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 가득 불붙은 생솔가지만 들이미네이

  

 

  어렸을 적에 방 두칸의 초가집에서 살 때였다. 뒤안 가득 대밭이었다. 바람 불면 댓잎 서걱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비람 불고 비오는 날이면 댓잎 스치는 소리가 더욱 요란했다.

봄이면 마당까지 뚫고 들어오는 죽순이 징글맞았다. 낮으로 베어내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죽순은 쑤욱 자라올 랐다. 몇 토막 끊어다 국도 끓이고 죽순 무침도 하지만 그게 지천에 널려 있으면 귀찮아지는 법이어서 발로 뭉개기 바빴다. 발로 뭉개지지 않은 죽순은 하늘 높이 키가 커서는 순식간에 여물고 한그루 대나무가 되었다. 굵기가 다리통만하다는 왕대는 없고, 비닐하우스 짓는 간짓대나 빨래줄을 받치는 간짓대로 쓸만한 정도는 되었다.

한겨울 소복하게 내린 눈을 대나무는 누비이불 뒤집어쓰듯 했다. 부러지면 부러졌지 구부러지지 않는다지만 한쪽으로 휘청 내려앉았다.

대나무로 만드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찬겨울이면 방패연 만들기가 그렇게 재미있었다. 방패연 살대로 쓰였다. 창호지 가운데를 둥그렇게 구멍을 뚫은 뒤 위하고 가운데, 양쪽을 가로지르는 댓가지로 쓰였다. 낭창낭창하게 구부러져야 탄력이 생겨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하늘 높이 오를 수 있었다.

굵직한 대나무를 쪼개 앞부분을 불에 쪼인 뒤 구부리면 바로 자연산 스키가 되었다. 그 스키는 여러 번 타면 쉽게 망가졌다. 그러면 다시 대나무 하나를 베어 쪼갠 뒤 불에 쪼이면 그만이었다.

한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대나무를 쪼갠 뒤 가운데에 불을 알맞게 쪼이면서 구부리면 활처럼 둥글게 말렸다. 양쪽 끝트머리에 여러 겹으로 꼰 실을 묶으면 그게 바로 활이 되었다. 대나무활. 이 활에다 소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못대가리를 망치로 쾅쾅 쳐서 없애버린 뒤 박은 화살이면 족했다. 이 활로 참새며 까마귀 따위를 잡는다고 온 동네를 싸질러 돌아다니느라 하루해가 가는 줄 몰랐다.

그런 대나무가 군자(君子)를 상징한다니.... 군자는 평범한 시골 아이들이나 섬머슴임에 틀림없다. 남도의 굳센 바람을 견뎌내며 자라온 일꾼들 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대나무는 강릉 이남에서만 잘 자라기에 서울에선 대나무가 자라지도 않았다. 서울깍쟁이 선비들이 몽땅 모여 살던 곳에 대나무가 없었다니...서울 양반들은 실제 대나무는 보기 위해선 남도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양반 체면에 남도로 길을 잡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남도쪽으로 가보지도 않고 대나무를 보았다고 ‘에헴!’ 뒷짐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대나무를 파다가 화분으로 만들어 안방에 모셔놓고 감상했을 것이다.

조선말 양반들 몇몇은 ‘거짓 군자’가 되어 국토를 농단하고 급기야는 나라까지 팔아먹는 매국노가 되었다.

▲ 탄은 이정의 풍죽도

그러기에 대나무의 곧은 절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군자는 남쪽에만 있는 것이다. 왕죽의 거대한 대나무숲, 그 자체에서 군자의 품격을 읽을 수 있다.

서울 사람들은 문인화를 통해서 대나무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현실에 없는 대나무를 그리면서 군자라는 착각 속에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대나무를 끊임없이 그리면서 군자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애썼을 것이다.

그래도 문인화 세계에 빠져들면 대나무가 갖고 있는 곧은 절개의 의미를 뼈에 아로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곧은 절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이다. 주둥이로 나불거리며 ‘서민들과 함께 한다’는 그 속임에는 거짓군자가 둥지를 틀고 있고, 나라를 팔아먹고도 떵떵거리며 잘 살았던 이완용 같은 매국노의 핏줄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문인화 수업, 대나무 그리기 첫 시간이었다. 군자는커녕 새끼군자,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로 대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난초의 가는 선이 아니라 굵직한 왕대의 선이기에 붓 누름이 강조되었다.

