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훈 부천향토역사 전문가에게 묻.는.다.

  
 부천향토문화연구소(소장 구자룡)가 본지에 연재하고 있는 한도훈 전문가의 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이를 싣는다. 한도훈 부천향토역사 전문가는 본지에 ‘내 고향 부천이야기(35회 연재)’를 통해 “중동벌판에도 바닷물이 들어왔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굴포천 시리즈1~5, 부평수리조합, 동부간선수로 등을 연재해왔다. 또한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 부천시사 땅이름 분야, 장말도당굿, 신나게 부천을 배우자 등을 저술했다.
 이에 본사는 ‘서해조수론’ 논쟁이 부천향토역사연구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건강한 논쟁을 통해 부천향토역사 연구의 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편집자 주).
 
 
 바닷물로 넘실대던 중동벌판?
 
 부천의 역사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중동벌판이 서해조수로 출렁거렸다는 소위 <중동벌판 서해조수론>이다. 한도훈은 <중동벌판 서해조수론> 주장의 근거로 부천의 명칭 변천과정, 이규보의〈계양망해지(桂陽望海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들고 있다.
 우선 부천의 명칭 변천과정에서는 부천지역으로 추정되는 마한의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을 ‘물가에 접해있는 여러 소국 중에 으뜸인 나라’ 라 하고, 비류백제, 온조백제를 거쳐 ‘물가에 접해있는 둑이 늘어선 고을’인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君)이 되었다고 하면서 느닷없이 중동벌을 배경으로 서해조수로 가득 찬 벌판이라고 쓰고 있다. 통일신라 때 장제군(長堤郡), 고려시대의 수주(樹州)와 안남도호부 역시 ‘하천을 낀 고을’이고, 이어 부평의 의미를 ‘넓은 평야를 아우르는 땅이름’이라고 하였다. 토(吐)를 설명하면서는 고구려 때는 ‘둑을 가리킨다.’하고, 부평에서는 ‘넓은 평야를 가리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2001.12)
 중동벌 서해조수의 두 번째 근거자료로 제시한 것은 〈계양망해지〉이다. 한도훈은 “길이 사면으로 계양지경에 났는데 오직 한 면만이 육지로 통하고 삼면은 모두 물이다.”라는 기록에, 느닷없이 ‘이것으로 미루어 계양산 아래 있던 계양도호부 청사를 중심으로 빙 둘러 오정, 고리울까지 서해조수가 밀려 들어와 바다를 이루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서해조수론>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증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세종실록지리지》는 부평도호부 서쪽 서해바다의 토산품을 마치 중동벌판에서 생산된 것처럼 억지로 맞추어 넣은 것에 불과하며, 북쪽으로는 한강하류의 범람원에 접해있고, 서쪽으로는 갯벌이 펼쳐져 있는 부평도호부의 지리적 위치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결과이다. 이를 볼 때 오정, 고리울까지 서해조수가 밀려들어와 바다를 이루었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 《부평사(富平史)》(2002)
 부평사(富平史)》(1997, 2002),《부평의 땅이름》(1999)과 《부천의 땅이름이야기》, 《부천시사》와의 차이점, 즉 전자는 부평분지가 저습지로서 장마 때에는 수해를 겪는 지역이라 하고 있고, 후자는 하루 두 번씩 서해조수가 밀려들어 오던 바다라고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둘 중의 하나는 거짓이다.
 <서해조수론>의 허구성과 관련하여 연구소에서 보낸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대신해 한도훈은 SNS를 통해서 “부천의 역사는 굴포천에서 시작한다. 이 굴포천이 한강 하구로 열려 있을 때 서해조수가 밀려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서해조수가 굴포천으로 흘렀다는 것을 주장하자 그걸 가지고 혹세무민한다는 위인이 나타났다. 그게 공적으로 부천 향토사를 연구하고 기록한다는 곳에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서해조수가) 한강으로 열려있던 굴포천으로 유입되었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을 펼쳐보려 한다.
 
굴포(掘浦)인가? 굴포(屈浦)인가?
 
 한도훈은 sns에서 “부천역사는 굴포천에서 시작한다. 부천의 중앙을 흐르던 하천이 바로 굴포천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부천역사에서 굴포천의 위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포 쪽은 굴곡이 진 곳이어서 굴포천이라는 이름이 붙고 대장동에서 약대에 이르는 부천 쪽은 곧게 운하를 파 직포라는 땅이름이 붙었다.’라고 하였다. 굴포천을 부천역사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굴포천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굴포(掘浦)는 조선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의 운하굴착으로 인하여 생긴 이름으로 팽개다리(掘浦橋;판개다리)에서 북쪽으로 한강까지를, 직포는 팽개다리에서 한다리(大橋)를 거쳐 목숙교(苜蓿橋)까지 이리저리 구불어진 개울을 곧게 파서 직포(直浦)라는 이름이 생겼다.’- 조기준 주장
이를 볼 때 한도훈은 굴포의 굴이 ‘굽을 굴(屈)’인지 ‘팔 굴(掘, 堀)’인지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굴포천을 논하고 있다.
 
서해조수가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한도훈은 ‘중동벌판에 조수가 밀려들었다. 한강은 하루 두번 역류(逆流)’(2016.7.20. 콩나물신문)라는 제목으로 중동벌판 서해조수론을 주장하고 있고, ’서해바다에서 출발한 바닷물은 3시간 뒤 심곡보에 도착하고 쓰나미로 인해 부두가 순식간에 잠겨버리는 것처럼 신곡보를 타고 넘어 거침없이 한강 중상류로 향한다.‘고 주장한다. 서해바닷물은 쓰나미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6시간동안 서서히 들어오면서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강물의 역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동벌판에 넘실대던 서해조수의
과학적 근거는 무엇일까?
 
