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라면도, 중국 누들도 진열되어 있다

 

우리도 90년대 중반 이후에 미친듯이 도로를 닦던 때가 있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한다는 이름으로...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빚을 끌어다가 마음껏 투자했었다. 자동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긴요하지 않은 고속도로도 그 때 나타났다. 역균형개발이라는 정치명분도 그 때 그럴 듯하게 들렸다. 하루 생활권이라는 것도 모자라서 모두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안달을 했다. 고속도로 건설은 폭발적이었고, 도로포장율 제고는 선진의 지표였다. 그것은 곧 발전이고 성장의 징표였다. 그리고 편리함의 상징이었다. 크고 빠른 길은 곧 삶의 질이 나아지는 걸 뜻했다.

새 도로가 생길 때마다 그 주변 땅값은 올라가고, 미친 듯 풀어지는 도로용지 보상금은 졸부계층을 양산하고 졸권구매력으로 이어졌다. 돈이면 어떤 권력도 매입할 수 있었다. 돈에는 그 태생이 표시되지 않는 법.

신도시며 신공항이며 심지어 4대강까지 그 본질은 보상금 졸부와 땅졸부의 탄생이었다. 농사는 잉여인간들의 몫으로 치부되었고, 오직 돈 되는 농사만 정의였고 내몰리는 이농인구는 도시 집중화를 가속시켰다. 여기에 모든 양심과 전문성이 동원되었지만 누구 하나도 그것을 손가락질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속도를 향한 국가적 투자는 가치의 중심을 선도했다. 지방이 중앙에 예속되고 끝내는 세계화의 인프라가 될 것임을 경고하는 소리는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집중화. 우리는 끝내 성냥갑같은 아파트로 통일되어 갈 수 있었고, 중심은 그 안에 또 다른 중심을 창조해 나갔다. 이건 북의 유일사상보다 더 단일한 유일모드라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남이 북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린 구도시의 단독주택에 산다는 걸 부끄러워하기에 이른다. 변두리는 따지지 않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다. 지방은 그리고 작은 것은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트리클다운의 사기에 걸려들었는지 모른다.

 

그리스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면서 군데군데서 벌이고 있는 고속도로 공사장을 만났다. 이들도 머지않아 하루생활권을 누리겠지. 그 속에서 관광산업은 더 잘 되는 듯 보이겠지.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방의 독립성은 지금처럼 지켜질까?

오히려 지방의 종속성이 심해지는 건 아닐까? 메트로폴리탄의 위용도 만들어지겠지. 이 작은 나프플리오에서도 많은 주민들은 AB마트의 카트에 온갖 것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둥치로 묶인 상품들을 집어담고 있었다. 값은 싸고 쌌다. 베트남 라면도 중국 누들도 진열되어 있다. 까르푸는 벌써 여기에도 진출해 있다.

마치 우리 90년대 이후의 시행착오를 돌아보게 했다. 10년 쯤 지나 이 곳을 다시 온다면 어떤 모습일까? 지방은 얼마나 쫄아 있을까? 지금 아크로나프플리오에서 볼 수 있는 저 푸른 곡창이 그 때도 파란 모습을 하고 있을런지 걱정스럽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남의 걱정을 하는 거지?

글Ⅰ유진생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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