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기고 찢겨져 깃대에 매달린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 난초 한잎을 심는다

   
 
   여전히 눈에는 핏발이 서 있다. 붉게 타오르는 열정이 아직 스러지지 않은 탓이다. 자꾸 핏발만 세운다고 이 땅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봄바람에 빙하(氷河)가 녹아 지구의 수위가 높아지듯이 마음속에 갈무리져 꽁꽁 얼어버린 분노 같은 것을 녹여내야 한다. 
   단전호흡부터 시작해서 난초그리기에 도전해야 할까 부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자갈이 구른다. 자갈과 자갈이 서로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구석기시대 벌거벗은 사내가 만들어내는 주먹도끼처럼 날카롭다. 이 주먹도끼를 들어 누군가를 향해 달려들고만 싶어지는 날들이 많아진다. 
   찢기고 찢겨져 깃대에 매달린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 난초 한잎을 심는다. 여름의 폭풍 속에서도 굳건하게 견뎌낸 뒤 은은한 향기로 피워내는 그 난초가 그립다. 
   그러나 산천엔 난초가 없다. 바위틈에서 간신히 뿌리내린 뒤 흙 한줌으로 버팅기며 자라나는 그런 난초가 없다. 다들 화분 속에 들어가 버렸다. 문인화 화폭 속에서만 벼랑 끝 난초가 산다. 그것도 모질고 모질기게 그려져야 명품 소리를 듣는다.  

   붓놀림 시작점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역입(亦入)이다. 한 발짝 뒤로 후퇴했다가 앞으로 전진하는 술법이다. 술법이라고 했지만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 기본을 읽히느라 땀깨나 쏟고 있다. 화선지가 새카매지도록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전진하는 노릇을 반복한다. 앞으로 전진은 너무 빨라 속도를 가늠할 수 없다. 눈도 껌벅이지 않고 먹이를 노리는 사마귀처럼 잠시 정지가 필요하다. 그런 다음 천천히 느리게 가면서도 산천구경을 다하는 그런 문인화 여행이 필요하다. 
   붓끝을 곧게 세우는 작업이란다. 붓끝이 무너지면 문인화고 뭐고 뭉툭함이 남겨진다. 뭉툭함도 개성일 수 있지만 기본을 배우는 입장에선 그건 아니다. 
   뿌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역입이다. 뿌리 없는 난초가 없듯이 뿌리 없는 인생도 없다. 삶의 뿌리가 흔들리고, 삶의 뿌리가 썩어내리면 그 인생은 종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뿌리에 닿는 기운이 느껴지는 그런 역입이 필요하다. 뿌리가 싱싱해야 오래 산다. 
   세련된 것들만 찾는 현실에선 붓끝 하나 세우는 것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붓끝은 살짝 눌려졌다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 붓끝이 눌려진 채 그래도 있으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 
붓    잡은 김에 역입에 이어 첫선인 기수선(起手線)을 그린다. 첫 시간에도 배웠지만 더는 연습할 시간을 내지 못해 간신히 두 번째 시간에 맞춰 선을 그린다. 첫 시간에도 그랬지만 두 번째 시간에도 잔뜩 힘이 들어간다. 힘을 빼야지 하면서도 어깨가 위로 솟구친다. 부자연스럽다. 몸이 붓따라 휘돌아간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몸짓이 숙성되지가 않아 쌩탱이가 된 것이다. 고춧가루로 잔뜩 버무려진 김치의 첫맛이랄까. 그 맛이 상큼해야 하는데...
   역입의 세계에 푹 빠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틈틈이 시간을 내서 연습을 해야 겨우 역입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것일 텐데...기사 쓰랴, 취재하랴, 시(詩) 쓰랴...하루해가 번개처럼 빨리간다. 빨리 가는 만큼 소득(所得)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그마저도 서랍 속 깊숙한데 숨어 잘 나오지 않는다. 
   봄바람이 부는 날,  우리네 산천 곳곳에 난이 심어져 어느 곳이든지 향기로 진동했으면 좋겠다. 촛대바위, 거북바위, 용바위, 처녀바위, 색시바위, 총각바위, 두꺼비바위 등에도 난향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들의 발뒤꿈치에도 난향이 스며들고, 목덜미에선 향수 대신 난향이 물씬 풍겨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뒤로 물러섰다가 도움닫기로 뛰어올라 빌딩 하나쯤은 거뜬히 넘어갈 수 있을 때까지 향기를 뿌리는 역입은 계속 될 것이다. 향기만 먹고 사는 건달바여, 역입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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