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령공양탑의 모형탑을 설치해야 하나?

일제의 수탈 기지,

사래울 경기원잠종제조소

▲ 사래울 경기원잠종제조소(부천시 제공)

 

일제의 수탈의 기지였던

경기원잠종제조소, 잠업시험장

사래울 아래 넓은 들판에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3월 9일에 경기원잠종제조소가 들어섰다. 일제가 쌀뿐만 아니라 누에고치도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시설이었다. 경기도 농사시험장이 역골에 1938년 4월달에 옮겨왔으니까 1년 빨리 세워진 것이다. 벌응절리, 역골, 사래울 사람들은 이 시설을 가리켜 ‘원잠’이라고 불렀다.

원잠종제조소는 일제가 당시 조선의 식민지 농업체계 구축을 위해 설치한 권업모범장의 부속시설이었다. 권업모범장은 농업분야 일제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한 기구였다. 권업모범장은 농사시험, 축산, 잠업, 원예, 목축 등에 관한 조사와 시험을 담당하던 기구였다. 그 산하 시설이 원잠종제조소가 있었다.

이 경기원잠종제조소이자 잠업시험장이었던 건물들은 사래울에서 가까운 역곡2동 75, 76번지인 일두아파트 위쪽 꽃동네 지역이었다. 이 일대에는 잠업시험장을 짓고 그 아래에는 낮은 감배산을 깎아 개간을 해 뽕나무를 심었다. 이 뽕나무에서 생산된 뽕잎으로 잠업장에서 누에를 키웠다. 건물 위쪽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이었고, 감배산에서 시작해서 새럴산으로 이어진 뒤 멀미(원미산) 줄기가 길게 이어졌다.

경기원잠종제조소 건물 아래에는 10만평에 달하는 뽕밭이 조성되었다. 현재의 일두맨션아파트 일대이다. 1976년도 지도를 보면 경기원잠종제조소 아래에 넓게 뽕밭이 조성되어 있음이 표시되어 있다.

감배산 산등성이가 뽕밭으로 일대 변신을 한 것이다. 이 관리는 경기도 농사시험장 직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일제의 강압적인 수탈이 시작된 것이다.

▲ 원잠종제조소에 들어선 꽃동네 골목길

경기원잠종제조소 건물은 여러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1978년 11월 1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기산리 315번지로 이전을 할 때까지 명실공히 경기도내 양잠 가족들에게 누에씨를 공급했다.

그 뒤 1962년 3월엔 경기농촌진흥청 잠업시험장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었다. 1976년도 지도에는 원잠종제조소가 경기도잠종장으로 표기되어 있고, 뽕밭은 잠업시험장(蠶業試驗場)으로 되어 있다. 뽕밭에는 누에를 키우는 잠실 건물이 있었다. 그러기에 벌응절리, 사래울, 역곡에 살던 마을 분들은 원잠종제조소 보다는 잠업시험장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일제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박람회에 비단을 출품한 이래 서구로 비단을 수출했다. 일본 본토에서 생산된 비단 물량이 부족해 우리나라에서도 누에 키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 일환으로 잠업시험장이자 경기원잠종제조소가 생긴 것이다.

이곳 경기원잠종제조소는 누에고치를 생산해 비단을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누에씨를 생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누에나방이 교미해 많은 누에씨인 종자를 생산해서는 빙고에 넣어 저장을 해두었다가 경기도 일대 각 가정집에 분양을 했다. 사래울이나 벌응절리 뿐만아나리 소래나 김포 등지에서도 이 누에를 많이 쳤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전국적으로 밭에는 뽕밭이 조성되었고, 울며 겨자먹기로 누에를 쳐야 했다.

이 경기도 경기원잠종제조소 안에도 조그마한 일제의 신사(神社)가 있어 그곳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참배를 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철저하게 일제에 의해 강요된 누에고치 생산에 경기도 일대 농민들이 시달려야 했다.

