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하천이 맞나?

돌내(石川), 큰내(洪川)로 불러야할 심곡천(深谷川)

생태하천이 맞나?

▲ 1982년 새마을 사업으로 돌내, 큰내 하천 정비를 하는 주민들(부천시 제공)

 ◆ 심곡천이 맞나?

심곡 복개천으로 불리던 돌내(石川), 큰내(洪川)가 생태하천으로 거듭난다. 올 사월이면 완공이 된다. 이에 한겨울에도 자연하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심곡1,2동을 관통하는 ‘심곡천(深谷川) 생태하천 복원’이라고 한다. 소명여고 앞 사거리에서 원미보건소 앞까지 950m로 채 1km가 안 된다. 생태하천 아래로 산책길까지 조성되고 있다. 서울 청계천 복원처럼 복원해 생태하천으로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취지로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먼저, 이 심곡천이라는 용어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 지 궁금하다. 예전에도 심곡천이라고 했을까?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까?

심곡천이라는 하천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행정 편의적으로 창작해서 붙여진 것이다. 1972년도에 그려진 부천의 하천표에 심곡천이 표기되어 있다. 당시엔 심곡리에 속해 있었다. 이 하천표에는 부천내 하천이름들이 명기되어 있는데, 그저 마을 이름에다 ‘내 천(川)’ 자를 붙인 것이다.

심곡천 상류엔 소새 마을을 거쳐 온다고 해서 소사천이라고 했고, 중류에는 장말인 중리천, 구지말인 구지천, 사래이인 상리천이라고 했다. 심곡천 하류에서 합류한 개울은 표절천이라고 했다. 표절리인 겉저리에서 흘러내려온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베르내엔 여월의 다른 표기인 새월천, 새말의 한자어인 신촌천, 안골인 안굴천, 새경굴 골짜기에서 흘러온다고 해서 세경굴천, 멧마루인 원종 마을을 큰마을이라고 해서 붙인 큰말천으로 나뉘었다.

고리울내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새텃말인 새텃말천, 고리울에 새로 생긴 마을인 새말 앞을 지난다고 해서 새말천, 대장마을 앞을 지난다고 해서 대장천으로 나뉘었다.

심곡(深谷)은 깊은구지의 한자어이다. 큰내가 깊은구지 앞을 지난다고 해서 붙여진 것은 아니다. 1973년도에 부천시로 승격하면서 심곡리가 심곡1,2동으로 분동되었다. 이 심곡1,2동은 깊은구지에서 아주 멀다.

 

◆ 현재 돌내, 큰내의 모습

심곡천 생태하천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을 둘러본다. 애초 양켠 인도(人道)에 심어져 있던 메타쉐쿼이아가 하나도 남김없이 베어졌다. 무려 사십년이 넘게 부천의 생태를 지켜온 산증인이었다. 그 대신 생태하천 둑 양켠에 이팝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물론 이팝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하얀 꽃들을 피어내면 그것도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를 잡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콘크리트 화분이 보기 싫었는지 석편을 타일 붙이듯 엉성하게 붙여 놓았다. 별로 미적(美的)이지 않다.

양켠 인도(人道)에 이팝나무를 심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아니면, 가로수를 심지 않고 그대로 놔둘지도 모를 일이다. 생태하천 조감도를 보면 인도 양켠에 무성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이걸로 봐서 이팝나무를 식재할 것으로 보이지만...

생태하천 양켠 도로는 현저하게 좁아져 아침저녁으로 교통체증은 무시무시하다. 짧은 구간인데 다리가 놓여진 구간에는 연이은 신호등이 달려 있다. 이 신호등들로 인해 차량의 꼬리물기는 길게 이어지고 있다.

물론 부천역에서 역곡으로 가는 길이 있다. 하지만 여기도 교통체증이 심하긴 마찬가지다. 이쪽에 차들이 더 몰려 교통지옥은 더 심하다. 생태하천 하나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어서 부천시민들이 감내해야할 불편이기도 하다.

80년 빈도로 내리는 홍수에 안전하게 설계했다는 생태하천이다. 이를 믿을 수밖에 없다. 작년에는 범람하지는 않았고 아슬아슬하게 하천 위까지 물이 차올랐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홍수에 안전할까? 안전하지 못하다면 생태하천 일대에 홍수로 난리가 나 범람이 일상화가 된다는 하다는 말이다. 올해 생태하천이 완공된 뒤 두고 볼 일이다.

돌내, 큰내 생태하천의 석축은 수직에 가깝다. 자칫 잘못했다가 넘어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여기에 큰 돌들을 붙여놓아 홍수가 심할 때는 이 돌들이 허물어져 내릴 확률도 있다. 이럴 때는 이 돌들이 물길을 막고 홍수가 심해지지 않을까? 물론 돌들은 아주 단단하게 붙어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홍수가 심해도 끄떡없이 붙어 있을 것이다. 이같은 걱정이 기우였으면 좋겠다.

생태하천 하부엔 수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 깊이는 산책로에서 겨우 30Cm 정도다. 그 물길도 넓지가 않다. 아마도 엄청난 관리비를 들여 끌어온 물줄기가 이곳을 통과할 것이다. 부천시민들이 천천히 산책하면서 생태하천을 즐길 수 있을까? 의문이다.

 

◆ 심곡천은 돌내(石川)이다.

돌내는 ‘산자락을 돌아 흐르는 내’라는 뜻이다. 심곡천은 돌내인 석천(石川)이다. 이 돌내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써 왔다.

