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곡의 내력

경기도 농사시험장이 들어서 있던 역골, 역곡驛谷 

▲ 경기도 농사시험장이 있던 e편한세상 아파트

역곡 북부역 일대가 골짜기

부천 역곡역 북부 일대는 온통 상가, 빌라, 아파트로 도배되어 있다. 예전에 이곳으로 개울이 흐르고 조그마한 산자락이 뻗어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조차 이상해졌다.

역곡1동에는 역곡상상시장이 들어 서 있다. 전국에서 가장 번창한 전통시장으로 손꼽는다. 시장 안에 카페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방송국도 있다. 주민들의 쉼터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시장 서쪽으로 죽 올라가면 역곡중학교, 역곡고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곳으로 용문내 줄기가 힘차게 뻗어 내렸다고 설명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한다. 정말이요? 역곡상상시장 아래로 개울물이 흘러내리던 과거가 떠올라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개울이 흘렀던 흔적은 없다.

용문내의 발원지는 멀미이자 벌응절리에선 둔대산으로 불리는 둔대골, 둔대골 위쪽엔 산수약수터이다. 바로 곁에 있는 새재골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은 벌응벌리 서쪽에서 합류한다. 새재골 위쪽에는 부천시에서 관리하는 복숭아단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작은 개울이 있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이 개울이 역곡로로 들어오면서 매립되어 우수관으로 탈바꿈한다. 동쪽에 소탈미를 끼고 역곡고등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역곡중학교 아래에서 뱀골에서 내려온 개울물과 합류한다. 뱀골 입구에는 역곡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뱀골 좌우로 조그만 개울이 만들어져 있어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에 논농사도 짓고 밭농사도 짓고 있다.

이렇게 합류한 용문내 줄기는 역곡상상시장을 거쳐 경인전철을 지나 역곡3동으로 빠져 나갔다. 지금도 이곳은 복개가 되어 개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다만 역곡3동부터 용문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현재는 복개가 되지 않은 지점부터 생태하천으로 거듭 태어나 안양천으로 합류해 간다.

▲ 1976년 지도 역곡에 있던 경기도농사시험장이자 경기도농촌진흥원

역곡의 내력

현재 역곡상상시장이 길게 펼쳐진 곳은 골짜기였다. 역골이다. 한자로는 역곡(驛谷)이라고 한다. 일본어로도 역골(ヨクゴル). 1919년도 지형도에 표기가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역골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한자로 옮겨 쓰면서 역곡(驛谷)이 된 것이다.

소탈미가 역곡 대림아파트, 역곡e편안세상 1,2아파트 단지까지 뻗어 내렸다. 이 소탈미와 멀미에서 뻗어 내려온 감배산 줄기 사이에 넓은 골짜기가 형성된 것이다. 역골.

감배산은 역곡2동에 위치해 있었다. 1976년도 지도를 보면 이 골짜기가 시험장골로 바뀌어 있다. 나중에 경기도 농사시험장이 역곡에 들어섰기 때문에 골짜기 이름까지 바꾸어 버린 것이다. 1911년도에 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도 역곡(驛谷)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골에 마을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을 이름은 역곡. 이어 1919년도 지형도에는 역곡 마을이 표시되어 있다. 우남푸르미아 아파트 일대이다. 번지수로는 역곡1동 202번지 일원이다.

소새에서 서울로 갈 때 신장기(新場基)를 거치고, 사래울을 거친 뒤 돌다리를 건너 역곡을 휘돌아가야 했다. 옛길은 역곡 마을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역곡 위쪽 소탈미 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사래울을 지나는 옛길은 감배산 산허리를 휘감고 돌다가 벌응절리 마을 입구에서 갈라졌다. 한 갈래는 벌응절리 마을을 거쳐 여월, 까치울로 향했다.

다른 갈래길은 소탈미를 휘감고 돌면서 역곡 마을 위쪽을 지나 온수 마을로 향했다. 역곡은 소탈미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온수 마을은 소탈미 동쪽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온수 마을에서 오류 마을까지 휘어진 산굽이를 돌아갔다. 오류 마을에 1899년도에 경인철도가 들어서면서 오류역이 들어섰다.

이 옛길은 지금 조금 남아 있는데 지봉로(芝峰路)이다. 지봉(芝峰)은 부천 벌응절리 태생인 박제환의 아호이다.

역곡의 북쪽으로는 온수 마을이 있던 자리 위쪽으로 영등포 기계공단이 들어서 있고, 동곡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동남쪽에는 역곡중학교가 예전 하천을 메우고 낮은 지대에 들어서있다.

마을 뒤쪽으로는 소탈미 자락인 능안이 펼쳐져 있고, 아래로는 야트막한 소탈미 산자락 늘어서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이곳에 경기도 농사시험장의 사무실과 사택이 들어섰다. 현재의 역곡e편안세상 1단지 아파트 자리이다. 이 아파트 앞길이 지봉로이다.

