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 공무원 시절의 회고담

부천시 공무원 시절의 회고담

날마다 어깨에 띠 두르고 캠페인을 하기도...

 

김완영 행정사는 멧마루인 원종동이 고향이다. 오랫동안 부천 토박이로, 부천 행정가로 살아오면서 다채로운 경험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살았던 멧마루가 기억에 가득하다. 당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이어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장소도 많았다.

“멧마루에 있던 오정면사무소 밑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멧마루의 주막거리, 그 근처가 제가 어렸을 적 집이 있던 곳입니다. 오정초, 오정중학교, 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부천에서 살았습니다. 유년시절을 멧마루에서 보냈고, 나중에 부천시 공무원이 되면서 직장관계로 시내쪽으로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멧마루엔 향수가 많죠. 일단은 멧마루에 있던 대장간이 친구 아버님께서 운영을 하셨어요. 부천은 물론이고 강화까지 김포까지 이쪽으로 연장을 갈러 오던 아주 유명한 곳이었어요. 오정 농협 건너 빵집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대장간이 있었어요. 아주 역사가 있고 향수가 있는 그런 곳이었죠. 당시 대장간이 동네 사랑방이었어요. 친구 아버님의 입을 통해 부천의 역사 얘기들을 많이 들었어요. 화곡동이 왜 화곡동인지... 소래산이 왜 소래산인지 등등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지요. 소래산은 당나라 소정방이가 아내의 병치료를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래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씻으면 아내의 병이 치유된다고 했지요. 소정방이가 왔다해서 소래산(蘇萊山)이라고 했어요. 그게 맞는 지 모르지만...”

 

김완영 행정사 아버님은 농사꾼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 용산에 있는 미8군에서 근무를 했었다. 덕분에 어렸을 때는 그다지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다. 오정초등학교에 다녔다. 지금은 서로 바빠서 초등학교 동기들을 자주 못 만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는 시간을 내서 어릴 적 친구들하고도 다시 친해져야겠다고 했다. 부천고는 제2회 졸업생이다. 부천고에 다닐 때는 멧마루에서 버스를 탔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는 그런 버스였다. 버스를 타거나 그 보다 한참 작은 합승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아침이면 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김포공항, 오쇠리를 거쳐서 멧마루에 오면 꽉 찹니다. 거의 매달려가거나 창문으로 타기도 했어요. 버스를 타지 않으면 걸어가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타야 했지요. 콩나물 시루처럼 진이 빠진 채 송내역 앞에 있는 옛날 진로 회사 그 앞에 내려서 걸어갔어요.

부천고등학교, 소명여고학생들이 있고 인천 가는 학생들도 타고 해서 어마어마 했죠. 학생들로 꽉 찼어요. 당시에는 여학생, 남학생 구분 없이 부대껴서 가는 거예요. 민망할 때가 많았죠. 그래도 요즘처럼 성추행이니 그런 것은 절대 없었습니다. 워낙 상황이 그러니까... 요즘 같으면 난리가 났겠죠.”

 

김완영 행정사는 부천고를 졸업하고 1년 정도 방황을 했다. 그 다음해 3월에 시험을 봐서 9급 공무원에 합격을 했다. 1979년 5월에 발령 받아서 1년 정도 근무를 했다. 군대 3년 갔다 오고 83년 초에 복직해서 지금까지 왔다.

당시에 아버지가 실직을 했다. 그때 미국 대통령이 미군부대를 철수한다는 방침이어서 그랬다. 그 바람에 가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해서 원서는 써놓고 대학시험 자체를 못보고 말았다. 그 덕분에 1년 정도 방황하다가 공무원 시험을 본 것이다.

