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마루에 백년이 넘은 상수리 나무 두 그루

멧마루 옛길 따라

▲ 새기 경로당 원두막

멧마루에 살면서 대로만 다녀보아 옛길 여행을 한다는 기대감과 푸른 가을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토요일이지만 서둘러 멧마루 4거리에서 9시에 만나 사이골목으로 들어가니 바로 새기 마을이다. 정겨운 옛집도 보이고, 새기경로당도 있다. 이른 시간이라 청소하시는 분만 있고, 어르신들은 보이지 않았다. 청소하시는 어르신은 몇 년이 되지 않아 잘 모르겠단다. 경로당에 조그만 텃밭이 있었는데, 가을 배추가 싱그러웠다. 어르신들의 쉼터인 정자가 있고, 정자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언덕을 지나니 새기 뒷산인 의령 남씨의 종산이었다는 계산이다. 이 종산에는 말무덤이라는 큰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주차장으로 이용하는 곳까지 포함되는 긴 산이었다. 주차장 아래로는 꽤 높은 빌딩을 짓는 중인데, 주변에 녹지가 없어서 답답했다. 어디가나 부천은 건물짓는 공사 천지이다. 녹지는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으니... 서림아파트쪽으로 이동하니 새터말이다. 새롭게 터를 잡아 마을을 이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터골과 새기 사이에 있던 마을이다.

▲ 새터말 거리

오정초등학교 뒤 전에 성지공원이었던 지금은 먼마루 어린이공원이라는 안내도가 있었는데~ 공원 내에는 산딸나무의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고, 서양산 딸나무는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그래도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이 제일 아름다웠다. 오래 된 느티나무도 가을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멧마루 어린이공원 위쪽에 아담하고 예쁜 교회가 보였는데 성지교회였다. 교회가 60년 정도 되었다 하고, 상수리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한 그루는 100년은 되지 않았을까? 교회 관리하시는 분이 어린이들과 상수리나무 도토리로 실제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는 체험도 한다고... 이렇게 주택가에 상수리나무가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자연을 살리는 마음이 기특하고 예뻐 보였다.

▲ 멧마루 어린이 공원 나무들

오정초등학교 내에 수령이 200년 된 은행나무는 수호목으로 전체 수형을 보니 가지치기를 한

듯 했다. 멧마루 마을 수호목으로 오정초등학교가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다. 오정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베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어 오늘날 은행나무가 살아있게 되었다.

▲ 성지교회

오정초 정문 우측 명가 부동산은 옛날 지소(파출소)가 있던 자리였고, 수도길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이곳에 일본 순사들이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에서 나무를 베거나 하면 잡아와선 곤장을 치는 등 횡포가 아주 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수도길을 따라 멀리 바라보며 땅속에 수도관이 묻혀 있음을~

수제화를 맟춤하는 명동구두타운에 들어가니 어르신이 84세라고 하시는데 정정하시다. 구두방을 운영한지가 35년 지났는데 예전엔 주변이 거의 밭이었다고... 수도길 옆으로 드문드문 몇 채의 집이 있었을 뿐이었다고...

▲ 일제강점기 때 부평경찰서 원종지서 자리

일제 때 유일한 길이었다는 공항 가는 옛길을 따라 걸으니 베스트원 학원이 보이는데 오정면사무소였다고~ 일제 강점기에 부천은 오정면, 소사면으로 나뉘었는데, 멧마루가 오정면 소재지였다. 그러기에 아주 번창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부천에서 제일 쇠락한 동네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조금 더 가니 헐떡고개라는데 현재는 완만했다.

▲ 오정초등학교 내 은행나무

헐떡고개에서 좌회전으로 옛집을 만났는데 좁은 옛길이 보이고, 은은한 꽃잎을 자랑하는 닥풀을 만났다. 닥풀은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재배를 해온 식물이라 한다. 부천에서 닥풀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이웃집 할아버지께서 닥나무로 쪄서 껍질을 벗겨 말리는 과정을 보며 신기해 하곤 했는데 닥나무의 껍질에서 섬유를 뽑아 창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끈적한 점성이 있는 닥풀의 뿌리를 분산제로 넣으면 종이의 두께가 고르고 질이 강해진다고 한다. 닥풀의 꽃, 열매, 뿌리를 약용으로 이용하고, 줄기도 질긴 특성을 이용해 소쿠리, 삼태기 등을 엮던 끈이 바로 닥풀의 줄기를 말려 이용을 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봉오대로 아래로 굴을 지나 양수장이었다는 곳에서 가을걷이를 하는 부부를 만났다. 열심히 마늘을 심고 있었다.

▲ 일제강점기 대 오정면 사무소 자리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고, 예전엔 양수기를 관리하는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걸 그대로 보전하면 안 되었을까? 그것도 하나의 문화유산인데... 왜 그저 부수려고만 할까? 집터 자리엔 우리네 토종인 흰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그리고 쌈집에서 많이 먹던 당귀가 자라고 있었다. 한 잎 뜯어 먹어보니 향긋했다. 한국농어촌공사 원종 양수장인데 현재는 자동 펌핑이 된다고 한다. 예전 양수장을 헐고 새로 지어진 것이었다. 이곳 눈앞에 펼쳐지는 벌판이 용구리다. 예전 멧마루 봉안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늘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논과 밭으로 전부 변했지만...

▲ 멧마루 양수장

멧마루에서 오쇠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들로 원일초등학교 뒤에 있는 방우리 번덩길을 걷다가 ‘울금’에 흰꽃이 피었음에 찬사를 보내고~~ 번덩은 갈대가 우거진 들의 고어라 한다. 15~6년 전 쯤 방우리번덩 미나리꽝 주변에서 쑥, 냉이를 뜯던 기억에 감회가 새롭다.

금호 어울림아파트 앞 먼마루 도당 우물터~ 1994년 원종대로 공사로 이전 복원 되었다. 조선이 개국할 때 고려 유민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대동우물을 중심으로 100여 호가 넘는 대촌이 형성되어 생명수이며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겼다. 주민들의 쉼터이자 단합된 고리였고, 정성을 모아 모시기로 다짐한다는 뜻에서 도당제를 지냈다.

▲ 멧마루 도당우물

푸알란 카페자리에 대장간이 있었음을, 농협 뒤쪽에 주막거리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

음을, 멧마루는 봉안산 중턱에 자리잡은 동네임을 그려보며 옛길여행을 마친다.

글 | 부천향토연구회 콩시루 회원 김 인 숙

▲ 멧마루 방우리 번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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