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래울의 의미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

사래울의 의미 

▲ 멀미 장대봉에서 바라본 새럴산, 아래에 사래울이 있다.

◆ 사래울의 의미

사래울은 소새에서 오다보면 삼거리 새장터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꺾어지면 만나는 첫동네이다. 하늘 아래 첫동네는 아니다.

사래울은 ‘새를, 새럴’이라고도 부른다. 1976년도 지도에는 사래울 대신 새럴로 표기되어 있다. 보통 새럴로 많이 불려졌다는 얘기다. 새럴은 새럴산에서 온 말이다.

다른 말로는 ‘사래골, 사래동(士來洞), 사하리(沙下里), 사리월(士里月), 사내곡(仕內谷-1766년 청주양씨 족보), 사라일(士羅日-1771년 죽산박씨족보), 사래리(士來里-1879년 죽산박씨족보), 사내일(仕乃日-1780년 필사한 청주양씨가첩)’이라고도 부른다. 참 여러 가지로 부른다.

조선지지자료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1988년도 부천시사, 부천사연구, 부천문화의 재발견 등에서는 ‘죽산박씨 박철정이라는 선비가 광주군 번송에서 와서 정착을 했다’고 소개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사래리(士來里)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뜻은 ‘선비가 온 마을’이다.

그런데 정말 사래리였을까? 이 사래울이라는 마을이 원래 없었다면 박철정 선비가 이주해 왔을 리 만무하다. 마을이 없다면 그곳에 새롭게 집을 지고 가족들을 위해 살림살이를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일은 깊은 산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원래부터 사래울이 있었다. 다만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을 뿐이다. 기록으로 남은 것은 사래리이다.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부천시 대부분의 땅이름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된 마을 이름들은 대부분 한자(漢子)이다. 가끔 이두(吏讀)나 향찰(鄕札)로 기록된 것이 있다. 사래울도 마찬가지다.

사래울이 사래동, 사래리로 기록되면서 그 의미가 다르게 변했다. ‘선비가 온 마을, 즉 양반이 입주한 마을’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땅이름들은 양반 세도가들에 의해 많이 변모되었다. 사래울에서 사래라는 말을 한자로 바꾸어서 ‘사래(士來)’로 고쳐 부른 것에 불과하다. 

▲ 1976년도 사래울 지도(국토지리정보원)

경북 봉화군에 사래이골이 있다. ‘사이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이를 한자로 사래(沙來)로 쓴다. 사래울의 다른 이름인 사하리(沙下里)에서 모래 사를 썼다. 이 모래 사(沙)가 사이라는 말의 새에서 온 것이다. 모새라는 것은 모래의 탯말인 사투리이다. 이 사투리를 한자로 옮기면서 모래 사(沙)로 쓴 것이다. 그래서 사하리는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원래 사래울에서 사래라는 말을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로 ‘감배산과 새럴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사이울, 사리울, 싸리울, 새울도 같은 의미이다. 이런 의미의 땅이름으로 ‘사래골, 사리골’ 등도 있다. 사래울을 사래골로 부르는 것이 그걸 증명해주기도 한다. 사래골도 사래울처럼 한자로 쓰지 않고 우리말로 쓴다.

‘산과 산 사이, 개울과 개울 사이,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다’는 등의 의미로 많은 땅이름이 쓰인다. 사리골, 사리실, 사리울, 싸리골, 싸리울, 쌀울, 사이울, 새울, 새월, 서리울, 사이실, 새실, 사이재, 사잇재, 사이곶, 사잇개, 사이들, 사이목, 사이몰, 사시몰 등이다.

사이골이 사리골, 싸리골로 바뀌었다. 이게 쌀로 바뀌기도 했다. 사이울이 새울, 새월로 바뀌었다. 사이가 새로 바뀐 것이다.

사래울을 사리월(士里月)로 쓴 것이 이것을 증명해 준다. 사리월은 위에 있는 새월과 같다. 그래서 사리(士里)는 사래울의 준말이고, 월(月)은 산(山)의 옛말이다. 그러니까 사리월은 사래울산을 가리킨다. 즉 새럴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새럴산을 사래울산으로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내곡(仕內谷-1766년 청주양씨 족보)는 ‘골 곡(谷)’이 마을을 가리킨다. 중간에 있는 ‘안 내(內)’는 ‘이에 내(乃)’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내(乃)는 개울을 가리키는 이두(吏讀)이다. 사(仕)는 사이를 가리킨다. 뒤에 오는 사내일과 그 뜻이 같다.