▲ 원잠종제조소에 들어선 꽃동네 집

경기원잠종제조소에 있던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

사래울 경기원잠종제조소에 잠령공양탑이 세워져 있었다. 일제에 의해 누에의 혼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낸 탑이었다.

조선시대 있었던 선잠단(先蠶壇)을 폐지하고 우리나라 전국에 걸쳐 일제의 잠령공양탑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민족이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져 온 양잠업을 짓밟기 위한 조치였다. 오천년이 넘게 이어져 온 조선의 누에의 신인 서릉씨(西陵氏)를 부인하고, 일제의 잠령이라는 새로운 누에의 혼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일제의 침략의 본거지인 일제신사(日帝神社)나 다름없는 시설이었다. 부천에도 일제의 신사는 소사면에는 성주산 중턱, 오정면에는 능미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일제신사에서 참배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야 했던 선조들에게 가장 치욕적인 감정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잠령공양탑에서 누에의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다. 당시 원잠종제조소에 근무한 직원들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 매일신보 1926년 11월 25일자 기사

사래울에 세워진 일제의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은 일제강점기 때 강제적으로 누에고치를 수탈했던 상징탑이었다. 이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이 세워지게 된 내력을 적은 매일신보 기사가 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 조선 민중들에게 일제의 정책을 강요하기 위해 순한글로 인쇄했다.

이 매일신보 1926년 11월 25일자엔 잠령공양탑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잠령공양탑은 가로 34cm, 세로 45cm, 높이 300cm로 기록해 놓았다. 비의 전면 중앙엔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좌하단에 ‘고수(皐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인 재등실(齋藤實)의 글씨로 고수(皐水)는 그의 호이다. 조선총독이 직접 글씨를 내려 탑을 조성하도록 독려한 것이다.

탑의 후면에는 탑의 건립일자인 대정십오년(大正十五年)인 1926년 11월 28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설립발기인 총대(設立發起人 總代)인 농학박사(農學博士) 매곡여칠랑(梅谷與七郞)’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탑 설립발기인 대표였던 우메타니 요사부로인 매곡여칠랑(梅谷與七郞)은 당시 경기도 원잠종제조소의 소장이었다.

그러니까 경기원잠종제조소 현장 책임자를 탑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잠령공양탑은 인간에 의해 명을 다하지 못한 누에고치의 영혼을 달래고, 양잠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백성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쥐어짜면서 누에의 영혼을 달래는 이 사치스런 탑 건립에 정성을 다 바친 것이다. 이렇게 잠령공양탑을 건립하면서도 조선총독부의 돈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지역의 지주들에게서 각출한 비용으로 세웠다. 조선인의 자발적인 건립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매일신보는 ‘청량리에 잠령공양탑 건립’이라고 타이틀을 단 뒤에 ‘근년에 양잠업이 매우 발달됨에 따라 조선내의 제사가(製絲家)에서 소비되는 고치가 1년에 4백만석이나 되는데, 금번 양잠과 제사에 관계하는 유지가 시외 청량리 경기도원잠종제조소 안에 누에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탑을 세우고 오늘 28일 오전 11시에 공양제를 거행한다더라’라고 실었다.  

▲ 인천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잠령공양탑

원래 경기원잠종제조소는 1916년 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리에 설치했다. 그것을 1916년 12월에 경기도 용두동으로 옮긴 것이다. 이 용두동은 현재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다. 1926년 11월 경기도 원잠종제조소 구내에 잠령공양탑이 건립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동적전(東籍田)이 있던 자리였다. 동적전은 조선시대 국가 제사인 종묘 등에서 제사에 사용할 곡식을 재배했던 국가 직영전이 있던 자리였다. 조선시대 왕실의 제사에 곡식을 제공하던 신성한 장소를 택해 일제의 잠령을 위로하는 탑을 세운 것이다. 참으로 철저하게 조선의 혼을 깔아뭉개는 일제의 전략으로 진행된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1909년 4월 5일에 동적전에서 밭을 갈았다. 순종은 직접 밭을 갈고 농사를 권장하는 친경식(親耕式)을 위해서 동적전을 찾은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농사를 중시 여기는 임금의 뜻을 농부들에게 알리고 백성들의 고통을 달래주기 위함이었다. 1884년 고종 31년 이래 오랫동안 행하지 않았던 행사였다. 순종은 이날 오전 10시 돈화문을 지나 선농단 남단의 동적전(東籍田)으로 가서 두 마리 소가 끄는 쌍우(雙牛)에 멍에를 씌운 뒤 연장을 직접 잡고 밭을 갈았다.

