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 뿌리까지 다 뽑아...

부천에서 사래울은 어디에 있을까?

▲ 사래울 마을에 있는 이층집

역곡역 왼쪽은 사래울 마을

역곡역에서 벌응절리 쪽으로 바라보면 왼쪽 지역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곡2동. 일두맨션 아파트 단지, 한때 꽃동네로 불리던 곳에 세워진 역곡역 e편안세상 아파트, 역곡교회 근방의 빌라단지, 삼신아파트 단지를 재개발 한 동부센트레빌 1,2단지 아파트, 역곡2동 주민센터,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등이다. 해발 37m 정도의 높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을은 사래울이다. 아주 낯선 이름이다. 이름은 있지만 사람들이 불러주지 않는다. 자주 불러주지 않으니까 잊혀져간다. 이제는 지도에 표기조차 되지 않는다. 동네 가게에서도 사래울이라는 이름을 써 주지 않는다.

빼꼼공원, 사래울 어린이공원 놀이터가 반겨줄 뿐이다. 역곡2동의 유일한 공원이다. 사래울이라는 마을 이름을 써준 유일한 증거품이기에 소중하다. 아파트, 빌라만 빼꼭하게 차 있는 곳에서 그나마 숨통을 틔워준다.

▲ 사래울 어린이공원, 사래울 표지석

그렇지만 이 빼꼼공원에도 표지석만 있고 왜 사래울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만화 주인공인 빼꼼이 여기까지 점령해 버려 사래울은 전설로나 남아 있다. 역곡2동을 떠올릴 땐 이 빼꼼공원만 생각날지 모른다.  

역곡2동주민센터 홈페이지 소개에는 ‘역곡2동 일대는 사래리(士里)라고 불리기도 했다’라고만 써놓고 있다. 중간에 ‘올 래(來)’라는 한자도 빼먹었다. 이렇게 기록이 부실해서야 ‘어찌 고향사랑, 어찌 부천사랑’이 싹틀 수 있을까? 그저 형식적으로 홈페이지를 만들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래울이라는 제대로 된 소개는 어디에도 없다.

사래울은 동부센트레빌 1단지 아래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역곡2동 어린이집 일대, 해들목 휴먼빌리지 일대이다. 현재도 이곳에는 빌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 그런데 옛골목길이 살아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길 말이다. 이게 사래울 마을 안으로 이어지던 길이다. 70년대 80년대에 지은 이층집이 몇 채 남아 있다. 초가집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이게 이층집 벽돌집으로 바뀐 사래울 마을의 흔적이다. 지봉로 건너편엔 1982년도에 세운 욱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다. 당시 무계획적인 부천시 도시계획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지어진 사래울 마을의 확장 증거이다. 이렇게 사래울 마을은 더 커졌다.

▲ 1976년 사래울 지도

새럴산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을

1976년도 지도(국토지리정보원)를 보면 사래울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시 부천동국교로 표시된 부천동초등학교 근방까지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토현산이라고 불리는 새럴산 산허리에 마을의 터를 잡은 것이다. 네이버 지도, 다음 지도에는 새럴산으로 명기되어 있다. 새럴은 사래울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까 백토현산 보다는 새럴산이 더 많이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럴산에서 백토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 백토현산이다.

백토는 석회라고 부른다. 보통 생석회는 농사용으로 밭이나 논에 뿌렸다. 농약이 없던 시절에 벌레 퇴치용으로 쓴 것이다. 반면에 이 생석회를 고온으로 구운 것은 소석회라고 한다. 주로 한옥 같은 건축용으로 쓴다. 한옥에서 기초 강회다짐, 방바닥 강회다짐, 벽체 미장, 지붕 강회다짐, 기와 마감 등에 쓴다. 이 백토가 새럴산에서 많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백토현산이라고 부른다.

