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장 들판에서 갯벌층 만나...

대장 들판의 옛모습을 상상해볼까?

 

◆ 대장 들판에서 갯벌층 만나...

옛날에, 아주 옛날에 대장 들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하다. 그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없고, 그림도 없다. 다만 현재의 대장들판을 통해 추론을 해볼 뿐이다.

현재의 대장 들판은 예전에 비해 너무도 많이 객토(客土)가 되어 있다. 원래 객토는 농토에 새로운 흙을 넣어서 토층(土層)의 성질을 개선하는 걸 목표로 해서 그 토지의 생산성을 높이고자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장 들판은 토질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 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다른 목적은 뭘까? 대장 들판이 산업단지로 변하는 걸 예상해서 이때 받을 보상을 미리 예상해서 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장들판 논에다 황토흙을 높게 성토를 해서 형질변경을 한 다음 포도를 심거나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보상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장 들판이 일제 강점기 때보다 현저하게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은 오정에서 대장 마을로 가는 농로(農路)가 그 증거이다. 이 농로는 주변 논보다 지대가 낮다. 그러기에 비만 오면 질척거린다. 논으로 물이 빠지지 못한 탓이다. 농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주변 논들이 스스로 일어섰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황토흙이며 진흙을 가져와서는 마구 부려놓은 탓이다. 밭으로 만들어놓은 곳에 황토가 깔려 있는 것을 보면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물론 대장 마루는 황토로 되어 있지만...

대장 들판은 몇 만년 전부터 형성된 분지이다. 한강으로 연결된 굴포천을 통해 서해조수가 늘 들락거리는 갯벌이었다. 굴포천이 현재처럼 다듬어지기 전에는 수시로 범람해서 대장들판을 적셨다. 수해가 오면 서해조수하고 섞여서 짠물반, 민물반이 되었다.

현재 대장들판 아래에는 갯벌이 잠들어 있다. 갯벌 위에 논흙이 새로 형성되어 덮여졌기 때문이다. 대장들판 깊숙이에는 예전 갯벌 시절에 형성된 개흙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라고 물으면 “포크레인으로 파 보면 알지”라고 대답해 줄 수 있다. 대장들판 한 군데를 지정해 아래로 한 5미터쯤 파 내려가면 갯벌흙을 만날 수 있다. 갯벌로 형성되어 있던 땅이다. 갯벌층이 형성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만들어져 온 갯벌층이다.

옛 대장들판이 서해조수와 일상적으로 만났던 흔적이다. 그렇게 대장들판을 파 본 사람이 증언해 주고 있다. 하도 대장들판에 서해조수가 밀려왔느니 안 왔느니 하니까 궁금해서 땅 밑을 파보았단다. 그랬더니 정말로 갯벌층이었다는 것이다. 이걸로 증명 끝이다.

중동신시가지 공사를 할 때도 지반이 아주 약해서 땅 아래로 15미터 이상 파 내려가 보니 갯벌층이었다. 그게 사실로 확인이 되었다. 그저 밀물이 흐르는데 갯벌층이 생성될 리는 만무하다. 바닷물이 섞여 들어와야 갯벌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굴포천이 여러 번에 걸쳐 확장되면서 수시로 대장들판을 적시던 갯골 물길이 뚝 끊기게 되었다. 물론 부평수리조합이 만든 동부간선수로가 생긴 뒤로도 수해가 들면 대장들판은 바다처럼 되기 일쑤였다. 섬말 마을 집 앞까지 물이 차올라 동그랑재로 피난가기도 했다. 굴포천 정비가 진행되고 경인운하가 만들어지면서 더 이상 대장 들판이 바다로 변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너무도 지긋지긋하게 겪던 물난리를 이제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대장 들판의 벼를 온전히 수확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태 농법,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일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마자 이곳 60만 평을 산업단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60만 평이 산업단지로 변모하게 되면 부천시는 암흑의 도시로 변할 수도 있다. 부천시의 녹지율이 최하위 중에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 만 마리 겨울 철새도 갈 곳을 잃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게 될 것이다. 대장 들판 산업단지가 정말 필요한가?

 

◆ 대장 들판이라는 이름을 찾기까지...

대장 들판의 벼들이 익어간다.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에 서서 대장 마을을 바라본다. 추석이 지나면 황금들판으로 변할 것이고, 분주하게 콤바인들이 누빌 것이다. 그러면 이발기계로 까까머리를 깍 듯이 야금야금 빈공간을 들러낼 것이다.

이때쯤이면 저 북쪽으로부터 기러기며 재두루미들이 날아들 것이다. 옛날엔 일일이 손으로 벼를 베어야 해서 낱알들이 논에 떨어져 철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지금은 콤바인이 싸악 털어내 버려 논에 별로 낱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철새들을 위한 벼들을 따로 뿌려주어야 한다. 철새들도 먹이전쟁을 벌여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 야박한 먹이 쟁탈전이다. 사람들이 기계의 힘을 빌어 다 털어먹어버리니까 철새들이 굶주리는 것이다. 조금씩 베푸는 자세가 너무도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 대장 들판의 곡식들은 오정농협에서 전량 수매를 해서 부천내 아이들 급식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대장 들판에서 난 양질의 쌀이 아이들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대장 들판은 우렁이 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곳이 많다. 친환경으로 지어지는 농사야말로 우리의 미래 먹거리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항공방재를 통해 농약을 뿌려대면 그 잔류농약은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 아이들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고 심각한 건강상의 부작용을 일으킬 것은 눈에 뻔하다.

