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꼴딱 세우며 혼자 익힌 캘리그라피(Calligraphy), ‘꽃비’ 고천성 작가

밤을 꼴딱 세우며 혼자 익힌 캘리그라피(Calligraphy)

8월 12~17일, 송내어울마당

아리솔갤러리에서 개인전열어

 

 

‘꽃비’ 고천성 작가

현대는 캘리그라피(Calligraphy) 시대

캘리그라피(Calligraphy) 시대이다. 서예는 법칙, 법도가 있지만 캘리그라피는 자유롭게 쓰는 글씨이다. 손으로 쓰는 그림문자이기에 그림에 버금가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창작한다. 부천에 이 캘리그라피 대가가 있다. ‘꽃비’ 고천성 작가.

우리나라 캘리그라피 역사는 추사 김정희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추사의 서예는 규범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自由奔放)이 살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추사의 서예작품 연구에 몰두하고 있기도 하다. 추사는 글씨의 기울기를 다르게 하거나 일부러 획을 첨가하기도 하면서 변화를 주었다. 이런 글씨에는 시대를 비꼬는 의미가 담기도 하고, 뭔가 암시적 인 내용이 담겼다. 일부러 글씨를 틀리게 쓰기도 했다.

“캘리그라피는 9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처음 캘리그라피를 접했지요. 글씨를 쓰기 위해 인사동에 가 붓에 대해 물으면 ‘그건 게 뭐냐?’라고 묻곤 했지요. 그땐 서예만 알았지, 캘리그라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붓을 파는 가게인 필방에선 캘리그라피 작가들 때문에 먹고 산다고 할만큼 대중화 되었습니다. 서예로는 돈이 안 되지만 캘리그라피는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예는 활자 같은 느낌이 들지만 캘리그라피는 글자에 느낌을 담습니다. 글씨 속에 슬픔, 애환, 기쁨, 애절함 같은 것을 담습니다. 글씨를 아주 잘 쓰고 아주 예쁘게 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글씨에 마음을 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영어의 캘리그라피 역사는 깊다

고천성 작가는 세계 각 나라 글씨는 캘리그라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영어에도 캘리그라피 공식이 있다고 했다. 아니 영어로 쓴 캘리그라피의 역사가 깊다고 했다. 영어의 캘리그라피는 성경을 필사하면서 발전했다고 말했다. 깊은 산중에서 수도하던 수도사들이 캘리그라피 선구자들이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도 대학다닐 때 캘리그라피 과목을 도강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아름다운 애플의 글씨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한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작 궁서체 정도만 남았다. 서체가 다양하게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우리나라 캘리그라피의 역사는 아주 짧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 쓰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 뒤 직장에 다니다가 퇴사한 뒤에 본격적으로 캘리그라피는 알기 시작한 것은 5-6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캘리그라피는 배울 때도 없고 해서 순전히 독학(獨學)으로 익혔습니다. 캘리그라피 관련 책자를 사서 익히면서 밤을 꼴딱 세우면서 글씨를 썼습니다. 당시에는 글씨 쓰는데 미쳐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글씨만 썼지요. 처음에는 삼천원짜리 붓으로 쓰다가 차츰 인사동에 가서 다양한 붓들을 사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사동 필방 주인의 추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붓을 빠는 방법부터 배웠지요. 종이는 화선지를 선호합니다. 은은하게 번지는 느낌이 좋아서입니다.”

고천성 작가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집에서 글씨만 썼다. 그러다가 2015년 4월 경에야 작업실을 얻게 되었다. 부천엔 자신 보다 먼저 캘리그라피를 먼저 배운 분이 딱 한 분 계시다고 했다. 그런데 그분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한다고 했다.

“서예 공부를 한 분이 캘리그라피를 배우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서예의 공식적인 글쓰기에 습관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서예로 배운 규칙들은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요.

캘리그라피는 붓을 눕히기도 하고, 쭉 빼기고 하고, 반듯하게 세우기도 하는 등 다양합니다. 연필로도 쓰고, 젓가락으로도 쓰고, 심지어 면봉으로도 씁니다. 글쓰는 재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8월 12~17일, 송내어울마당, 아리솔갤러리에서 개인전

고천성 작가는 그렇게 열심히 작품을 써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개인전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작품들이 만족스럽게 써질 때까지 쓰고 또 썼지만 성이 차지 않아서였다.

그러다가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오는 8월에 개인전을 연다. 개인전 때 전시할 작품을 쓰기에 혼신(渾身)의 힘을 다한다. 송내어울마당 아리솔 갤러리에 60여개의 작품을 걸 생각이다.

“우리나라 한글이 정말 캘리그라피를 하기에 최적의 글씨입니다. 한글이 가지는 각지의 고유한 억양, 발음할 때 느껴지는 음의 길이, 글씨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 등이 좋습니다. 그만큼 한글은 우리네 정서와 맞닿아 있어서 표현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글자 간격을 붙이면 빨리 읽고, 글자 간격을 넓히면 천천히 읽지요. 글자로 높낮이를 조절하면 한마디로 ‘칙칙폭폭’ 으로 표현들이 줄지어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매일 매일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합니다. 머릿속에서만 글씨들이 뱅뱅 돌고 있지요. 같은 글자라도 쓸 때마다 다릅니다. 글씨를 쓸 당시의 마음이 슬프거나 기쁠 수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글씨가 조금 슬프게 쓰여질 때가 많습니다.”

고천성 작가는 ‘아~’라는 글자를 썼다고 했다. 그게 신음소리의 표현이었다. 세월호의 아픔을 한단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렇게 아픔이 글씨에서 뚝뚝 배어나오기도 한다.

 

첫 수업 때 양복 입어

“그런데 마냥 슬픈 마음만 가질 수는 없습니다. 힘차게 글씨를 쓸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글씨에다 그림도 그리고, 사진에도 합성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글씨를 통한 예술작품을 만드는 거지요. 꿈 이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그걸 반대로 표현해도 사람들은 꿈이라고 읽습니다. 우리 글자라 쉽게 파악을 하지요.

마음 속에 든 것들을 비워내고 초탈한 상태에서 글씨를 쓰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캘리그라피 첫 수업을 진행할 때 양복을 입고 갔습니다. 선생님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 놀랬습니다. 그분들은 여자가 올 거라고 했답니다. 긴 머리를 묶고 개량한복을 입고 올 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뒤부터 저도 아예 머리를 길게 길고 개량한복 애호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편하디 편합니다.”

고천성 작가는 주민자치센터에서 캘리그라피는 강의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없고 주로 성인들이라고 했다. 오는 8월부터는 인천에서 장애인들 대상으로 캘리그라피 수업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제자 양성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콩나물신문에서도 신문사 입구에 체 게바라 그림을 그려서 조합원들 사이에선 유명해졌다. 고천성 작가는 그림이고, 글씨고 혼자서 익혔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판화작업도 병행한다.

인터뷰가 끝난 뒤 내 시집 ‘코피의 향기’를 전했더니, 시의 제목 중에서 ‘태백산’을 골라 굵은 글씨로 작품을 써 주었다. 우리 집안 대대로 가보(家寶)로 전할 생각이다.

글 | 한도훈 조합원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