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들판에서 수확한 벼, 낟가리로 쌓아

대장 들판, 벼 타작 이야기

▲ 대장들판에서 탈곡 장면(부천시 제공)

◆ 대장 들판에서 수확한 벼, 낟가리로 쌓아

 대장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은 가을이면 베 베기가 시작되었다. 보통 서리내릴 즈음이었다. 낫으로 일일이 벼 포기를 잡아당기며 베어야 했다. 왼손으로 벼 포기를 잡고 낫으로 쓰윽 잡아 다녔다. 몇 번 잡아 다니면서 베어내면 왼손 가득하게 찼다. 보통 네 줌을 한 무더기로 놓았다. 한 단이었다. 이 한단에서 쌀이 한 되 가량 나왔다.

벼를 잘 베는 사람은 순식간에 사과 먹듯, 배 먹듯 논배미가 줄어들어 갔다. 벼를 베는 것도 두레를 하거나 품앗이를 했다. 품앗이는 한 번 일해주면 다른 집에서 일을 해주는 1:1 교환이었다. 일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없이 품앗이는 진행했다. 물론 농네 농꾼으로 소문이 나면 여기저기서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수해 한 번 입지 않고 풍년이 들면 대장 들판은 황금 들판이 되었다. 그러면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벼 잘 베는 일꾼이야 베를 베는 기간 동안은 최고 대우를 받았다. 다른 사람 보다 일당을 더 받고 일을 해주기도 했다.

벼 베는 일이 끝나면 벼를 묶어 서로 세웠다. 잘 말려야 벼를 떨어내기 쉬웠다. 논바닥에 대나무를 길게 고정시켜서 볏단을 말리기도 했다. 볏단을 말리는 것도 규칙이 있었다. 논바닥에 볏단을 세워 말릴 때는 스무 단을 한 가리라고 했다. 다른 말로는 한 광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를 타작하면 쌀이 한 섬이 된다. 한 되, 한 섬의 규칙이었다.

벼를 베면 바로 묶는 것하고, 논바닥에서 며칠 말렸다가 묶는 것이 지방마다 달랐다. 중부지방인 부천에선 바로 단으로 묶어서 논바닥이나 논둑에 세워서 보통 스무날을 말렸다. 물 빠짐이 좋지 않은 경우에 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충청도 일부와 남부지방, 특히 평야 지역에서는 벼를 벤 즉시 단으로 묶지 않고 논바닥에 깔아 일 주일 가량 말린 다음 단으로 묶었다. 평야 지대는 논의 물 빠짐이 좋아 논에 두고 말렸다. 논에 펼쳐놓고 말리는 것이 볏단이 더 빨리 마르는 잇점이 있었다.

대장 들판에서는 볏단과 볏단을 기대어 세워 놓았다. 스무날이 지나면 볏단이 뽀송뽀송하게 말라 지게에다 지고 집 마당으로 가지고 왔다. 이게 원칙인데 아예 처음부터 볏단을 묶어 집 마당으로 가지고 와서 마당에다 줄줄이 세워 말리기도 했다.

이렇게 논에다 볏단을 말리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기도 했다. 느닷없이 가을 수해가 덮치면 대장들판엔 볏단이 둥둥 떠내려갔다. 대장 마을 어르신에 의하면 이렇게 가을 수해가 나 볏단이 둥둥 떠내려 간 것을 목격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는 증언이다. 폭우가 내려 볏단이 물에 잠긴 채 며칠 있으면 벼가 썩거나 벼에서 아예 싹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썩어버린 볏단은 사료로도 쓸 수가 없었다. 소죽을 끓이더라도 싱싱한 볏집이래야 소가 잘 먹었다.