붓으로 대나무를 그릴 때는 ‘붓이 화선지에 찰싹 달라붙어야 한다’는 소천 강해운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콕 박혔다. 대나무 밑둥은 그 매듭이 짧고, 위로 올라갈수록 매듭과 매듭 사이의 간격이 길었다.

붓을 비스듬히 눕힌 뒤 잠깐 머물렀다. 붓에 들어있던 묵이 충분히 화선지에 빨려 들어갈 즈음 쓰윽 붓을 밀었다. 대나무 아랫도리에선 짧게 끊었다. 끄트머리에서 잠시 멈췄다. 붓이 멈추자 자연스럽게 둥그스름하게 먹물이 번졌다. 붓을 떼고 다시 조금 비틀어서 붓을 멈추어 있게 한다음 한달음에 다음 매듭까지 달렸다. 매듭 짓는 곳에선 다시 숨을 고르면서 멈췄다. 그렇게 위로 올라갈수록 매듭과 매듭 사이의 간격은 넓어졌다.

▲ 탄은 이정의 풍죽도

농묵(濃墨)으로 대나무 매듭 사이를 강하게 그려 넣었다. 조선시대 묵죽화 삼대(三大) 화가라는 탄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에도 대나무 매듭이 선명했다.

대나무 아래에는 위로 솟구치게 그리고, 가운데는 일(一)자로 반듯하게 그리고, 위 매듭은 아래 쳐지게 그리는 게 정수라고 했다. 이렇게 매듭을 그려 넣어야 보다 강렬한 대나무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대나무 매듭을 만드는 붓질을 쉼없이 했다. 댓잎을 그리기까지는 아직 그 수준이 한참이나 모자라 대나무 몸통 그리기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시절에 여수에서 실컷 대나무를 구경한 뒤 부천에 터 잡고 있는 동촌(東村) 선생은 ‘대나무가 군자의 상징이라지’라며 이마에서 땀까지 흘리면서 대나무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눈알이 빠져갈 즈음에 대나무 그리기는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소선 강해운 선생의 채본을 보며 댓잎도 그려 넣어 보았다. 다섯잎이 연속적으로 그려지는 댓잎, 그 댓잎에 나의 숨결을 불어넣어 보려고 애를 썼다.

어린시절 들었던 풍죽소리가 떠올랐다. 예전에 써서 문예지에 발표까지 했던 시(詩), 풍죽(風竹) 속의 아픔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풍죽(風竹)

 

                                                                                한도훈

죙일 마늘밭에 비닐 까느라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네이. 막걸리 한잔 묵겄다고 나간 영감탱이는 여적 소식이 없네이.

흉노의 칼로 가슴이나 베어놓을까. 밤새 발열된 머리로 전등불이나 켜놓을까. 버르장머리 없는 수탉은 시도때도 없이 울어쌌는데...이놈의 영감탱이 가두리에 가둬놓고 비린 먹이나 받아먹게 만들까. 온 시상이 백태가 끼어 암것도 안 보이는구나.

 

새벽부텀 죽어라 마늘밭에 뼈를 갈아넣어도 푸르질 않고, 남북으로 쩍쩍 갈라진 하늘에선 푹푹 눈이 나리네이. 어찌해야 쓸까. 못생긴 미륵에게라도 겨울 담쟁이넝쿨마냥 말라비틀어진 가슴이나 들이댈까. 아매도 미륵이 젖을 못 먹어 삐쩍 말라가는 보다. 아매도 보타지고 쫄아들어 덩치라는 게 있기나 한지. 땅바닥 기어댕기는 딱정벌레가 부러울뿐.

혹처럼 부풀어오른 다리에다가 날개를 붙여 훌쩍 날고 싶고나. 눈물로 죽순을 키워내는 자식을 다시 낳고 싶고나. 폭포처럼 휘날리는 풍죽(風竹) 소리만 뒤뜰에 가득하고나. 자궁 가득 불붙은 생솔가지만 들이미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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