이곳 동적전(東籍田)에서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이 10년 정도 세워져 있다가 1939년 4월 사래울로 옮겨졌다. 경기원잠종제조소를 옮기면서 잠령공양탑도 함께 옮긴 것이다.

경기도 농사시험장은 해방 후 1962년 경기도 농촌진흥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978년도 경기도 화성시로 이전하였다. 이때 잠령공양탑은 부천시 역곡동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뒤 경기원잠종제조소 건물이 있던 자리에 꽃동네 건물이 들어서고 사래울 일대가 도시개발이 진행되면서 사라졌다.  

인천광역시 서구 가정동의 음식점 주인인 강흥원은 1986년 아는 이로부터 이 잠령공양탑을 전해 받았다. 이후 10년 넘게 음식점 안에 탑을 세워 놓았다. 탑이 제법 커서 음식점 담을 넘어 멀리서도 눈에 잘 띠었다. 잠령공양탑에 새겨진 한자 중 ‘신령 령(靈)’이라는 글자가 귀신을 뜻한다며 사람들이 발길을 끊었다. 탑이 불길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1986년 3월 강흥원은 이 탑을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잠령공양탑은 인천시립박물관 야외 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다른 일제의 탑들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수탈의 증거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경기원잠종제조소가 사래울에서 사라지면서 잠령공양탑은 누군가에 의해서 반출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리저리 떠돌던 끝에 인천시립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어찌되었건 일제강점기 동안 사래울 농민들뿐만 아니라 경기도 농민들의 뼈를 부술 정도로 수탈을 강행했던 그 아픈 증거인 셈이다.

일제가 당시 농업을 중시하던 농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잠업을 장려하고 그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바로 이 ‘잠령공양탑’이다. 전국 각도에 설립되었다. 당시 농민들은 이 잠령공양탑 앞에서 제사를 지내야만 했다. 치욕적인 역사였다.

▲ 원잠종제조소에 들어선 이편한세상 아파트 단지

잠령공양탑의 모형탑을 설치해야 하나?

부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양경직 위원은 5만부 발행에다 부천시 홈페이지에 게시되는 복사골부천의 ‘재미있는 부천이야기 46’를 통해 “부천 역사에 중요한 자리매김을 했던 잠업시험장에 대해서 역곡동 마을 분들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푯말을 세우거나 잠령공양탑 모형탑이라도 세우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양경직 위원이 이 잠령기념탑을 복원해 모형을 세우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도대체 ‘중요한 자리매김’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가? 무엇을 위해 모형물을 세우자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제 수탈의 흔적으로 잠령공양탑이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전국 곳곳에도 모형탑들을 세워야 할까? 일제의 수탈을 어찌 중요한 자리매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보 양보해서 일제의 침략상을 세세하게 기록해서 이를 알리기 위해 안내판 정도를 세우자는 것이라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잠령공양탑의 모형물 설치 주장은 과할뿐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아주 위험하고 불순한 주장이다. 전적으로 부천시 예산을 쓰는 부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양경직 연구위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부천시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의무가 있다.

▲ 부천시에서 발행한 '복사골부천'에 실린 잠령공양탑 관련 기사
▲ 1976년도 지도, 경기도잠종장으로 표기되어 있다.

 

 

 

재배포를 환영합니다. 사진 및 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저자에게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