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의 세계. 기본(基本)도 모르는 내가 껍적댔다!

 부천이 온통 벚꽃으로 환하다. 벚꽃이 피어있지 않은 골목은 없다시피 하다. 우산방죽골 언덕인 벚꽃동산에선 벚꽃축제가 벌어지고, 진달래동산에선 나이 먹은 벚나무 몇 그루가 시위하듯 바람에 꽃잎을 흩뿌린다. 벚꽃엔딩이 시작된 것인가.

역곡에서 까치울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이 벚꽃으로 물들어 있다. 하늘에도 벚꽃이고, 길바닥에도 벚꽃이다. 저마다 벚꽃을 향해 환하게 웃음을 짓는다.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벚꽃 앞에선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잠시 동안이나마 꽃과 하나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저 꽃이 지고나면 몇 톤의 무게로 허무(虛無)가 밀려올 것인가.

밀려드는 허무야 깔아뭉개면 그만이다.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몇 해만에 부쩍 자란 벚나무들이 저마다 키재기로 벚꽃을 활짝 열어 제치고 있다. 그래, 꽃들의 향연이다.

꽃동네를 한바퀴 돌고 온 뒤 콩나물에선 부채에다 난그리기를 배웠다. 난의 기초에서 벗어났다는 것인가. 텍도 없는 소리다. 무려 30년이 넘게 난(蘭)만 쳤다는 추사 김정희 스승의 난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크게 크게 화선지에 난을 그리다가 조그마한 부채에다 난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려웠다. 부채의 굴곡진 선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단 한번의 그림으로 난이 쳐져야 했기에 마음에서 초조감이 일었다. 잘못되면 부채를 버려야 했기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초조감으로 들끓었다.

몇 번 화선지에 난을 쳐보고 또 쳐 본다. 시(詩), 서(書), 화(畵)에 대해 생각해 본다.

현대시이지만 그래도 30년 넘게 써 왔다. 문인화 화제시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순발력은 갖췄다고 본다. 그렇지만 날마다 까마득한 시(詩)의 수렁에 빠져 있다.

한편의 시를 쓰고 나면 머리 속은 텅 비어 버린다. 몇 일을 몇 달을 고민하다 써 낸 시 한편으로 몸의 껍질까지 부서질 지경일 때가 많다. 캄캄한 암흑으로 떨어질 때도 있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그렇게 텅 빈 머리 속에 하나하나 새로운 것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뭔가 꽉찬 그 시점에, 순간적으로 시(詩)의 발작(發作)이 시작된다. 입에서 거품이 일고, 눈에서 광기(狂氣)가 서린다. 발작하지 않으면 시가 탄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치지 않으면 시가 쓰여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에 미쳐라. 서에 미쳐라. 문인화에 미쳐라!

그런데 서(書)는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많은 시간들을 그저 무의미(無意味)하게 보냈을까.

손가락 마디마다 관절염(關節炎)으로 뼈마디가 자라난단다. 컴퓨터 자판을 오지게 두들기다 보니 생겨난 것이다. 손마디 관절에서 불꽃이 일어난 것이다. 그 불꽃으로 몇 개의 시는 건졌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생(生)은 자라나지 않았다. 직업병 아닌 직업병을 앓고 있다. 몇 번이고 뜨겁게 달구어진 촛농에 손을 담그면서 뜨거움을 견뎌내는 일을 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시고 아려왔다.

앞으론 그런 아픔을 지니고 살아야 하지만 난 서예의 기초조차 닦아보지 못한 어린 새싹이다. 새싹이기에 서예의 길에 나설 수 있을까. 아무래도 문인화를 배우면서 서예도 함께 배워야 할 듯하다. 추사야 일천 개의 벼루 밑창을 냈다지만 살아생전 벼루 하나 정도 밑창낼 수 있을까. 그저 먹물을 사다 쓰니 그것도 난감함만 안겨주고 있다.

추사의 불기심란도(不欺心蘭圖)를 감상한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추사는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멀리 제주도 대정 마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초가집을 빙 둘러 가시울타리가 쳐지고 한뼘만한 마당밖에 없던 곳에서 불같이 타오르던 마음을 다스리며 그렸을 난(蘭). 추사가 살던 집, 토방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던 기억도 새롭다. 가시울타리에 하얀 탱자꽃이 피었는데. 그 꽃을 사진으로 담으며 오래도록 추사를 생각했었다. 그 좁은 집 방안에서 그렸을 불기심란도.

 

불기심란도(不欺心蘭圖)

-추사 김정희

寫蘭亦當自不欺心始(사란역당자부기심시)

一蔽葉一點瓣(일폐엽일점판)

內省不疾可以示人(내성부질가이시인)

千目所視 千手所指 其嚴乎(천목소시 천수소지 기엄호)

雖此小藝 必自誠意正心中來(수차소예 필자성의정심중래)

始得爲下手宗旨(시득위하수종지)

書示佑兒 竝題(서시우아 병제)

 

난초를 그릴 때는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러움이 없게 된 후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시하고,

모든 사람의 손이 다 지적하고 있으니

이 또한 두렵지 아니한가?

난초를 그리는 것은 비록 작은 재주지만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서 시작해야

비로소 손을 댈 수 있는 기본을 알게 될 것이다.

추사가 아들 상우에게 그려 준 그림이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 꽃술 하나라도 마음 속으로 반성하며 그리는 것, 그렇게 반성하고 반성하고 또 반성해서 부끄러움을 없을 때 남에게 보여주는 난(蘭). 아, 나는 시(詩)를 쓸 때 이처럼 나를 반성하고 또 반성했던가. 온몸에 반성의 채찍질을 해댔던가. 사물의 진실(眞實)을 알아가려고 몸부림 쳤던가. 마음을 바르게 했던가.

문인화의 세계에 발을 디뎠을 때 이처럼 바른 마음을 가지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했던가. 세상의 눈은 아닐지라도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렸을까. 천만분의 일이라도 기본(基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을까.

손가락 마디마디가 울퉁불퉁 돼지감자 닮아가도 이 기본(基本)을 알아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겠다. 한 번 시작 했으니 중도에 그만 두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부채에 난을 치며 ‘난(蘭)의 기본도 모르는 인간(人間)이’ 껍적댄 것들에 대해 통렬히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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