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의 세계, 댓잎에 꽂히라!

 

 검고 칙칙한 발등에서 대의 뿌리가 뻗어 내렸다. 그 뿌리는 척박한 땅들을 깊게 파고 들어갔다. 뿌리 마디마디에서 죽순이 나고 순식간에 마음을 덮었다. 마음 천지가 대밭으로 변한 것이었다. 푸른 댓잎들이 서로 스치며 푸른 소리를 만들어냈다. 소리에 색깔이 있음을 조금씩 깨달았다.

마음 대밭에 함박눈이 내렸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올곧은 대들이 긴 허리를 눕혔다. 한없이 휘어져 대지 끝에 닿을 것 같았다. 언젠가 탁 튀어 올라 하늘을 한뼘 정도 더 높게 밀어 올릴 수 있는 팽팽한 힘이 내재해 있었다. 그렇게 푸른 댓잎에 흰눈이 쌓이면서 푸른 소리도 잦아들었다. 고요하게, 참으로 고요하게 아침 햇살을 맞을 준비를 했다.

새 한 마리가 소리도 없이 날아들었다. 자그마한 참새였을까. 눈 쌓인 댓잎에 살포시 앉아 아침 세수를 했다. 부리로 깃털을 다듬어 여명 사이에 끼인 푸른 소리도 깃털 속에 숨겨 두었다. 한참을 재롱떨 듯 참새 닮은 새의 몸치장은 계속 되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아침 단장에 빠졌을까.

갑자기 새가 날아올랐다. 멀리서 부르는 암컷의 소리라도 들은 것일까. 탁, 탁, 탁! 아주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자 한그루 대나무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눈을 털고 털고 일어서는 대나무들. 그것은 도미노처럼 마음밭 가운데서 시작되어 파문(波紋)처럼 번져갔다. 그건 태풍의 눈이기도 했다. 한가운데가 텅 비어 버린 눈. 댓잎은 푸르게 되살아났다. 그만큼 눈들은 타악 털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 눈이 쌓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대밭은 청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댓잎 부딪히는 푸른 소리도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순간 울고 싶어졌다. 한없이 짓눌려 있던 목울대를 일으켜 세워 우울음 한바탕을 쏟아낼 찰나(刹那), 목울대에 퍼억 쇳덩이 같은 것이 얹혀졌다.

“으윽, 뭐야?”

벌떡 일어났다. 목울대에 올라있는 건 쇳덩이가 아니라 아내의 보드라운 팔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댓잎 서걱이는 푸른 소리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지금 막 울려고 했는데...”

“자다가 무슨 봉창 뚜드리는 소리야. 어서 자!”

아내는 가벼운 코를 골며 잠 속으로 떨어졌다. 다시 마음밭에 푸른 대밭을 키워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영영 그 대밭은 나타나질 않았다.

 

문인화 세계, 댓잎 그리기에 푸욱 빠졌다. 대나무 그림을 그림에 있어 댓잎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역입(逆入)으로 댓잎 꼬투리를 그리고 그 다음으로 묵향이 가득한 댓잎을 그렸다. 연속으로 다섯장의 댓잎을 그리는 일이었다. 가운데 댓잎을 그리고 옆으로 균형을 맞추어 다른 댓잎을 그렸다.

강해운 선생이 해준 채본 대로 그려보지만 손끝, 발끝이 저려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댓잎을 그리는데 꾸욱 힘이 들어갔다. 붓자국이 깊게 패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지적이 뒤따랐는데도 어김없이 붓이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붓에서 힘을 빼고 그리라는 엄명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마음에선 힘이 뭉쳐 나왔다.

마음밭에서 번뇌가 일었다. 칼바람이 휘익 지나갔다. 콩나물신문사에서 새디스트처럼 웃어댔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마음밭에 어지럽게 새발자국이 찍혔다. 댓잎에 몰두해야 하는데 새발자국만 떠올랐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하나?”

전화벨은 자꾸만 울려댔다. 약속들이 시간의 틈바구니를 뚫고 들어왔다.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약속들이 얽혀 있었다. 그 마디에서 자란 댓잎이 무성해졌다. 천천히 댓잎을 그렸다.

문인화에서 댓잎은 다섯잎, 세잎, 두잎, 한 잎 등이 있지만 우선 다섯잎만 그렸다. 잎에서 잎이 돋아나는 것처럼 조화롭게 그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댓잎의 꼬리도 자연스럽게 펼쳐내는 것도 중요했다.

큰 대나무 줄기에서 작은 줄기가 이어지고 그 작은 줄기의 끝에 댓잎이 달려 있었다. 대나무 큰 줄기에 수많은 작은 줄기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작은 줄기들은 실핏줄처럼 마음밭을 이어주고 있었다.

전화벨이 조금 뜸해지자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다. 다른 분들이 치고 있는 난(蘭)도 흘끗 보면서 댓잎 하나에만 매달렸다. 붓이 꺾이면 꺾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리면 되었다. 가느다랗게 대꼬투리를 그린 다음 잠깐 쉬었다가 바로 꺾어 내리면 되었다. 댓잎 하나를 그리면 붓은 옆으로 뉘어졌다. 그 뉘어진 붓으로 자연스럽게 댓잎 그리는 방법을 터득해 갔다.

댓잎 휘어지는 곡선미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화선지에 펼쳐지는 댓잎. 마음밭을 수놓았던 그 많던 댓잎 서걱이는 소리. 푸른 함성이 들리는 듯 했다.

한그루 대나무를 그림을 시도했지만 미완성된 댓잎으로 인해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다섯장을 어느 정도 완성한 다음 세장, 두장, 한 장을 다 그린 다음 한그루 대나무를 완성해 보이겠다.

댓잎 위에 댓잎을 겹쳐 그리는 사랑. 얼음 위에 댓잎을 깔고 사랑을 속삭이던 고려인들이 떠올랐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정 준 오늘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중에서 -

아, 얼마만큼 사랑을 해야 저 얼음구덩이에 댓잎을 깔고 함께 누울 수 있을까. 등짝으로 전해오는 그 차가움이 뜨거운 사랑으로 변해 천천히 녹을 때까지 간절한 사랑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아, 사랑을 하고 있으므로 이 밤 더디 새거라. 제발 더디 새거라. 왜 이렇게 빨리 밤이 지나가려고 하느냐.

목울대에 터억 얹어지는 쇳덩이 보다 무거운 사랑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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