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소리 울리며 중동신시가지 뚫고 달리던 김포선 열차

 

   

▲ 오정 마을 국방도로 옆에 놓여진 김포선

◆ 김포선은 현재 부천역인 소사역에서 출발

   부천에 철도 노선이 3개가 있었다. 지금도 운행되고 있는 경인전철이 그 하나이고, 소사역에서 김포공항까지 연결된 김포선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오류역에서 옥련마을에 있던 경기화학까지 연결된 경기화학선이다. 
   김포선의 출발지는 열차가 개통된 1951년 당시 소사역인 부천역 북부에서 서울 쪽으로 쭉 들어간 부분에서 시작한다. 경인선이 처음 생겼을 때 소사역의 사진을 보면 조그만 역사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다. 1919년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하우고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더 서울쪽에 역사가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 경인선이 개통된 뒤 당시 소사역(집 한 채 덜렁 있었음)
▲ 1919년 일제 강점기 때 제작된 소사역 근방의 지도(현재 부천역 보다는 서울쪽으로 상당히 멀리 나가 있음)
   이 소사역은 승객들을 실어 나르는 곳이어서 항공유 같은 화물을 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김포선 분깃점이 생긴 것이다. 인천항에서 싣고 온 항공유가 담긴 드럼통을 이곳에서 김포선 열차는 소사역 앞 쪽에 놓여 진 철로를 타고 소사역을 다시 건넜다. 현재의 중동역으로 죽 연결된 철로를 따라 운행을 했다. 
   현재의 부천역은 당시에 성주산 자락이 낮게 깔린 곳이었다. 성주산 든전물에서 내려오는 개천은 땡땡이 골목으로 이어졌다. 땡땡이 골목에서 중앙로였다가 현재는 부천로인 곳으로 흘러 마침내 큰내로 연결되는 지천이었다. 이 부천로를 메워 일직선으로 도로를 낸 뒤 그 끝부분에 부천역을 세운 것이다.   
   김포선 화물열차는 땡땡이 골목에서 잠시 멈췄다가 산우물 쪽으로 기어갔다. 지금은 하나만 남은 땡땡이 골목도 당시에는 세 개였다. 아마도 시내 구간이라 거북이처럼 천천히 갔을 것이다. 지금은 경인전철 양쪽으로 주택들이 밀집해 있어 방음벽을 높게 쌓아 올려놓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방음벽이 없고 허허벌판처럼 자연스럽게 노출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무시로 철도를 건너다가 열차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땡땡이 골목은 깊은구지에서 진말을 거쳐 벌말, 겉저리로 가는 길이라 사람들이 많이 움직였다. 굳이 땡땡이골목이 아니더라도 철도 중간을 재빠르게 넘어다니는 사람들로 인해 사고가 잦아 죽기도 많이 죽었다.  
   빨리 빨리 길을 가거나 빨리 빨리 일을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사고 같은 것이었다. 김포선에서 사고가 많이 난 것이 아니라 원래의 경인선에서 사고가 많이 난 것이다. 경인선은 속도를 바로 줄일 수가 없어 그리 된 것이었다. 방음벽이 세워지고 땡땡이골목에 지하도가 설치되면서 열차사고는 거의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땡땡이 골목을 조금 못 미쳐 진말 사람들이 즐겨마신 막걸리 양조장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곳은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아 항상 질척거렸다.   
   김포선은 주로 항공유나 건설자재들을 실어 날랐다. 1979년도 일 년 치의 김포선의 수송실적을 보면 승객 보다는 화물을 수송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김포선이 오로지 화물만을 실어 나른 것은 아니다. 부천에서 김포공항 방면으로 가는 승객들이 띄엄띄엄 있어 이들을 태워주었다. 그러기에 약대마을에 간이역인 약대역이 생겼다. 이곳에서 화물을 싣는 것이 아니라 승객을 싣기 위해 잠시 정차하는 역이었다. 김포공항에서 부천역 방향으로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태워주웠다. 물론 부천역에서 김포공항까지 도로가 있고, 이곳에서 버스를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포선을 타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다. 
   1979년도 김포선에선 석유류 12만 7,098T/M, 건설장비 5,336T/M, 기타 17만 9,528.8T/M을 실어 날랐다. 이로 미루어 김포공항이 비행장이어서 석유류 같은 유류운송이 수송실적의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 소사역이 폐기된 뒤 김포선이 새로 출발한 부천역(현재 모습)
   ◆ 중동 벌판을 가로 지르고...
   김포선은 경인선 선로 옆에 붙어 현재의 중동역 방향으로 쭉 내려왔다. 그런 다음 산우물 마을 앞에서 오른쪽으로 휙 꺾어져 돌았다. 당시에 산우물엔 몇 채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산우물 아래엔 큰 웅덩이가 있었다. 
▲ 김포선이 중동벌판으로 꺾여졌던 곳
   현재 심중로에 있는 예일주택 부근에서 갈라졌다. 김포선은 심중로 를 따라 전진하고 산우물사거리 건넜다. 오른쪽으로 우편집중국으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복숭아밭이 있었다. 주로 산언덕엔 복숭아를 심었고 평평한 곳엔 포도를 심었다. 왼쪽으로 부천시민회관 일대는 논뿐이었다. 
▲ 부천시민회관 근처 김포선이 지나간 도로
   부천시민회관, 부천시민운동장 옆으로 직진했다. 왼쪽에 부천중학교를 바라보고 부천중사거리를 건넜다. 지금은 철로길 양켠에 단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예전에는 이들 건물들은 아예 없었다. 1980년에 열차가 멈추면서 철도를 걷어내고 도로를 깐 다음 그 옆으로 건물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이곳 건물들은 단층이다. 아직도 이 단층 건물이 남아 있어 80년대 개발의 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부천중사거리에서 장말로 길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상공회의소 못 미쳐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먹적골 어린이공원이 나오는데, 이곳이 먹적골 마을이었다. 1966년도 지도를 보면 제법 새카맣게 점들이 찍혀 있는데, 이 점들이 집이었다. 그러니까 먹적골 마을은 제법 많은 집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포선은 이 먹적골 마을 서쪽을 휘돌아가는 형태였다. 먹적골은 성주산 자락이 길게 뻗어 내린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다음엔 오른쪽에 새싹공원, 왼쪽에 부천시립 책마루도서관을 지났다. 이 지역은 건물 한 채 없는 논이었다. 이곳의 도로가 활처럼 휘어져 있는 것은 철도를 따라 도로를 냈기 때문이다. 논 주위로 실개천이 휘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엔 동부간선수로가 들어와 있지 않았다. 
▲ 김포선이 지나간 부천시립책마루 도서관 앞
   이렇게 심중로를 따라 김포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계남고삼거리에서 툭 끊기고 만다. 이곳에서 그린타운한신 아파트 단지를 가로 질러 가고 무지개 마을을 지나고 부천중앙공원을 가로질러 포도마을 사거리 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이곳에는 동부간선수로가 연결되어 데부둑 옆에 철도를 놓기 편했다. 동부간선수로는 이곳에서 장말 서쪽을 휘돌아 구지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포선은 석천로에 들어서 석천사거리를 지났다. 지하철 7호선 부천시청역을 지나고 금강어린이 공원을 스쳐갔다. 이때의 중동 벌판은 말 그대로 논뿐이었다. 석천로를 따라 쭉 직진하다 보면 중원초교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으로 동부간선수로가 지나갔는데, 그 옆으로 김포선이 나란히 연결되었다. 
     
