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은 하루에 두 번 역류(逆流)

중동벌판에 서해조수가 밀려들었다

한강은 하루에 두 번 역류(逆流)

▲ 한강홍수통제소

한강은 하루에 두 번 역류해

서해에는 아침 저녁으로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거세게 밀물이 밀려들었다가 다시 썰물로 쑥 빠지는 현상이 바로 서해조수이다. 그러기에 제부도는 하루 두 번 바닷길을 열어준다. 이 서해조수가 없다면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서해조수로 인해 간만의 차가 생겨난다. 즉, 간조와 만조 사이에 큰 차이가 생겨난다는 뜻이다. 그 차이는 인천앞바다에서 최고 10m에 달한다. 보통은 5-6m 정도이다. 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이 서해조수가 단지 서해바다 내에서만 이뤄질까? 아니면 한강의 멱줄기를 부여잡고 거세게 밀고 올라가 한강물이 서해로 흐르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하고 상류쪽으로 흐르게 하는 역류(逆流) 현상이 발생할까?

서해조수가 단지 서해바다에서만 이뤄진다면 한강의 역류 현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강은 늘 서해바닷물이 역류를 일으키는 곳이다.

서해바다에서 출발한 바닷물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 무려 3시간 정도의 여행 끝에 한강 유람선을 위해 물을 가둬놓은 신곡보에 도달한다. 신곡보에 도달한 뒤에 그냥 소용돌이만 치고 뒤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곡보를 살짝 넘겨 버리고 만다. 신곡보가 1미터 정도 잠긴다. 2미터를 훌쩍 넘길 때도 있다. 그 바닷물이 신곡보를 넘어 고양 행주산성 아래를 지난 뒤 중상류를 향해 달린다.

일본에서 일어난 쓰나미 현상을 보면 그걸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쓰나미로 인해 부두가 순식간에 잠겨버리는 것처럼 신곡보를 타고 넘은 서해조수는 거침없이 한강의 중상류로 향한다. 그런데 아주 튼튼하게 지어진 신곡보로 인해 거센 역류의 물살의 힘은 현저하게 약화된다.

그러기에 짠물이 있는 바다에서만 사는 상괭이가 한강 상류로 이동할 수 있었다. 2015년도에 상괭이 두 마리가 한강의 역류를 타고 중류로 올라와 한 마리는 선유도 공원 주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한 마리는 성산대교 근방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서해조수를 타고 올라온 상괭이가 썰물 때 미쳐 서해바다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민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 정선 행호관어 - 웅어잡이(이 그림으로 인해 서해조수가 밀려옴을 알 수 있음)

짠물에만 사는 고래가 한강을 들락거려

「신곡보가 없던 시절인 조선시대에는 고래들이 한강을 제집 들락거리 듯 자주 들락거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태종실록은 조선 태종 5년인 1405년에는 비늘이 없고 색깔이 까맣고 코는 목 위에 있는 괴이한 물고기가 나타났다. 조선 광해군 때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가정 갑자년(1564년) 연간에 한강에 큰 물고기가 나타났다. 크기는 돼지만 하고 색상은 희며, 길이가 한 길이 넘는데 머리 뒤에 구멍이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1636년에는 고래 두마리가 한강에서 싸움을 벌였다. 조선의 선비 조경남(1570~1641)이 쓴 ‘속잡록’ 4권을 보면 “고래 두마리가 서해로부터 고양의 압도(지금의 난지도)로 들어와 서로 싸웠는데, 한마리는 그 크기가 한량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도살하여 들여와 기름을 짰다”고 쓰여 있다. 」(한겨레신문 인용)

▲ 1919년도 굴포천 하구 일대(한강으로 열려 있음)

굴포천에는 서해조수가 밀려들지 않았다?

부천의 중동벌판엔 서해조수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서해조수가 중동벌판을 들락거렸다는 본인의 주장에 대해 해명하라고 의견을 보낸 이가 있었다.

