하다
두더지는 새로운 길을 내는 천재(天才)

수렴동계곡으로 가는 길은 그래서 조심스럽다
두더지가 낸 길이 무너질까봐
한발 한발 내 딛는 힘이 줄어든다
산까마귀가 날아가는 허공의 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수한 실금처럼 그어져 있다
그 길을 덮는 눈길이 새로 생긴다

길 위의 길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길탑이 된다

청향 염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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