   ◆ 그 이름도 신기한 약대역(若大驛)!
   중원초등학교 지나자마자 길은 급격하게 좁아지는데, 옛 동부간선수로를 그대로 메워 생긴 도로여서 그런 것이다. 이 중원초 근방에서 서울 노량진에서 출발한 수도로가 연결되어 열차 차단장치가 설치된 건널목이 있었다. 수도로는 이곳에서 건널목을 건너자마자 동부간선수로의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를 약대교(若大橋)라고 했다. 이곳에서 약간 위쪽에 약대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약대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리
   1966년도 지도에 보면 수도길이 약대마을을 관통해서 통과하는데, 동부간선수로 다리 양쪽에 몇 채의 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들은 아마도 간이역이 생김으로해서 지어진 집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집들은 약대마을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그곳에 약대역(若大驛)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천로에 김포선도 덩달아 연결되었다. 쇠발이논으로 부르던 곳인 부천체육관을 지나면 부천초교 사거리가 나온다. 1967년도 지도를 보면 동부간선수로 옆으로 김포선이 연결되어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약대주공아파트 단지는 약대아이파크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을 했다. 이곳에서 약대, 시우물 사람들을 태우고 김포공항으로 가거나 부천역으로 갔을 것이다.
   김포선 열차는 왼쪽에 부천테크노파크 4단지를 끼고 달린다. 예전에는 동부간선수로 둑 너머는 다 논이었다. 오른쪽에는 삼정2리인 마을이 있었다. 이때의 집들은 그리 많지 않고 약대 할미동산에서 이어진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삼정종합복지관을 지나고 소각장 사거리를 지났다. 이때 오른쪽엔 상살미가 자리를 잡고 있어 제법 높은 산등성이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약대의 할미동산이 이어진 산줄기였다. 지금은 삼정공단을 만들면서 상살미는 이름만 남기고 납작해져 저세상으로 갔다.       
   한때 부천시의 쓰레기를 태우던 부천시폐기물소각시설관리를 지나면 두갈래 길이 나온다. 한길은 석천로이고, 다른 길은 석천로 398번길이다. 여기에서 김포선이 한 번의 변경을 거쳤다. 원래는 석천로로 곧바로 직진해 삼정교삼거리에서 오정로로 급하게 꺾어졌다. 여기까지 동부간선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경인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동부간선수로 위엔 다리를 놓아 통과했다. 오정로를 타고 가다가 산업길사거리를 지나고 오정로로 계속 직진했다. 김포공항에서 부평까지 연결된 국방도로이기도 했다. 이것이 김포선의 원래 모습이었다. 
▲ 처음 김포선이 지났던 시우물 동부간선수로 옆(경인고속도로 통과 굴다리)
 