1976년도 지도를 보면 경기도 농사시험장이 경기도 농촌진흥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대에는 농촌진흥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상주하는 사무실, 사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기도 농사시험장이 생기면서 역곡 마을 주민들은 집단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이들은 역곡3동인 괴안동으로 이주를 한 최초의 부천 이주민이었다.

역골은 조선 시대 역이 있던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역은 오류동 교통안전진흥공단 앞에 있었다. 현재는 오류동 동부제강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서 역골이 아주 가까운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 1919년도 지형도 역곡 일대

경기도 농사시험장 사택

경기도 농사시험장이 일제 강점기 때 역골에 자리를 잡았다. 역골 위쪽인 소탈미 산자락에 사무실 및 사택을 짓고 이곳에서 직원들이 숙식을 하며 벼의 품종 등을 개량하기 위한 연구를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조선총독부는 역곡과 항동에 ‘경기도 종묘장’을 세웠다.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이었다. 이때 전국 13개도에 13개소의 종묘장이 함께 설치되었다. 종묘장에서 생산된 볍씨 등 다양한 종자들을 경기도 각지에 옮겨 심게 되었다. 우리나라 토양이 일제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종자 시험장이 된 것이다.

1920년대 말부터 세계적인 경제 공황이 불어 닥쳤다. 그 여파로 우리나라의 농촌경제는 거의 파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1929년 권업모범장은 농사시험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몇 해가 지난 1932년에는 전국 13개도에 자리하고 있던 종묘장을 농사시험장 산하 도농사시험장으로 개편하였다. 벌응절리, 항동의 경기도 종묘장은 ‘경기도 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었다.

이 경기도 농사시험장에서는 벼·대맥·소맥·대두 등의 원종을 배부했다. 원종은 씨앗이다. 부평수리조합의 지주들도 이 원종을 받아다 소작인들에게 제공했다. 복숭아나 사과 등의 과수와 채소의 종묘도 배부했다. 돼지·토끼·닭 등의 가축도 배부하고, 뿌리 작물의 균도 배부 했다.

경기도 농사시험장에선 작물 재배에 관한 시험 조사도 하고, 과수 및 채소 재배에 관한 시험 조사도 했다. 가축의 사양 관리에 관한 시험 조사도 하고, 토양 비료에 관한 시험 조사도 했다. 중견이나 청년의 양성, 농사 지식의 보급 등에 관한 업무까지 담당하였다.

경기도 농사시험장은 해방 후까지 명칭을 그대로 썼다. 그러다가 1949년 1월 대통령령 제45호에 의거해 ‘경기도 농업기술원’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농촌 진흥 사업이 연구와 교도로 구분되어 이원적인 지도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1957년도에 농사교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률이 공포되어 ‘경기도 농사원’이 개원하였다. 이를 통해 농촌 지도가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연구 사업과 교도 사업이 단일 행정 체계에 총괄되었다. 농업행정과의 이원적 지도 체계를 농사원의 교도 사업으로 일원화하게 되었다. 경기도농사기술원이 경기도농사원으로 개편된 것이다.

1962년에는 농사원, 농림부 지역사회국, 농림부 훈련원, 농림부 제주목장, 중앙전매 연구소의 연초 시험장 등을 통합한 농촌진흥청이 발족되었다. ‘경기도 농촌진흥원’은 도농사원, 도산업국의 지역사회과 및 도의 농사 시험 지도 사업 기능을 통합·흡수하였다.

부천군에는 군수 소속하에 농촌지도소를 발족시켰다. 농촌지도소가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이다. 경기도 농촌진흥원의 산하 기관에는 임목양묘장, 잠종장, 종축장, 가축보건소 등이 포함되었다.

1970년에는 경기도 농촌진흥원에 ‘국’을 신설하여 기존의 서무과, 시험과, 지도과를 시험국, 지도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5개과인 작물과, 식물환경과, 지도과, 기술보급과, 농촌사회과, 서무과로 개편하였다. 조직이 보강된 경기도 농촌진흥원은 1971년에 지역사회개발 및 생활개선, 청소년 담당 등의 업무 부서를 신설하였다.

1978년 역곡에서 지금의 화성 태안으로 터전을 옮겨 1998년 경기도 농업기술원으로 개명했다. 역곡에 자리잡은 사무실, 사택도 폐기되었다. 역곡에 도시개발 바람이 불면서 경기도 농사시험장 사택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기존의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경기도 농업기술원은 선인장과 장미 등 각종 화훼 신품종 개발 등 연구 사업으로 경기농업의 발전을 이끌었고 특히 과거 녹색·백색혁명을 주도한 일선 농촌 지도공무원들은 경기농업의 산증인으로 말하기에 충분하다.  

경기도 농사시험장은 역곡 아래부터 역곡3동, 항동으로 이어지는 넓은 농토를 경작했다. 서울 항동 지역까지 농사시험장이 차지를 했다. 이곳에 많은 농작물을 경작하면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경기도 지역에 있는 학생들이 이곳에 견학을 와서 먹고 자면서 공부를 하곤 했다. 역곡에 있는 사택이 이들의 숙소였다.

<참고자료 : 서울 구로구 향토문화전자대전>

▲ 우남 푸르미아 아파트 단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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