돌은 ‘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부천에선 한자로 쓰면서 ‘돌 석(石)’자를 썼다. 전국에는 아주 많은 돌내가 있다. 마을 앞으로 돌아가는 내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돌마을인 석촌(石村)도 있다. 한자로 ‘길 도(道)’를 쓰기도 하고, ‘돌 회(回)’를 쓰기도 했다. 전국에서 돌내의 의미로 쓴 것은 ‘도내, 도르내, 도래, 도래울, 돌여울’이 있다. 한자로는 도천(道川), 도계(道溪), 회천(回川), 석천(石川), 석탄(石灘)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석천(石川)을 해석하면서 ‘돌이 많아 중동들판이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는 엉터리 해석을 하기도 한다. 돌내는 중동들판을 길게 휘돌아가며 넉넉하게 물을 공급하던 하천이었다. 물론 엄청난 홍수 때는 중동들판이 바다처럼 잠겨 버렸지만... 지금이야 중동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우수관(雨水管)으로 덮여 있고 돌내의 끝은 굴포천하고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 여지도서(1760년 영조 36년)에 보면 부평부 석천면(石川面)은 중리, 상리, 심곡리를 포함했다. 보통 마을을 중심으로 해서 면을 정했지만 석천면은 그렇지가 않다. 하천을 중심으로 면을 정한 것이다. 중리 아래엔 혜기제언(鞋機堤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혜기제언은 돌내가 굴포천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조성된 저수지였다. 하지만 여지도서가 그려진 당시에는 혜기제언은 말라붙어 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유명무실했다는 얘기다.

대동여지도(1861년)에는 석천면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경기지 부평지도(1842년~1843년)에는 석천면이 표기되어 있다. 이때 혜기방축도 표기되어 있다. 제언이 방축으로 바뀌었다.

해동지도의 부평지도(1750년~1751년)에는 돌내인 석천(石川)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 돌내는 할미산인 대산에서 시작되었음을 정확하게 표기해주고 있다. 당연히 석천면도 표기되어 있다.

경기읍지 부평지도(1871년)에도 석천면이 표기되어 있고, 혜기방축도 표기되어 있다. 이때 돌내인 석천이 대산인 할미산과 성주산인 향안산 사이로 흐르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호구를 조사해서 정리했던 호구총수(1789년), 부평부읍지(1871년), 부평군읍지(1899년), 한국호구표(1907년)에도 석천면으로 표기했다.

1911년도 조선지지자료에는 석천면에 상리, 심곡리, 중리, 구지리를 포함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으로 옥산면, 석천면, 수탄면을 합쳐 계남면(桂南面)으로 했다. 이때부터 석천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1931년 4월 1일에 계남면이 소사면으로 개칭했다. 1941년 10월 1일에는 소사면이 소사읍으로 승격했다. 소사읍엔 심곡리, 중리, 상리, 구지리, 괴안리, 범박리, 조종리, 표절리를 포함했다.

이때 오정면엔 원종리, 고강리, 작리, 여월리, 내리, 삼정리, 오정리, 대장리, 도당리, 약대리가 포함되었다. 1973년 7월 1일 부천군이 폐지되고 부천시로 승격하면서 심곡리는 심곡1,2동으로 분동되었다. 상리와 구지리는 송내, 상동으로 분동되었다.

깊은구지인 심곡(深谷) 마을이 심곡본동, 심곡본1동, 심곡1동, 심곡2동, 심곡3동으로 분할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지역에 있던 깊은구지, 진말, 벌말 마을 이름은 사라져 버렸다.

 

◆ 심곡천은 큰내이다.

큰내인 홍천(洪川)이다. 진말, 벌말, 깊은구지, 소새 사람들은 큰내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홍천(洪川)이라고 했다. 강원도 홍천군의 홍천강과 그 뜻이 같다. 여기선 강이 아니라 ‘아주 큰 내’라는 뜻이다.

1976년도 지도를 보면 깊은구지(深谷)에서 진말을 거치고 새마을을 거친 뒤 큰내를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를 홍천교(洪川橋)라고 했다. 이때에는 큰내 두 양켠으로 집들이 들어서 있지 않았다. 1980년대에 찍힌 큰내의 사진을 보면 제법 폭이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에는 큰내 양켠 둑으로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둑에는 수양버드나무도 있고 멀리 포플러도 심어져 있었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하천을 넓히고 둑을 높이는 작업을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새마을 깃발을 꽂아 놓고 플라스틱 다라이나 세면대 등을 들고 나와 큰내에서 퍼올린 흙을 둑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새마을 모자를 쓰거나 수건을 둘러 쓴 마을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다라이에 담은 흙을 건네고 건네는 식으로 날랐다.

1976년도 지도에 보면 부천역에서 부천북국교로 가는 길에도 다리가 있었다. 소북교(素北橋). ‘소사읍의 북쪽에 위치한 다리’라는 뜻이다. 이 길은 부천북국교를 지나고 조마루(朝宗里)로 연결되었다.

소명여중 앞에는 부천교(富川橋)가 있었다. 부천역, 경인국도에서 사우촌으로 가는 길에 놓여진 다리였다. 사우촌을 지나면 주공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돌내, 큰내는 복개가 되지 않았다. 1986년 돌내, 큰내가 가로질러 흘러내린 경인전철의 쌍굴다리에서 부천소방서에 이르는 곳까지 복개가 되었다. 하천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고 상부에 슬래브를 덮는 복개 공사를 한 것이다. 이 슬래브를 걷어내고 생태하천으로 복원을 한 것이다. 이 생태하천 바로 옆에는 오수관을 만들어 오수(汚水)가 대장하수종말처리장으로 흘러가도록 했다.

돌내, 큰내가 흘러가던 중동 신도시 지역은 건설 당시인 1990년대 초 박스형 우수관을 건설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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