해명(解明)! 그 해명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며칠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저 상식선에서 가볍게 해결이 되었다. 성산대교 근방에서 죽은 상괭이가 그걸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서해조수가 한강을 거슬러오르는 그 거센 물결을 두 눈으로 봐 버렸기 때문이다. 하루 두 차례에 걸쳐 역류가 일어나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서해조수가 강화 연미정을 지나쳐 한줄기는 임진강으로 역류하고, 다른 한줄기는 김포를 거치고 고양을 거치고 마포, 노량진을 거쳐 역류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강으로 열려 있던 굴포천에도 서해조수가 밀려들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걸 부정하면 서해조수는 굴포천으로 유입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해조수가 들어오지 않고 그저 민물로만 중동벌판을 채웠다는 그 논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중동벌판이 그저 저습지에 불과했다는 논리는 또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 한국농어촌공사 신곡양배수장

서해조수의 키는 신곡양배수장

현재는 김포 신곡양배수장이 굴포천 하구에 설치되어 있다. 이 시설에 의해 서해조수가 밀려들어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굴포천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굴포천의 물을 한강으로 퍼내는 배수시설을 가동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있다. 겨우 남아 있는 대장벌판의 논에다 한강물을 퍼올릴 때는 양수기를 쓴다. 부천으로 흐르는 것은 동부간선수로라고 하고, 계양, 부평으로 흐르는 것은 서부간선수로이다. 보통은 데부둑이라고 부른다. 두 수로가 신곡양배수장 양켠에 설치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도 상식이 동원되어야 한다. 서해조수가 거세게 밀려와 신곡보까지 밀려왔을 때 이 양수기를 가동할까? 그러면 당연히 서해 짠물로 동부간선수로가 범벅이 되어 대장 벌판의 농사는 곧바로 망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동·서부간선수로에 물을 퍼올릴 때는 썰물 때로 한강물이 서해로 힘차게 흐를 때이다. 이때에는 당연히 짠물이 없이 한강의 민물만이 공급된다.

그런데 어느 분은 “조수를 막고 농사를 위해 그 조수를 다시 퍼올렸다는 이해불가의 결론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이 상식적인 문제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부천 중동벌판에 서해조수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질문임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상식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질문이라는 뜻이다. 

▲ 경인운하 김포 갑문 근처

자연 그대로의 굴포천에 서해조수가 밀려들어와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펴낸 경성지형도가 그 실체를 보여준다. 경성을 중심으로 제작한 지도인데, 다행이 부천 굴포천 자락까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경성지형도는 5만분지1로 제작 되었는데, 1918년에 측도(測圖)와 제판(製版)이 이루어졌고, 1919년 3월 30일 발행되었다.

이 지도에 따르면 굴포천은 현재의 김포 신곡리가 아니라 전호리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전호산 서쪽이다. 전호산 동쪽에는 경인운하 김포 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오류도(梧柳島)로 불린 현재의 백마도 보다 훨씬 위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의 신곡보, 신곡양배수장이 당시의 굴포천 하구 한참 아래에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굴포천은 당연히 신곡양배수장이 설치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하천이다. 이 굴포천으로 자연스럽게 서해조수가 밀려들었음은 지형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해조수가 밀고 올라갈 때는 굴포천으로 몰려들던 구지내, 큰내, 붕어내, 고리울내, 베르내의 물들은 잠시 멈춰 선채 거꾸로 상류쪽으로 밀려들어가야 했다. 그만큼 서해조수의 힘이 거셌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서해조수는 그다지 큰 흐름이 아니었지만 해일이 일거나 장마비하고 연결되면 당연히 부천 중동벌판 일대는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물바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부평도호부청사 근처에서나 계양산에 올라 바라보면 대장동이나 오정동 일대는 마치 섬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부천, 부평평야 일대는 마치 바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때는 현재처럼 굴포천의 폭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이 좁은 굴포천이 그 많은 물을 다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부천 지역의 굴포천은 아주 넓다. 넓게 굴착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포쪽으로 가면 그 폭은 현저하게 좁아진다. 아마도 그 보다 더 좁았을 것이다. 그것도 조선 중기의 김안로에 의해 운하건설을 하면서 굴포천 준설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폭이 더 좁았을 것이다. 그러면 서해조수, 장마 등에 의해 대규모 범람이 자주 일어났을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신곡양배수장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일차완공되었다. 1925년도에 을축년 수해를 당해 붕괴된 뒤 1929년도에 다시 완공되었다. 이때 들어간 비용은 329만여원이나 되었다. 당시 화폐와 현재의 화폐 가치를 비교해 보면 최고 753억원 정도의 거액이었다.

▲ 신곡양배수장에서 바라본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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