“중앙동 사무소라고 있었어요. 원미1, 2동 춘의동 관리했어요. 옛날 원미1동 자리에 중앙동사무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업무라고 할 것 없이 이것저것 다했죠. 기억나는 것은 건설 업무를 봤는데, 협성주택이라고 있었어요. 그때 준공이 났는데, 현장에 가서 조경, 식수 등등 그런 걸 꼼꼼하게 체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춘의사거리에서 종합운동장으로 가는 길에 낫소 앞길요. 그 당시엔 비포장 도로였어요. 그 도로를 포장한다고 해서 기업들이 돈을 대어서 한 겁니다. 부천시에서 포장을 한 게 아니라 기업들이 협찬을 해서 도로 포장을 시작했어요. 제가 기업들로부터 돈을 받아서 예치했다가 포장공사할 때 업체한테 돈을 지불하는 그런 업무였지요.

1979년도에 10월 27일이 부천시청이 부천남부역에서 원미동으로 옮겨오는 준공식, 입주식이 있었어요. 저의 관활동에서 행사가 있으니까 얼마나 바빴겠어요. 그때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시절이어서 새벽에 나와서 대청소를 했죠.

부천시청사 준공식에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온다고 해서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정신없이 청소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까 이상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당시에 10.26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그때 집회결사 금지를 해서 준공식을 못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모신문사에서 성대하게 했다고 기사가 나왔지요. 미리 준공식 기사 판을 짜놨던 거죠.”

 

김완영 행정사는 군대에 다녀온 뒤에는 심곡1동 사무소에서 근무를 했다. 옛날 소사읍자리 아래가 심곡1동 사무소였다. 복직 한 뒤 심곡1동 사무소에선 날마다 거리 청소에 동원되어야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 사회정화 운동이 전부였다. 그래서 맨날 교통 정리한다고 거리에 나가 죽을 뻔 했다. 경인국도에는 차가 많이 다니는데 여기에서 수신호를 하고 그랬다. 가까운 곳인 성주산도 관할이었다. 불이 나면 정신없이 달려가 끄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산불이 자주 났는지...

“그때 공무원들이 도로 한가운데서 교통질서를 다 했죠. 사회정화 띠 두르고... 밖에서는 사회정화 위원들이 깃발 들고 하고... 경인국도라 아주 위험하더라고요. 공무원들이 다했죠. 당시에 남부역 근방에 인구가 많고 그래서 필요했죠. 안전을 위해서 매일 했죠. 사실 노가다일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말이 공무원이지...”

김완영 행정사가 부천시청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엔 구청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남구, 중구가 분구 되었다. 현재 남부경찰서 자리가 남구청자리로 가설물로 되어 있었다. 중구는 옛날 원미구청사 앞에 있었다. 처음 발령받은 과는 세무과였다. 그 뒤에는 병사업무를 보았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7급으로 승진을 하고 1988년도에 중구청에 발령이 나서 병사계 병무업무를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차석이었죠. 그때가 서른 한 살쯤이었죠. 중구청에 조금 있다가 다시 시청으로 다시 들어왔죠. 1989년도에 교통행정과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개인택시 인허가, 버스인허가 업무를 봤었죠. 그 업무를 2년간 했어요. 정확한 법 집행만 하면 되니까...힘든 일은 아니었어요. 개인택시 면허 심사해서 면허증을 내주면 되었어요. 지금은 개인택시 면허가 발급이 되지 않고 있지요.

그때는 일반회사에서 6년 정도 근무하면 면허를 받을 수 있었어요. 버스는 말고 일반 택시회사에서 근무하면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어려운 점이 참 많았죠. 먼저 무사고이어야 하니까,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면허 받기 전이나 그 사이에 사고가 나면 안 되요. 그래서 택시 기사들이 거의 일을 못했어요. 사고 날까봐. 까닥 잘못했다가 사고가 나면 면허가 날아가니까... 일에 집중이 안 되었죠.

어쨌든 택시 가지신 분은 자기 사업체거든요. 다들 가정이 있고 자녀들도 키워야 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택시 면허 하나가 인생의 꿈이거든요. 얼마나 고귀하겠어요. 개인택시 면허 받으려고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죠. 택시 회사에 사납금 내시려고 고생했죠.”

글 | 한도훈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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