   ◆ 경인고속도로 여파로 휙 꺾어진 김포선 
   1968년도 경인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석천로 398번길로 휙 고개를 틀었다. 사실 이 길은 삼정공단을 옆에 끼고 달리는데 어쩌면 김포선의 원형이 어느 정도 남겨진 길이다. 길이 휘어졌다는 것이 그걸 증명해 준다. 급하게 철로를 걷어내고 도로를 깔았기 때문이다. 
   타원형 곡선으로 완만하게 휘어진 길을 계속 직진하면 부천 IC 초입에 이르게 된다. 이 부천나들목이 압구지인데, 이곳 한국화장품 삼거리를 건너면 조그만 소로길이 나온다. 신흥로 446번길이다. 내동공단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사람들은 그 길이 철도길이었음을 모른다. 그저 ‘왜 이렇게 길이 좁지’라고 고개만 저을 뿐이다. 
▲ 김포선 노선이 바뀐 압구지 근처의 도로
   그 의문을 품고 계속 가다보면 경인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굴다리가 나온다. 오정로 188번길이다. 이제 내동공단과 연결된 오정공단을 가로 질러간다. 왼쪽에 미강건철이 있고, 오른쪽에 한국특수금속 공장이 있다. 길이 좁은 것은 김포선 선로를 걷어내고 길로 깔았기 때문이다.
▲ 김포선이 오정 마을로 들어가던 굴다리
   오정로로 접어든다. 우편집중국 삼거리를 지나고 영안모자, OBS 경인 TV를 지난다. 봉오대로 사거리를 지난다. 이곳은 오정마을이 있던 곳이다. 1966년도 지도에도 아주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정마루에 미군들을 위한 유류탱크가 세워져 있었고, 이 유류는 오정마을에 주둔해 있던 미군들이 사용했다. 오정마루하고 멧마루 연결하던 길이 있다. 원래는 소로길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국방도로로 확장하면서 이곳에 페인트로 검게 칠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꺼먹다리가 놓여졌다. 육교인 셈이다. 
▲ 오정 마을 국방도로 옆에 놓여진 김포선
   오정마을 북쪽 외곽으로 베르내가 흘렀는데 이 개천을 지나기 위해 다리가 놓여졌다. 베르내가 이곳에선 가장 큰 하천이라 큰다리가 놓여졌다. 국방도로가 죽 이어져 있다. 한참 가다보면 동부간선수로에서 뻗어나온 수로가 연결된 곳에도 다리가 놓여졌다. 현재는 하오정교라고 한다. 현재 이곳 다리들은 철로위를 덮은 다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 김포선이 통과했던 하오정교
   대장마을로 들어가는 곳에는 고리울내가 흐르고 있어 이곳에도 다리가 놓여졌다. 현재 이곳 다리도 철로 위를 그대로 덮어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하오쇠교라고 부른다. 
   김포선은 오쇠리로 가지 않고 아시아나항공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돌았다. 오쇠리 꽃다리를 지나고 옛오쇠리 지역으로 들어갔다. 가까운 곳에 오곡리가 있었다. 김포고항 남쪽에 위치했다. 이곳이 김포역이었다. 김포역에 항공유나 건설자재, 건설장비를 내리면 그날 임무는 끝이 났다. 그러니까 부천역, 약대역, 김포역 세 역을 경유하는 김포선이었다. 
▲ 약대, 시우물을 거친 김포선 노선도
 