그래서 이런 위험을 없애려면 한밤중이라도 볏단을 집 마당으로 지어 날라야 했다. 하지만 집 마당이 좁은 경우에는 그 많은 벼들을 말릴 수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논바닥에 세워 두어야 했다. 이럴 때는 하느님이 맑은 햇살을 내려주어 볏단이 잘 마르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볏단이 다 마르면 타작할 곳으로 옮겼다. 보통 지게로 져 나르거나 발채나 달구지를 써서 소로 날랐다. 지게로 지면 한계가 뚜렷해서 여러 번 날라야 했다. 조금 세월이 지나면 달구지나 경운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경운기에는 지게로 지는 것의 열 배, 스무 배는 더 실어 나를 수 있어 효율적이었다. 볏단을 논에서 가지고 나와 농로(農路)에 세워놓은 달구지나 경운기에 실었다. 마당에 가서는 다시 이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지게로 옮기거나 경운기로 옮긴 볏단은 마당이나 텃밭에 낟가리를 쳤다. 낟가리는 먼저 바닥에 짚이나 거적을 깔았다. 바닥이 땅이라 볏단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벼의 잘린 밑동은 밖으로 향하고, 이삭은 안으로 쌓았다. 이삭을 밖으로 하면 새나 쥐의 공격을 그대로 받았다. 낟가리는 동그랗게 쌓아 올렸다. 한 사람이 낟가리 안으로 들어가 던져주는 볏단을 차곡차곡 쟁여 넣었다. 낟가리는 위로 갈수록 배가 불룩하게 만들었다. 우리네 항아리를 닮았다. 아마도 항아리가 낟가리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낟가리의 꼭대기에는 이미 수확한 볏단으로 만든 이엉이나 거적을 덮었다. 보통 이엉을 얹었다. 그래야 비가 와서 낟가리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지 못했다. 보통 한 가리에 3~4백 단을 쌓았다. 대장 들판 같은 경우에는 농사를 짓는 규모가 커서 낟가리 하나에 5~7백 단을 넘기기 일쑤였다. 이렇게 낟가리가 싸여진 마당을 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이렇게 되면 한 해 농사를 마무리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대장 마을에서 벼타작은 어떻게 했을까?

대장 마을 사람들은 한겨울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낟거리를 걷어냈다. 타작 준비를 위해서는 마당에 여러 개의 멍석을 깔았다. 옆집, 앞집, 뒷집에서 빌려 온 멍석들이었다. 넓게 멍석을 깔아야 벼 한 톨이라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조선 시대 때에는 타작은 힘들고 힘든 일이었다. 낟거리에서 볏단을 내리면 멍석 위에 둥근 통나무가 놓여져 있었다. 통나무 아래에는 두 개나 세 개의 발이 달려 있었다. 그걸 개상이라고 했다.

김홍도 벼 타작이라는 그림을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양반은 한쪽 구석에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 장죽을 피워 물고 있다. 소작인들이 벼 타작을 제대로 하는 지 감시 하는 중이다. 한 사내가 열심히 지게로 볏단을 져 나르고 있다. 네 명의 사내는 웃통을 벗어부친 채 개상에다 볏단을 어깨 뒤로 돌렸다가 앞으로 내리치고 있다. 이삭이 땅에 우수수 떨어진다. 덜 떨어진 것은 도리깨로 마저 떨었다. 벼 한 알이라도 소중하게 여겼다. 그때에는 쌀이 너무도 귀했다.

▲ 김홍도 '벼타작' 작품

다른 한 사내가 빗자루로 이삭을 쓸어 모으고 있다. 이게 조선 시대 벼 타작이다. 물론 더 올라가서 청동기 시대에는 타작을 할 필요 없이 벼 모가지를 뚝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볏집을 전혀 쓸 수 없고 볍씨를 뿌리거나 할 때 지장이 많이 생겼다.

벼훑이라고 해서 빗처럼 생긴 도구를 쓰기도 했다. 벼훑이는 지역에 따라 훌치개, 손그네, 베훌깨, 손홀깨, 홀깨, 가락홀태로 불렀다. 훌태, 훌추이, 벼치기, 홀태라고 하는 곳도 있었다. 빗처럼 생긴 것은 손홀태라고 했다. 집게처럼 생긴 것은 가락홀태라고 불렀다. 왼손이나 오른손에 벼훑이를 들고 다른 손으로 볏단에서 한 줌 정도를 쥔 다음 벼훑이에 넣고 잡아 당겼다. 그러면 벼이삭에서 볍씨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는 개상 보다 작업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손으로 작업하는 것이라 힘들고 고된 노동이었다.

벼훑이와 비슷한 것의 이름은 짚채이다. 짚채는 물푸레나무나 싸리나무로 회초리처럼 만들어 썼다. 짚채를 한 손에 쥐고 볏짚을 쳐서 알갱이를 떨어냈다. 떤다. ‘홀태’는 ‘훑이’가 표준말이지만 대부분의 농가에서 ‘홀태’라 부르고 있어 여기서도 ‘홀태’라 했다.

