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단궁(朝鮮檀弓)

      

▲ 목궁(팀메드아처리 제공)

        

부천 봉배산 청동기시대 움집들이 부산해졌다. 사내들이 사냥을 떠나기 위해 마을을 지키는 목책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내들의 등에는 돌화살촉을 단단히 맨 광대싸리 화살들이 화살통에 담겨 있었다. 몇날 며칠을 화살 만들기에 힘을 쏟았는지 몰랐다. 그 화살로 멧돼지의 목줄기를 꿰뚫는다면 마을 전체가 며칠은 포식할 수 있을 것이었다. 
사내들의 허리춤에는 돌도끼가 매어져 있고, 오른손에는 큼직한 활이 들려 있었다. 
“집 잘 지키고 있어. 요즘 멧돼지가 극성이니까...”
굵직한 목소리의 사내가 아내에게 당부하는 말들이 오갔다. 아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멧돼지가 돌진해오면 무조건 도망치셔요. 쓸데없이 앞장서지 마시고...몸 건강히 돌아오셔요.”
사내들이 여월의 은데미 산줄기를 탔다가 멀미인 원미산으로 접어들었다. 멀미엔 짐승들이 보이지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성주산에 들어섰다. 
성주산 든전물 골짜기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멧돼지 가족이다!”
선두에 선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미가 앞장서고 그 뒤를 어린 멧돼지들이 쫄쫄 따라가고 있었다. 이 멧돼지 가족은 튼튼한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며 도토리를 찾아 씹고, 풀뿌리도 거침없이 씹고 있었다. 
사내들이 조심스럽게 화살통에서 활을 꺼냈다. 목궁의 시위에 활을 쟀다. 여러 번 부러뜨린 뒤에 새로 만든 목궁이었다. 아주 단단한 박달나무를 깎고 또 깎아 만든 것이었다. 
이 박달나무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조선(朝鮮)을 세울 때 신 신단수(神檀樹)로 쓴 나무였다. 그래서 단군왕검도 ‘박달나무 단(檀)’을 썼다. 단군왕검이 환웅 하느님의 아들이었기에 하늘의 자손이라는 의미인 배달(倍達)이라고 했다. 
이 배달(倍達)은 백달(白達)에서 온 것이고, 백달은 현재의 백산하고 그 뜻이 같았다. 그러기에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었다. 이 신성한 나무를 깎아 만든 활이기에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하느님을 대하듯 소중하게 다뤘다. 그 활로 짐승을 잡아 환인, 환웅 하느님의 자손들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신성한 의식이기도 했다.   
 
박달나무는 참으로 단단해서 잘 깎아 말리면 작은 짐승쯤은 거뜬히 잡을 수 있는 몽둥이를 만들 수 있었다. 돌도끼 자루로 쓰고, 움집의 기둥으로도 쓰였다. 
이 땅의 단군왕검 후손들은 쟁기를 만들 때에 반드시 박달나무를 썼다. 돌밭이나 산비탈 밭을 갈 땅이 거칠면 쟁기가 부러지기 일쑤여서 단단한 박달나무가 제격이었다. 여인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던 빨래 방망이에도 쓰고, 국수 말 때 필수품이었던 홍두깨, 하루종일 벼를 빻고 빻아야 했던 방아공이에 박달나무가 쓰였다. 돌확이나 절구에 넣고 보리를 찧거나 붉은고추를 갈 때 쓰던 절구공이도 박달나무로 만들었다. 
 
사내들이 일제히 박달나무로 만든 활을 쏘았다. 활이 아주 길고 탄력이 있어서 화살은 강력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멧돼지 어미의 머리며 몸통에 그대로 박혔다. 하지만 멧돼지는 숨통이 끊어지기 않고 어린 새끼들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내들에게 돌진했다. 사내들이 당황해 뒷걸음을 치면서 허리에 맨 돌도끼를 빼어들고 멧돼지의 머리를 내리쳤다. 멧돼지가 꽤액 하며 그제서야 주저앉았다. 첫 사냥에 멧돼지를 잡은 것은 환웅 하느님이 내리신 은총이었다. 봉배산 청동기 마을 사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멧돼지 네 다리를 칡넝쿨로 단단하게 묶고 돌도끼로 찍은 나무를 걸어 어깨에 매고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멧돼지로 인해 오래 굶주린 봉배산 가족들이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었다. 몸들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청동기, 즉 고조선 시대에는 이 목궁만을 사용했다. 조선단궁(朝鮮檀弓)이었다. 우리민족이 최초로 사용하던 활이었다. 배달민족이 사용한 활이었다. 한민족이 사용하던 활이었다. 부천 봉배산 청동기 마을에서도 당연하게 조선단궁 활을 썼다. 
이후 이 조선단궁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박달나무만이 아닌 여러 나무들로 만들어졌다.
 
▲ 목궁(팀메드아처리 제공)
 
 
글Ⅰ한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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