원래 새럴산은 멀미(원미산)의 멀미봉에서 갈라져온 줄기이다. 멀미, 원미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래울에선 새럴산으로 부르고 있다. 사래울에선 하나의 독립된 산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멀미에서 연결된 산으로 인식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새럴산도 잊혀진 산이 되었다. 사래울 사람들이 부르지 않기에 잊혀진 것이다. 역곡2동으로 이사를 온 분들은 새럴산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러기에 사래울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새럴산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모른다고 한다. 아무도 모른다. 단지 네이버 지도, 다음 지도 등에만 올라 있을 뿐이다.

사래울 마을 앞 동남쪽 산언덕에는 6기의 무덤도 있었다. 미골 위쪽이다. 원미골로 불리는 미골이 마을 앞으로 길게 뻗어 내렸다. 미골이란 ‘미’가 산이라는 뜻이기에 ‘산골’이라는 말이다. 사래울 마을 옆인 이곳에는 건물이 들어서 있지 않는 빈터로 있고, 그 옆에는 빌라가 들어서 있다.

벌응절리로 가는 산길 옆에도 5기의 무덤이 있었다. 이 무덤들은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서 지금은 없다. 역곡로 57번길 도로가 크고 넓게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무덤들이 들어앉을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이 사래울이 역곡2동으로 불리고 있다. 사래울동이나 사래동으로 불러도 무방할 터인데, 굳이 역곡2동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래울을 사래동(士來洞)으로 부르기도 했다.

부천시가 시(市)로 승격된 해인 1973년 7월 1일에는 역곡괴안동이었다. 그러다가 1983년 10월 1일에 괴안동이 되었다. 그 뒤 1985년 11월 15일에 역곡2동으로 명명 되었다.

이때 사래울동, 사래동으로 불리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 지나간 일이다.

▲ 1919년 사래울 지형도

사래울 아래엔 황토 들판이 펼쳐져

사래울 동남쪽엔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이야 온통 건물들로 가득차서 어디가 들판인지, 어디가 산언덕인지 분간을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옛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사래울 건너편엔 71.7m 높이의 바우백이라는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우백이는 현재의 괴안동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이 산도 다 허물어져 산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 사이에는 1899년 9월 18일 노량진과 인천 간에 최초로 영업을 개시한 경인철도(京仁鐵道)가 지나갔다. 경인철도와 바우백이 사이에는 경인로(京仁路)가 지나갔다. 경인로는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자동차가 다니던 길이었다. 이 경인로는 새장터 근방에서 전소사구청인 소사어울마당 앞으로 지나갔다. 현재도 그 길의 폭은 넓어졌지만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경인철도, 경인로를 지우개로 지워놓고 보면 아주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혜(天惠)의 야트막한 벌판을 가로 질러 경인철도, 경인로가 개설이 된 것이다.

사래울과 경인철도 사이에도 새장터에서 시작된 연로(聯路)가 있었다. 연로는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가리킨다. 이 연로는 현재의 역곡역을 지나 경인철도를 건너 경인로로 연결되었다.

또 한 가지는 새장터에서 곧장 사래울로 연결된 연로(聯路)가 있었다. 현재의 지봉로(芝峰路)가 아니라 그 아래로 죽 이어졌다. 이 연로 중간에 멀미(원미산)을 넘어 조마루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연결되었다. 이 고갯길은 소로길이었다. 새를고개길. 사래울을 ‘새를, 새럴’로 불렀기에 사래울에서 조마루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라는 뜻이다. 이 고갯길의 시작은 앞에서 설명한 새장터에서 역곡역 근방으로 가는 그 연로(聯路)였다. 이 소로길은 사래울 동남쪽 바깥을 지나 새럴산 동남쪽 산자락을 타고 돌았다. 그래서 미골의 새럴산 자락길을 밟고는 멀미봉을 넘어 갔다

탱자나무 뿌리까지 다 뽑아...

현재는 새를고개길 좌우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북쪽 새를산 자락에는 공원이름을 고향동산이라고 지어놓았다. 고향동산이라니? 어느 고향이라는 말인가. 사래울이 고향인데... 정겹고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사래울은 사라지고 그저 고향이라는 낱말로 뭉뚱그려 놓았다.