여름 철새들의 몸놀림이 분주하다. 이미 봄부터 새끼 낳기에 성공한 새들이 새끼 키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멀리 길 떠나려면 많은 먹이를 축적해야 해서 동부간선수로, 대장들판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먹이사냥에 열중한다. 그 중에 아예 텃새로 자리잡은 흰뺨검둥오리 같은 경우는 느긋하다. 멀리 날아갈 필요가 없기에 먹이 사냥도 그만큼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노랑할미새도 분주하게 새끼들을 데리고 사냥터를 누비고 있다. 노란 배가 인상적이다. 이들 노랑할미새는 새롭게 넓혀놓은 삼정공단 북쪽 붕어내 하류를 자유롭게 누비며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 붕어내 양켠도 들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정물류단지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다. 이렇게 야금야금 들판은 공장지대로 변해가고 있다.

◆ 대장 들판의 높이가 자꾸 높아만 간다

대장 들판은 굴포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굴포천의 폭이 넓지 않을 때는 수시로 범람을 해서 대장들판으로 넘어오기 일쑤여서 들판으로서 기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 조선 중중 때 김안로가 총지휘를 한 ‘굴포천운하’ 만들기 사업을 벌인 뒤부터는 어느 정도 안정기를 가졌다. 한다리 아래 김포 쪽으로는 여전히 구불구불한 하천구조를 가졌다. 하지만 운하로서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배가 들락거려야 해서 그만큼 폭을 넓혔다. 중중 시대 이전 보다는 굴포천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다리 남쪽인 약대 목시통까지 깊게 파서 본격적인 운하 작업을 진행했다. 이 구간을 직선으로 깊게 파서 이를 직포라고 불렀다. 이 직포를 건설하면서 양옆에 둑을 쌓았다. 덕분에 목시통 들판이 생겨났다. 현재도 이 일대는 벼농사를 짓고 있다. 높은 둑 덕분에 굴포천의 범람으로부터 자유롭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직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굴포천 중하류 부분은 구불구불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부수자원 생태공원 주차장 자리가 세집매이다. 이 세집매의 높이를 보면 이 일대가 어떻게 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세집매의 해발 높이가 5m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는 해발 13.2m로 높아져 있다. 북부수자원 생태공원이자 하수종말처리장을 만들면서 이 일대를 얼마나 높여 놓았는지 알 수 있다. 거의 섬말의 동그랑재 높이의 수준까지 올라와 있다.

현재 대장들판의 높이도 ‘5.3m, 5.4m, 5.5m, 5.6m 등으로 비슷하다. 세집매가 위치해 있던 곳보다 조금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겨울이면 강서마곡지구 아파트단지로부터 흙을 실어와 불법적으로 성토를 해대서 이제 그 높이는 가늠할 수가 없다. 조만간 북부수자원생태공원의 높이만큼 높아질 것으로 보여진다. 이 때는 대장들판이 벼 대신 과수작물이나 밭작물이 심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장들판의 형질이 바뀌면 대장산업단지를 만드는데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다.

 

◆ 대장 들판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최근의 일

조선 시대에는 대장 들판이라는 이름 대신 한다리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다리들은 대장 들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계양구 박촌동에 속했다. 당시 용종리(龍宗里), 병방리(兵房里), 송현리(松峴里). 박촌리(朴村里)가 포함된 들판이었다. 그러니까 부평군 군내면 하동, 부평군 동면 용종리, 부평군 동면 병방리, 부평군 동면 박촌리에 속한 게 한다리들이었다.

대장동에는 앞벌과 번개들만 있었다. 앞벌은 대장초등학교 앞 벌판을 가리키고, 번개들은 대장 마을, 섬말 앞에 있는 들을 가리켰다. 이 번개들이 대장 들판하고 연결되어 있지만 그다지 크지 않았다. 나머지 들은 황무지여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러던 것이 부평수리조합으로 인해 김포 신곡양배수장이 설치되고, 동부간선수로가 완공되면서 서해조수로부터 침탈이 이뤄지지 않자 대장들판이 서서히 그 모습을 완성해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대장 들판을 가리켜 부평평야라고 불렀다. 대장동이 한때 김포군에 속했는데, 이때는 김포 평야로 불러야 했다. 그러기에 이곳은 부천이라는 이름을 두고도 여태 제대로 된 평야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부천 평야, 대장 들판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많은 이들이 혼동해서 부평 평야로 부르는 이들이 더 많다.

현재의 대장 들판은 부평 평야로 부르고 동부간선수로로 갈라진 대장초등학교 앞 들판을 가리켜 대장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들판과 대장 마을 앞 들판을 전부 가리켜 대장들판이라고 해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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