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부천이야기 46

돌내는 부천의 뿌리인 소새마을에서 흘러내려...

 

글 |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1980년대 초 돌내
 

◆ 돌내의 발원지는 할미산의 구부골

돌내의 발원지는 할미산의 구부골이다. 돌내, 큰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는 돌내로 통일한다. 한자로도 석천(石川), 홍천(洪川)으로 부르지만 순우리말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에서 돌내로 한다. 돌내 생태하천!

거리상으로 제일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발원지라고 했다. 하지만 현재 이 구부골이라는 골짜기는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돌내의 발원지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야 할지 모르겠다. 돌내는 이 할미산의 구부골에서 굴포천까지 연결된 하천이다.

할미산은 부천에서 제법 큰 산이다. 그래서 그 이름도 큰 산이라는 뜻의 할미이다. 이 할미에서 뒤에 ‘뫼 산(山)’이 달라붙었다. 할미의 뒤에 있는 ‘미’는 산의 순 우리말이다. 할미는 한미이다. 한은 ‘크다’는 의미이다. 할미산은 ‘큰산산’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역전앞처럼 쓴 것이다. 그냥 ‘할미’로 쓰는 게 맞아 보인다.

한자로 쓰면 대산(大山)이다. 조선시대 여러 지도에선 이 대산으로 표기해 놓고 있다. 이 할미산은 범박동 일대에 길고도 큰 산등성이 줄기를 뻗어 내렸다. 이 할미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긴다. 여기서는 할미산의 골짜기인 구부골만 설명한다.

그 줄기에 구부골이 있었다. 지금은 할미산 꼭대기까지 아파트, 빌라, 단독주택으로 꽉 차 있다. 언제 큰 산이 있었는지 분간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게 부천시의 도시 발전이라면 할 말이 없게 만든다. 부천의 인구는 매년 줄어든다. 그 줄어든 인구를 채우려고 여기 저기 아파트 단지,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줄어드는 인구를 채워가기는 벅차 보인다. 인구 100만명을 향해 줄달음을 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구부골은 할미산의 소새쪽 골짜기이다. 소새하고 맞닿아 있는 골짜기이다. 소새는 윗소새, 아랫소새로 나뉜다. 현재는 소사본동 지역이다. 돌내라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할미산과 연결되어 있다. 예전에는 산등성이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주택들로 연결되어 있다.

구부골은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는 악박곡(岳薄谷)으로 표기해 놓고 있다. ‘큰산에 넓게 퍼져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큰 산악(岳)’은 설악산(雪嶽山), 관악산(冠岳山) 같은 곳에 많이 쓰였다. 큰산은 당연히 할미산을 지칭한다. 구부골은 ‘골짜기가 구불구불하게 흘러가는 모양’을 보고 땅이름을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구부골에서 흘러나오던 개울물은 소사3동 소사주공 아파트 1단지로 내려오면서 수량이 불어났다. 예전에는 이 일대가 논들로 가득했다. 계단논도 형성되어 있었다. 할미산에서 흘러내려온 물로 농사를 지었다. 집이라고는 단 한 채도 없없다. 그런 것이 이제는 논은 한 마지기도 없고 집들만 우글우글하다.

▲ 1980년 돌내 모습

◆ 구부골을 뙈기골이라고도 해

1976년도 지도에는 이 구부골이 뙈기골로 표기되어 있다. ‘뙈기’라는 말은 밭이나 논의 크기가 아니라 구역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한뙈기 밭이라고 하면 밭이 하나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의미상으로 아주 작은 밭을 가리키기도 한다.

면적을 나타낼 때는 마지기라고 한다. 한 마지기는 볍씨 1말을 심을 수 있는 넓이를 가리킨다. 지역별로 천차만별이다. 논의 경우 한 마지기가 80평·100평·120평·130평·150평·160평·180평·200평·220평·230평·250평·300평 등으로 나뉜다. 이 중 200평을 한 마지기로 적용하는 지역이 전국에서 대략 75% 가량으로 제일 많다.

밭의 마지기당 평수는 전국적으로 30평·40평·50평·60평·70평·75평·80평·100평·120평·150평·200평·230평·250평·300평·400평 등 15개 유형이 있다. 이만큼 다양하다는 얘기다.

경기도에선 주로 200평으로 쓴다. 그렇지만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마을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논에서 수확하는 벼의 양을 가지고 따지기도 했다.