손에서 작업하는 속도가 너무 더디어 발명한 것이 그네이다. 벼이삭을 훑는 홀테를 거꾸로 세워놓고 네 개의 발로 고정한 다음 발에다 새끼줄로 나무 발판을 댔다. 나무 발판에다 발을 얹고 힘을 주면 그네 사용이 훨씬 편해졌다. 홀테 사이에 벼이삭이 끼이면 힘껏 잡아당겨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홀테 자체가 무너지기 쉬웠다. 그게 무너지지 않고 벼를 훑을 수 있게 요령껏 발로 밟아야 했다. 훑이는 홀태라고도 한다. 표준어가 훑이지만 이를 쓰지 않고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홀태라고 불렀다.

이 홀테는 칠십년 대까지 썼다. 탈곡기가 없는 집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홀태를 사용해야 했다. 집집마다 탈곡기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홀태인 그네는 유물이 되어 갔다.

전남 함평에선 홀테를 사용하면서 부른 노동요가 있다. 홀테 사용에 대한 진한 사랑이야기다.

▲ 대장들판에서 탈곡 장면(부천시 제공)

 

나락 홀테기 소리 (전남 함평)

 

시렁시렁 홀태기야

시렁시렁 홀태기야

운종정달배 귀가 엷어

시렁시렁 홀태기야

귀가 얇어서 잘 떨어지고

시렁시렁 홀태기야

중실배 백배가 좋다마는

시렁시렁 홀태기야

다마금이 더욱 좋네

시렁시렁 홀태기야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탈곡기가 도입되었다. 먼저 발로 밟아 돌리는 족답탈곡기가 사용되었다. 그네에선 발로 힘 있게 밟아야 했지만 이 족답탈곡기에선 발로 가볍게 리듬에 맞춰 밟으면 벼를 떨어내는 원동이 잘도 돌았다. 원통에는 철사로 구부려 부착해 놓아 이게 벼를 순식간에 떨어내는 역할을 했다. 탈곡하는 사람은 한 발로 밟아 원통을 돌리면서 두 손으로는 볏단을 잡고 이리 저리 돌려댔다. 한 곳만 대면 그곳 벼이삭만 떨리기에 뒤로 돌려 덜 떨어진 알곡을 떨어냈다. 혼자서도 탈곡기를 쓸 수 있었다. 옆에 볏단을 갖다 놓고 일일이 손으로 집어서 사용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일을 하면 훨씬 능률이 올랐다. 한 사람이 볏단에서 적당한 크기로 떼어 주면 그걸 탈곡기에 넣고 돌렸다. 보통 두 사라이 한 탈곡기를 돌렸다. 양쪽에서 탈곡을 하면 그만큼 많은 양의 볏단을 떨어낼 수 있었다. 알곡이 떨린 볏단은 뒤로 빼돌리면 다른 사람이 그걸 모아 적당한 크기의 단으로 묶었다. 알곡이 떨린 볏단도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기에 소중했다.

족답탈곡기에 이어 발동기가 돌리는 동력탈곡기가 도입되었다. 발동기는 기름으로 운영되었다. 한쪽에 벨트인 피댓줄을 연결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피댓줄이 탈곡기에 연결되어 자동으로 탈곡기가 돌아갔다. 탈곡기는 길게 볏단을 올릴 수 있는 판이 있었다. 이 판위에 볏단을 풀어 올려놓고 적당하게 벌려 놓으면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볏단이 탈곡기 속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오면 벼이삭이 다 떨려졌다. 떨려진 볏단은 아래로 차곡차곡 떨어졌다. 그걸 볏단으로 묶으면 탈곡은 끝이 났다. 발동기 대신 경운기가 돌리는 자동탈곡기로 발전했다. 이렇게 동력탈곡기가 사용되면서 낟가리나 전통적인 마당질은 사라졌다. 경운기가 직접 논에 들어가 탈곡기를 설치하고 볏단을 가져다가 탈곡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탈곡이 끝나면 탈곡기를 실어 나르고, 그 다음 알곡을 실어 나르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콤바인이 벼를 베어냄과 동시에 탈곡까지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벼 베기나 탈곡하는 광경을 보기가 어렵다. 콤바인은 자동으로 탈곡을 하고 볏단을 아래로 가지런히 떨어뜨려 놓는다. 그러면 나중에 그걸 기계로 모아 포장을 한 다음 숙성을 시켜 소먹이용으로 쓰고 있다.

대장 마을, 섬말도 이러한 벼 타작 발전을 거쳤다. 지금은 대장들판 그 넓은 논들을 누비며 탈곡하는 것은 콤바인이다. 홀테를 사용하면서 탈곡하는 것은 순전히 학생들의 체험을 위한 시범으로만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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