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테기를 찾자!

    

 

   문인화의 세계(世界), 용안(龍眼)에 푹 빠지다

 

오년 째 꽃을 피워본 적이 없는 난화분이 있다. 어떻게 꽃을 피워내야 하는지도 몰라 그저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끔씩 물이나 주고 있다. 물만 먹고 사는 난초가 초라하다. 잎이야 늘 싱싱하지만 이상하게 내게 꽃은 보여주지 않는다. 난화분 처음 살 때 화려한 향기를 선보인 뒤로는 영 꿩 구어 먹은 소식이다. 나름대로 난꽃 피우는 방법을 연구해보고, 여기저기 자문도 구해보고, 인터넷이 알려준 대로 해보기는 했지만 며칠을 견뎌내지 못했다.

천성이 게으른 탓이다. 봄볕 아래 꼴마리를 까놓고 이나 잡는 시절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몇 마리가 몸속에다 둥지를 틀고 피 좀 빨아댄다고 큰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 덕분에 시원스레 허벅지며 가슴팍도 긁어보는 재미 한 번 맛 보았으면... 아마도 이 땅에서 이란 존재는 멸종이 되었나 부다. 아무리 이를 불러 모으는 굿을 해대도 우주에서 날아오지 않는 이상 그냥 풀 먹은 소망이고 만다.

 

게으름엔 난초 그리기가 해결책이다. 난초 그릴 때는 어쨌거나 붓 끝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난그림 첫 출발인 기준선에서 용의 눈을 만들어내는 용안선(龍眼線) 그리기에 열중했다. 용의 눈이라? 조선시대 임금의 얼굴인 용안(龍顔)이 떠올랐다. 신하들은 감히 용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지.

용안(龍安)이라는 동네도 있다. 뜻대로 해석하면 ‘용이 편안한 동네(?)’라는 것인가. 그 용은 농사에 도움을 주는 청룡(靑龍)이렷다. 흑룡이나 백룡은 아니고 황룡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난 그림에서 첫선과 두 번째 선을 교차해야 하는데, 그 교차점에 타원형이 생겨난다. 그게 용안이다. 둥그렇고 뭉툭하게 만들어지면 용안이 안 된다. 그건 용그림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용의 그림을 보면 용안은 날카롭게 쭈욱 찢어져 있다. 무서움이 오싹 들도록 그려져 있다. 물론 용눈을 크고 둥그렇게 그려 겁먹는 표정을 짓게 하는 유머러스한 그림도 있다. 용을 희화화해서 재미 좀 보자는 민중의 뜻이 약간 반영된 것이리라. 용이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니까.

▲ 한국데이터베이스진흥원 제공

난그림에서 용안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타원형이어야 한다. 사람의 관상에서도 타원형 용안(龍眼)은 귀한 상이다. 쌍꺼풀이 아니라 외꺼풀로 옆으로 죽 찢어져 있지만 가운데 찍힌 검은눈동자가 선명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흰자위는 더욱 선명하고 맑아야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렇게 맑고 선명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처럼 용안이면 ‘총명하고 크게 되며 학문이 높고 뭇사람 가운데 출중하여 임금처럼 대중을 지도할 수 있는 영웅호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싼 돈 주고 굳이 둥그렇게 쌍꺼풀 수술을 하면 우안(牛眼)이 되어 버린다. 소처럼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사람이 성실하게 보이고, 우직해 보이고, 늘 정직하며 선량해 보인다.

난그림에서 이 영웅호걸의 눈을 닮은 용안을 만들어내기가 여간 힘들다. 마음에 쓰윽 들어오는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용안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고작 네 번째만에 용안을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수업 시간 이외에도 수십번 연습을 했지만 일상적으로 몸에 밴 게으름 탓이 집중력이 떨어진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술독에 빠져 지내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이야 술을 조금씩 줄이고는 있지만... 술 먹지 않으면 자유롭게 우주를 헤엄쳐 다니는 용을 만나기가 쉽지 않고, 멋진 시상(詩想)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푸념 때문에 어지간히 마셔댄 것 같다.

언제쯤에야 용안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까. 자연스런 몰입의 세계에 빠져 내가 난을 치고 있는지...난이 저절로 붓끝에서 자라는지...난꽃이 은은하게 피고...약간은 썩어버린 영혼을 잠시나마 정화시켜주는 난향, 묵향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을까.

그리고 용안을 찔러대는 그 아픔을 느끼게 하는 파용안(破龍眼)의 묘미를 터득할 수 있을까. 용의 눈을 찔러 처절한 아픔이 배어나오면서도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할 수 있는 파격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을까. 묵묵히 붓질을 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지난 번엔 가느다랗게 난잎 쳐보는 연습을 했다. 그랬더니 강해운 선생님이 너무 힘이 빠지면 맥이 빠진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몸에서 너무 힘을 빼면 난의 내면의 힘도 모두 빠져 히여멀건한 죽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아주 푸석푸석한 머리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주되 ‘가늘고 굵은 선 조절’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 빼기도 힘들고 뺀 힘을 다시 붙이기도 힘들다. 삶에도 강약 조절(强弱 調節)이 필수이듯이 난그림에도 강약 조절을 잘해야 한다. 너무 강해도 부러지고, 너무 약하면 희말테기가 없어 보인다. 이 희말테기를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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