▲ 새를고개에 있는 '애향정' 정자

여기에 장승도 새워놓고 애향정이라는 정자도 세워 놓았다. 애향정이라? 고향을 사랑하는 정자? 너무 흔한 작명이다. ‘사래울정, 새를정, 새럴정, 새를고개정’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옳은 것 아닌가. 그저 공원 공사 업자에게 작명까지 맡겨놓은 결과인지 모르겠다.

그저 고향 분위기를 낸다고 그랬는지 황토 흙담을 허술하게 만들어놓았다. 제대로 된 흙담을 만들어 놓으려면 지붕은 기와로 하던지, 이엉을 엮어 놓던지 해야 했다. 하지만 나무만 달랑 올려놓았다.

원래 공원에서 새럴산 산자락을 따라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그래서 봄이면 탱자꽃이 활짝 피어 향기가 진하고, 가을이면 노란 탱자들이 운치 있게 매달려 있었다. 이 탱자나무숲 덕분에 호랑나비떼가 몰려들었다. 호랑나비 애벌레가 탱자나무 잎을 갉아먹는 것을 좋아하기에 떼로 서식을 한 것이었다. 부천동초등학교 아이들이 이곳 공원에서 생태체험을 할 때 호랑나비떼는 정말 소중한 자연이 선물로 주는 축제의 장이었다. 호랑나비를 잡아보려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즐거운 봄소풍이었다.

하얗게 핀 탱자꽃을 꺾어 맛보기도 하고, 가을이면 탱자의 시디신 맛을 보면서 자연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호랑나비떼가 날아오르는 그 자연의 신비를 만끽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탱자나무들이 사라져 버렸다. 고향동산이라는 공원을 관리하는데 볼품이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모조리 뽑아버리고 말았다. 뿌리채... 참으로 무지한 공원 관리의 실태이다.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다. 부천에 탱자나무가 있는 곳은 청소년수련관 근처, 대장마을 건너 마을인 섬말의 개인 담벼락에 겨우 있을 뿐이다.

새를고개길 동남쪽에는 미골에는 게이트볼장, 축구장, 배드민턴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들 체육시설에는 아직 이름이 붙지 않았다. 최소한 새를고개를 살려 새를고개 게이트볼장, 사래울 축구장, 미골 배드민턴장 등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야 고향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위쪽에는 부천시꽃양묘장을 만들어 놓았다.

▲ 새를고개에 있는 '고향동산' 표지석

새마을 취로사업을 하는 한 장의 사진

1973년도 새마을 취로사업을 하는 사진을 보면 이 사를고개길을 넓히는데 사래울 사람들이 동원되어 남자들은 리어카에 황토흙을 실어나르고, 아낙네들은 세수대야에 황토흙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음을 알 수 있다. 사를고개길에 박혀 있는 ‘새마을 취로사업장 부천시’라는 팻말로 미루어 보아 부천시 승격 이후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이때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 이후여서 사래울 마을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마을길을 넓히는 사업인 새마을 운동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래울에선 새를고개길이 아주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새마을 취로사업으로 고갯길을 넓혀 아예 연로(聯路) 정도로 만드는 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1973년도 사진에선 사래울 아래 지역이 한없이 넓은 황토들판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사래울 아래에는 경인제빙 공장을 제외하고 별다른 건물이 없었다. 경인제빙은 당시 부천시 상가 등에 얼음을 제공하는 공장을 만들었다. 70년대에 팥빙수가 유행하기 시작해 얼음의 수요가 많아져 이곳에 얼음공장을 지은 걸로 보인다.

▲ 1970년대 사래울 새마을 취로사업(부천시 제공)

경인제빙에서 사래울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화성공업사(化星工業社)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래울 바로 아래에는 미예사(美藝社)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래울에서 벌응절리로 가는 길목에는 몽고(蒙古)간장 제2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이 몽고간장 공장은 1967년에 벌응절리 앞, 사래울 동북쪽에 제2공장을 신축하였다. 이후 몽고간장은 삼정공단으로 옮겼다.

이렇게 1970년대부터 사래울 아래 지역엔 새장터에서 오는 연로(聯路)를 중심으로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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