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권리가 앞으로도 계속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개, 소, 말이 로봇으로 대체된다면?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의 내용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인류의 과거와 오늘날, 그리고 미래를 훑어보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600여 페이지에 걸친 설명과 질문들은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정답을 주는 책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인 사피엔스에서 나는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는 사람들의 상상이라고 한다. 돈도 상상에 대한 믿음이다. 상상으로 현실의 물건을 거래한다는 것, 되게 재미있지 않은가, 이외에도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많았으나 나는 이것이 가장 흥미로웠다.

사회는 사람들의 집단적 상상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상상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다. 사회는 도대체 어떤 상상이길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까, 우선 사회는 혼자서 하는 상상이 아닌 집단적 믿음에서 기인한 상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유, 혹은 권리 또한 인정해줘야 한다.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대한민국의 다른 국민들의 자유를 인정해 줘야하며, 국제연합과 세계적 통합을 믿는다면 대한민국 사람은 과테말라를 인정해줘야 한다.

여기서 자유는 권리라고 볼 수가 있는데 모두가 공평하게 1을 갖고 있고 그 1들이 모여서 인류사회를 이룬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1이상의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가 보더라도 1이하의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1이상을 가진 사람이 1이하를 가진 사람이 가진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빼앗긴 사람이 사회에서 벗어난다면 갖고 있던 작은 권리마저 사회에 두고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권리라는 개념도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권리를 많이 가진 이들에게 행복할 권리를 빼앗겨서 불행한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관계도 비슷하다. 다른 국가의 권리를 빼앗은 나라가 잘살게 되었다.

사족으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1보다 고작 조금 더 갖고 있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빼앗은 걸까, 빼앗은 것이 맞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조금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한 사람들이 자신이 빼앗은 권리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사회가 유지되었다. 사회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죽는 것이다. 생물학적 죽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잊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몇몇 있겠지만 극소수일 것이고 죽어서 우린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제 그 사회가 바뀌려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권리 혹은 자유를 처음에 1을 갖고 있던 이유는 노동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사회에 제공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력은 개, 소, 말과 같은 단순 노동력을 포함한 개, 소, 말을 부릴 줄 아는 정도의 지능을 가져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저 동물들과 지능이 동급이라면 사회에 편입될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 기술력의 진보로 인해 개, 소, 말이 로봇으로 대체되었다. 인류만이 그 로봇들을 다를 줄 알기에 자유와 권리가 계속 인정되었다. 이제 스스로 행동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그것들은 로봇을 다를 줄 안다. 인류의 권리가 앞으로도 계속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사회는 인류의 상상에서 존재하는데 이제 그 인류가 쫓겨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우리는 사회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사회에서 이제야 해방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공학이 진정한 꽃을 피울 때 인류는 그제서야 모든 태생적 한계를 초월한 신이 되는 것이다.

글 ∥ 상원고 1학년 김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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