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법률상담소 김주관 변호사

시인으로 문학활동도 병행하는 변호사이면서

남북평화재단 이사로 활동

 

활인법률상담소 김주관 변호사

 사람 살리는 활인법률사무소

‘사람을 살리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김주관 변호사의 활인법률사무소(活人法律事務所)를 찾았다. 어린시절부터 장애가 있어온 탓에 복지에 관심이 많아 스스로 사람들에게 봉사활동을 한다는 의미로 붙인 상호였다.

“법률서비스 자체가 복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한양대 법학과를 다닐 때부터 야학을 해와서 변호사가 된 뒤에도 시민사회, 시민단체, 그리고 복지단체 등과 밀접한 교류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상호를 지었습니다.”

변호사로 갖고 있는 법률서비스는 현실적인 문제하고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 상호간에 분쟁이 생기거나 어떤 사람이 범죄 혐의를 받거나 할 때 변호사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변호사는 현실적인 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지만 시민단체 등에 참여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현실문제에 참여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시절인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중부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충무로, 명동, 동대문, 남대문 등 봉재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이 학생이었습니다. 노동야학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당시 전두환 정권이 저지르고 있던 문제의식을 정면에서 느꼈습니다. 당시에 사회과목, 역사과목을 가르치고 노동법이나 노동분야는 공부를 하면서 가르쳤습니다. 그 덕분에 1년을 휴학하고 5년만에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사법시험을 도전하지 못했지요. 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사법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김주관 변호사는 사회적인 모순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이 대학시절에 생겼다고 했다. 그 문제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학시절에는 대신 독서에 푹 빠졌다.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게 문학적인 재능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독서는 좋아해서 일년에 몇십권의 책을 사보고 있다고 했다.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도 해

“문학 활동을 시작해서 시로 등단도 했습니다. 아직 시집을 내지는 못했지만...문학적인 글쓰기는 변호사 활동에 그다지 도움은 되지 못합니다. 변론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이성적으로 써야하기 때문에 감성이 뒷받침되는 문학적인 글쓰기에는 도움이 못되지요. 그렇지만 마음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출구가 되어 상호보완이 되고 있습니다.”

김주관 변호사는 원래 판·검사 쪽은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변호사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부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할 수 있었다. 당시 부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아버님이 영등포에 살다가 1990년대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있는 고강동 은행단지로 이사를 왔습니다. 1998년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사법시험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부천시립도서관, 당시 만화도서관이었던 북부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5년을 공부해서 마침내 사법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천에 내려온지 25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두루두루 만난 사람들과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부천의 지리는 손바닥 보듯 환합니다.”

김주관 변호사는 사무실을 개업하고 맡은 첫재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당시 생수가 처음으로 유행을 할 때였다. 생수 판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서 대리점과 총판 사이에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그 중의 한 분쟁을 맡게 되었다. 변호사로써 첫 일이라 정말 열심히 뛰었다. 전주법원까지 5-6차례 내려가 변론을 해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변론한 결과 의뢰인에게 승소를 안겨줄 수 있었다.

“그 뒤 그 분이 소개를 해 주어서 몇 건의 사건을 더 수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번 생수업계에서 연락이 오곤 합니다. 생수업계의 고문변호사로 위촉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김주관 변호사는 부천에서 10년 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사람 사는 동네에는 항상 분쟁이 있기 마련이다. 그 분쟁의 정도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10년 전에 비해 3배 정도 많은 변호사들이 부천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거기에다 국선변호인까지 합치면 100여명이 넘는 변호사들이 부천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만큼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쟁도 덩달아 커졌다는 증거이다.

남북평화재단 이사로 왕성한 활동도 병행

김주관 변호사는 변호사가 되면서부터 부천시민연합을 비롯한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가입을 해 왕성하게 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남북평화재단 부천본부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통일문제에도 적극적인 의견을 내고 있다.

“남북평화재단 부천본부의 사무총장으로 이택규 지평교회 목사님, 그리고 박윤수 목사님 등이 실무일을 봅니다. 저는 이사로써 당연히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남북평화재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여러 위원으로 참여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민족이라는 표현이 백년 전하고 그 개념은 다르지만 남북문제를 극복하지 않고는 한반도의 미래가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박근혜 정권에서 개성공단 폐쇄조치를 취하면서 남북문제를 끝장냈기 때문에 보다 더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통일이 더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남북간의 지속적인 교류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제가 매달 덕유사회복지관에서 경기서부 하나센터 주관으로 탈북자 교육의 한 파트를 맡고 있습니다. 벌써 6-7년 정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교육을 해오면서도 뼈저리게 느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지속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민족의 본질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서로 만나야 정(情)이 가고 소통이 될 것입니다. 만나지 못하면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남북간에 마음과 마음, 생활이 하나되는 것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북한의 인민과 남한의 시민들이 만나서 하나의 민족구성원으로 정서적 합일까지 갈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통일은 멀지라도 ‘독일식의 통행허가증’을 가지고 상호방문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남북당국자간에 만나서 며칠이라도 좋으니 회담을 해서 자유왕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김주관 변호사는 통일운동에 대해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등과 함께 올해는 다양한 통일관련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글 | 한도훈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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