 한도훈은 초지일관(初志一貫) 한강물을 역류해서 거세게 조수가 밀고 올라왔다고 하는데, 이때의 물은 서해조수가 아니라 한강물이 역류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한강물은 민물로 비중이 1.0이고, 서해조수는 바닷물로 비중이 1.025정도라는 것만 알면, 비중, 농도 등을 배우는 초등학교 4~5학년 아동도 풀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역류현상은 중학교 정도의 과학시간에 모형으로 만들어 보여주기도 한다.
 
신곡양배수장을 구경 가보자!
 
 한도훈은 ‘서해 조수의 키는 신곡양배수장’에 있다고 하고, 서해조수가 밀려들어 올 때는 양수기를 가동하지 않고, 짠물이 없이 한강에 민물만이 있는 썰물 때만 공급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상식이라는 것이다. 짠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썰물 때만 동·서부간선수로에 양수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한도훈은 서해조수론을 증명하기 위해 1919년판 경성지형도 중 굴포천 하구일대 사진을 게재하면서, 지형도를 통해 굴포천으로 자연스럽게 서해조수가 밀려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경성지형도에 보이는 굴포천 하구 일대에 조성된 경작지(논)는 서해조수 속에 있었다는 결론인데, 조수 속에서 농사를 짓는 세계농업사에 길이 남을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부평수리조합 설립 후
서해조수는 어디로 갔나?
 
 중동벌판의 서해조수가 없어지는 것은 중동벌판에 부평수리조합이 생기는 1923년부터 조수의 유입이 막히고 평야로 변하여 곡창지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한도훈은 콩나물 신문(2016.8.10.)에서 수리조합 설치로 부평평야 일원에 서해조수가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서해조수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한도훈의 주장대로 신곡 펌프장에서 간조(조금) 때만 양수하는 것인가? 부평수리조합의 설치로 조수가 차단된 것이 아니라, 조수는 애초에 없었다. 다만 서해조수의 영향으로 조수의 염분이 섞여 들어왔던 것이다.
 
▲ 《부천시사(富川市史)》(2002.2)
서해조수로 항구가 생기고
조운선이 드나든 부천?
 
 <중동벌판 서해조수론>에 의하면 약대리, 삼정리는 물론 고리울, 진말 앞, 구지리까지 바닷물이 밀려오고 고기잡이배와 세곡선이 들락거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부천에서 동네간의 왕래는 배를 이용하거나 썰물 때 갯벌로 걸어 다녔다는 결론이다. 한도훈은 <서해조수론>을 증명하기 위해 새우젓 배, 세곡선과 조창(漕倉)을 연결시키고 있다.
 
 1) 창이란 창고를 말하고 한국전력공사, 부천여중학교가 있는 골짜기를 창골 이라고 했고, 세 개의 조창(朝倉)이 있었다. 이 조창(朝倉)에서는 부천지역에서 생산된 곡식들을 이곳에 저장하였다가 용산포구로 실어 날랐다.
 2) 솔안말 지역에는 조선시대에 쌀을 저장해 두는 정부의 조창이 있었다. 구지말 사람들이 배뜰에 배를 매어두고 이용했다.
 
 1)과 2)를 종합하면 송내동, 구지리 일대에 조창이 있었고 여기에 저장된 곡식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세곡선이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학교 수준의 국사지식도 없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서해조수론에 맞춰 열심히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고종 등극 후,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개혁정책을 시행한다. 환곡제 개혁인 사창제(社倉制)는 구휼제도(救恤制度)로, 사창이란 환곡을 저장하던 고을의 창고이며, 국가의 세곡미를 보관하던 창고는 조창(漕倉)이고, 세곡미를 나르던 배를 조운선(漕運船)이라 한다. 한도훈은 조선말기 지도의 사창을 조창으로 잘못 알고 세곡선, 조창 운운하면서 〈서해조수론〉에 꿰어 맞춘 것이며, 조창의 조(漕)를 아침 조(朝)자를 써서 조창(朝倉)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었다.
 
 <중동벌판 서해조수론>은 부평평야가 서해조수로 가득 차 있었고, 이러한 서해조수가 없어지는 것은 1923년 한강수리조합이 생기고 부터라 하였다.
서해조수가 구지리까지 들어왔다면, 한말 부평군 지명 중 동양리, 상야리, 한다리(石橋里) 등은 적어도 부평수리조합에 의해 부평평야가 조성되는 1925년까지는 존재할 수가 없다. 지도나 기록에 등장한다면, 이들 동네는 중동벌판 조수 속에 존재했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른다. 아울러 <중동벌판 서해조수론>이 맞는다면 동여도, 대동여지도, 부평부지도 등 부평수리조합 설립 전의 지도에 나오는 도로망은 육로(陸路)가 아닌 해로(海路)를 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럴 경우 지도에 보이는 대교, 대장석교 등은 바다 속에 있는 다리이다.
 또 조수가 구지리까지 들어왔다면 구지리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경인철도는 갯벌에 건설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네스북에 등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해 불가인 것은 1910년 완공된 수돗길로서, <서해조수론>의 주장이 옳다면 수돗길은 해저에 만든 세계 최초의 수도인 동시에 도로인 것이다.
 
글 | 부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김희태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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