사내일(仕乃日-1780년 필사한 청주양씨가첩)은 사래울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선 이두(吏讀)로 썼다. 뒤에 오는 ‘날 일(日)’은 이두로 ‘마을’을 뜻한다. 중간에 있는 ‘이에 내(乃)’는 개울을 가리킨다. 앞의 ‘사’는 사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내일은 ‘개울 사이에 있는 마을’로 읽힌다. ‘뱀골에서 흐르는 개울, 미골에서 흐르는 개울 사이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예전에는 두 골짜기에서 흐르는 개울물이 제법 풍부했기 때문이다. 청주양씨 집안에선 이렇게 사래울을 이두어로 표기한 것이다.

죽산박씨 집안에서 쓴 ‘사라일(士羅日)에서도 뒤에 오는 '날 일(日)'은 마을을 가리킨다. 사라는 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를 사래리(士來里)에선 ‘마을 리(里)’로 썼다.

이렇게 사래울 하나를 놓고도 한자, 이두, 우리말 등이 섞여서 난립해 있다. 하지만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사래울은 ‘감배산과 새럴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 하겠다.

두 번째 해석은 길게 늘어진 고랑 같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남구만의 시조를 보면서 이해해 보자.

 

동창아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남구만, 동창아 밝았느냐>

▲ 사래울 마을에 있는 집

 남구만의 시조에서 보여지듯이 사래가 ‘길게 늘어진 산등성이 아래 밭골인 이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을에서는 쓰여지지 않고 주로 들을 가리킬 때 쓰였다. 마을 이름으로는 많이 쓰지 않았다.  

◆ 금광이 있던 사래울의 새럴산

덧붙여서 사래울은 이 뜻 말고도 쇳마을을 지칭한다. 사래울에서 ‘울’은 마을을 가리키고, ‘사래’는 쇠의 고어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철이나 금이 난 곳을 사래울로 표기를 하고 있다. 사래에서 'ㄹ'이 탈락하여 후대에 쇠가 되었다.

이 해석에서 삼국사기까지 올라간 것은 사래울에서 가까운 곳에 알묏부리라는 땅이름도 있기 때문이다. ‘부리’는 산의 백제어 표현이다. 마한 시기에는 산언덕을 비리(卑離)로 불렀다. 이 비리가 부리(夫里)로 바뀌고 이 부리가 다시 불(火)로 바뀌었다. 제주도의 산굼부리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다.

신라에서는 이 불을 받아 화(火)·벌(伐)·불(佛)·불(弗)로 쓰였다. 이렇게 백제어가 사래울, 벌응절리 지역에 고스란히 살아있기에 삼국사기 정도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토현산인 새럴산 자락에 금광이 있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금을 캤다. 해방 후에도 윤경문이라는 사람이 금을 캤다. 이 금광이 폐광이 된 이후에 흘러나온 시원한 뱀골 개울에서 아이들은 수영을 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사래울은 금을 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원래는 산이름이 먼저 붙고 마을 이름은 나중에 붙인 것으로 보인다.

사하리(沙下里)의 두 번째 해석에서 ‘모래 사(沙)’는 금이나 쇠를 가리키는 말기기도 한다. 여기서는 ‘금이 나는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바로 사래울이다. 그러니까 사하리(沙下里)하고 사래울은 원래 같은 말이다.

새럴산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뱀골이라고 하는데, 그 아래 들을 가리켜 사곡뜰이라고 한다. 뱀골에서 ‘뱀 사(蛇)가 아니라 모래 사(沙)’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본다. ‘사래골, 사래동(士來洞), 사래리(士來里)’는 사래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똑같은 말이다. ‘골, 동, 리’는 ‘울’과 같은 말이다. 고리울, 까치울과 같이 사래울로 쓰였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래울의 다른 이름인 ‘새를, 새럴’에서 ‘새’는 모래 사(沙)이다. 소새를 소사(素砂)로 표기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뒤에 오는 ‘울’이 빠지고 산 이름을 그대로 부른 것이다. 즉, ‘금이 나는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새를산, 새럴산은 ‘금이 나는 산’이라는 뜻이다. 새럴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봉우리는 해발 101.5m이다. 역곡배수지가 있는 곳 위쪽인 동남쪽 봉우리는 101m이다. 사래울은 금이 나는 산 아래 마을 이라는 뜻으로 통일된다. 사래리(士來里)만 그 뜻이 다르다.

고대부터 철이나 금이 난 곳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곳을 신성하게 여겼을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사래울은 ‘금이 나는 산 아래 마을’이라는 의미 보다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더 가깝다.   

전국에서 사래라는 말을 가진 땅이름은 경남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사래골이 있고, 충남 당진군 정미면 사관리 사래골이 있다. 이곳은 사래동, 사락골이라고도 부른다.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수입리 윗갈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충북 충주시 용탄동 사래실 골짜기가 있고, 경북 안동군 예안면 도촌리 평지말 남쪽 골짜기에 있는 사래실 마을이 있다. 이곳은 사래곡이라고도 한다.

▲ 사래울에 있는 부천동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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