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맛이다. 삶의 향기이다.

 

난잎과 난잎 사이엔 눈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눈이 있다. 지푸라기에도 눈이 있고, 돌덩이에도 눈이 있다. 눈이 있어 날카로운 사금파리에 손이 베이는 것이다.

그 눈이 우리를 보고 있다. 한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없이 정지된 얼굴로, 한없이 흔들리는 얼굴로, 한없이 가라앉아가는 얼굴로 보고 있다.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새의 눈동자에 하느님의 눈동자가 겹친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날쌔게 빙어를 낚아채는 촉새의 눈망울엔 우수가 어려 있다.

 

난 치는데 용의눈을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 늘 용눈을 만들어야 한다. 가끔씩 봉황눈을 만들기도 해야 한다. 용눈이나 봉황눈이나 이 세상에 없는 눈이지만 엄연하게 눈은 있다. 수많은 문인화 화가들에 의해 창조되어진 눈들이 바로 용눈이고 봉황눈이다.

참새나 비비새의 눈도 만들어야 한다. 작고 앙증맞은 눈이다. 혹시 뱀눈을 만들지도 모른다. 살모사나 독사의 눈도 만들어서 선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그 눈을 따라 배우고 있을 뿐이다. 아직 문인화에선 유치원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직 선긋기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묵향을 알겠는가. 이제 아장아장 걷는 문인화 유치원생일 뿐이다.

그 유치원생에게 즐겁게 부를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생겼다. 이른바 호 (號)이다. 나는 소천 강해운 선생님으로부터 ‘우송(愚松)’을 호로 받았다. ‘어리벙벙한 소나무’라는 뜻이다. 어떻게 소나무가 어리벙벙하겠는가.

소나무는 늘 푸르고 굳은 절개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나 같은 중생은 그저 ‘어리석고 어리벙벙한 상태의 소나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게 이 호가 함의하고 있는 뜻이다. 진실을 향해가는 우직함이 그 본뜻이다. 진실로 진흙탕 세상에서 소나무 역할을 하라는 천둥 같은 조언이 담겨 있다.

 

 용눈을 찔러야 한다. 파용안(破龍眼). 용눈의 정중앙을 찌를 것인지, 용눈의 가장자리를 찌를 것인지, 고민 속을 번개같이 헤매야 한다. 손끝으로 전달되는 순간에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용눈을 찌르지만 용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눈이 멀면 세상이 암흑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니, 눈이 멀어도 난잎에 어리는 이슬방울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용눈을 깨뜨리는 것은 파격이다. 역설(逆說)이다. 애써 만들어놓은, 애써 그려놓은, 애써 가꾸어놓은 난초를 갈아엎는 것이다. 야생의 갈기를 휘날리며 피어나는 그 난초를 입혀야 한다. 숨 막히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물결을 감각으로 느껴야 한다.

그렇게 갈아엎어야 새순이 나온다. 갈아엎어야 새정치가 시작된다. 갈아엎어야 낡은 것은 늪속에 가라앉는다.

 

문인화의 세계, 여섯 번째에야 드디어 난꽃을 그릴 수 있었다. 얼마나 황홀한 작업이냐. 얼마나 가슴 떨리는 작업이냐. 눈으로만 보았던 난꽃을 직접 쳐보다니...이 난꽃을 그리기 위해 그동안 기본적인 난잎에 매진해왔다.

난(蘭), 한포기를 그렸다. 그 위에 난꽃을 입혔다. 두 줄기 눈물처럼 피어난 난초이다. 이 난꽃에도 눈이 있다. 난꽃의 눈에는 소복하니 희열이 쌓여 있다.

생애 처음으로 난꽃을 그려 넣은 난초옆에 못난 이름을 새겨 넣었다. 바로 이맛이다. 삶의 맛이다. 삶의 향기이다. 삶의 투레질이다.

                                                                        글 한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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