   ◆ 김포역에 도착해 김포공항 화물 부려 
   이 김포선 총연장 9.2㎞에 달했다. 북한과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김포비행장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 특히 유류의 운송을 위하여 건설했다. 이 김포선은 당시 유엔군이 총공사비 8억 7900만원을 들여 시공하였다. 김포선은 순전히 미군부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철로였다. 
   그 뒤 세월이 흘러 김포공항의 유류수송체계가 바뀌고 국제공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화물운송의 상당부분을 육상으로 운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포선은 1980년 8월 10일 폐쇄되었다. 사람을 태우는 여객영업은 1960년대까지만 했다. 이후에는 사람들을 실어나르지 않고 오로지 화물만 실어날랐다. 
   그러니까 약대역(若大驛)도 1960년대 이후에는 쓸모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포선이 우리나라 최초로 공항과 연결된 철도였다는 점이다. 이후 우암선, 울산선, 김포선, 영동선, 태백선, 충북선 등 산업선이 건설되었다. 
 
   ◆ 기관사 몰래 화물열차에 올라타기도 해
   목적골, 장말, 약대, 시우물에 살던 토박이 분들은 어린시절에 느릿느릿 기어가는 화물열차의 꽁무니에 올라타고 가는 재미를 톡톡히 누렸다. 화물열차가 가는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달려들어 안전을 고사하고 허겁지겁 올라타기 바빴다. 기관사 몰래 열차를 타보는 그 즐거움. 특히 삼정공단으로 꺾어지는 부분에선 더 느리게 달려 열차에 올라타기가 훨씬 쉬웠다. 그래서 신나게 열차를 타고 가다 오정마을 부근에 내려 터덜터덜 걸어오거나 김포공항에서 오는 열차에 올라타기도 했다. 
   부천 들녘을 지나가며 기적소리를 울리는 열차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더구나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늘어선 중동신시가지 가운데를 지나갔다니...김포선 열차 선로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시 빌딩 사이로 아늑한 추억을 싣고 달려가는 관광열차로 일대 변신을 했을 텐데...
한나절 정도 시간을 내어 이 김포선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자신의 눈앞으로 화물열차가 엉금엉금 기어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걸어보자.   
▲ 김포선이 표기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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