뙈기의 다른 뜻은 ‘태’를 가리킨다. 태는 짚이나 삼 같은 것으로 몸뚱이는 굵고 머리와 꼬리는 가늘고 부드럽게 꼬아서 만든 새를 쫓는 연장이다. 긴 채찍을 닮았는데 이를 들고 후려치면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면 새들이 논에서 벼를 쪼다가 위험을 느껴 후다닥 날아올라 다른 곳으로 도망을 쳤다. 그 태를 뙈기라고 한다. 이 뙈기는 구부골의 구불구불한 표현하고 닮았다. 구부골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도 지형도를 보면 할미가 노고산(老姑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그 높이는 해발 158m였다. 구부골 골짜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지형도를 보면 비만 오면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우열(雨裂)로 표기해 놓고 있다. 우열(雨裂)은 빗물의 침식 작용으로 생기는 작은 골짜기 지형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굴수구(掘水溝)라고 한다. 할미산이 바위산이 아니라 자꾸 무너져 내린 흙산이었음을 알려 준다. 자주 산사태가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산사태로 인해 논들이 무너지고 밭들이 흙탕물로 인해자주 엉망진창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구부골에서 시작된 들판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 들판은 압들(前坪)이라고 불렀다. 압들은 아랫소새, 웃소새 마을 앞에 펼쳐져 있던 들판을 가리킨다. 이 들판에선 소새 사람들이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쌀이 생산되었다. 1919년도 지형도에 보더라도 이곳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소새는 1,000년 넘게 부천의 마을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소새라는 이름으로... 소새에서 1,000년된 은행나무가 그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 부천의 뿌리이다. 그 부천의 뿌리를 키우며 줄기차게 흘러내린 것이 바로 돌내이다. 그 세월이 무려 1,000년이 넘고 10,000년이 넘었다.

▲ 1970년대 성주산에서 바라본 중앙로

◆ 봉배약수터 물도 합류

할미산 서쪽 옆 산인 봉배산의 골짜기도 이 구부골에 합류한다. 부천한울빛도서관이 있는 산이 바로 봉배산이다. 이 봉배산 위쪽으로 올라가면 봉배약수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약수터에서 흘러나온 물이 돌내에 합류했다. 이곳은 그리 크지 않은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도 여러 건물들도 도배가 되고 있다. 이 봉배산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마도 할미산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염려된다. 아니면 산 전체가 통째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봉배산 서쪽엔 한미농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은 한미농원이 사라지고 그 곳에 밭들이 조성되어 있다. 이 한미농원이 있던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봉배약수터에서 내려온 물하고 합류했다. 당연히 구부골 개울물하고 합쳐져 제법 풍족한 개울로 변모했다.

그 아래에선 성주산 뒤골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합류했다. 뒤골은 소라아파트, 진영정보공업고등학교가 있는 골짜기이다. 그 위쪽 골짜기를 허물어 운동장을 만들어 놓았다.

부천은 이렇게 골짜기들을 허물어 공공시설을 짓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부천에 있는 골짜기의 대부분이 이런 시설들이 점령하고 있다. 골짜기는 자연 그대로 둘 때 가장 빛이 난다. 그런데 자꾸 체육시설 같은 것을 지어놓아 골짜기를 버려 놓고 있다. 이렇게 해서 부천이 녹지율은 13.4%(2016년 말)까지 추락해 있다. 앞으로 더 추락할 것이다. 그게 걱정이다. 녹지율이 10% 이하로 떨어지면 그게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인지... 뒤골 위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성주산 능성에다 밭을 조성해 놓고 여러 작물을 심고 있다. 이 골짜기에선 지금도 맑은 물이 흘러내려오고 있다. 여름 장마철엔 제법 많은 물이 흘러 내려온다.

아래소새 은행나무가 있는 곳이 골짜기였다. 서울신학대학교가 있는 곳이다. 부천에 있으면서 서울신학대학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서울신학대학교는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다시 개교하여 '서울신학교'로 개칭했다. 1959년 '서울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초대학장에 이명직이 취임하였다. 1974년 현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1992년 '서울신학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이곳에 작은 골짜기가 있어서 개울물이 흘렀다. 소새 은행나무 아래로 펼쳐진 골짜기를 배경으로 그네를 타기도 했다. 은행나무에 그네를 매서...

할미산 연아봉 샛골에서 흘러나온 물도 돌내에 자연스레 합류가 된다. 이렇게 모아진 물이 소사역 쌍굴다리를 지나 조마루 복개천으로 흘러들었다. 이 조마루 복개천이 심곡 복개천으로 이어져 돌내 생태하천으로 변모하고 있다.

멀미(원미산) 절골에서 흘러내려온 물도 돌내로 합류했다. 절골은 석왕사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1976년도 지도를 보면 이 절골 근방에는 천군사(天君寺) 절만 있었다. 당시에는 석왕사가 자리를 잡지 못한 걸로 나와 있다. 천군사 아래에 숭덕암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숭덕암이 석왕사로 바뀌었다. 천군사 아래에는 절동네가 있었다. 이 절동네를 가로 질러 절골의 개울물이 흘러내렸다.

▲ 돌내의 한 골짜기인 한미농원 옛사진

◆ 성주산 든전물 골짜기 물도 합류해

돌내엔 성주산 든전물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합류했다. 든전물을 부천극동아파트, 펄벅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이 든전물 골짜기 물이 깊은구지 마을 앞으로 구불구불 돌아서 자유시장 아래로 흘렀다. 그 물이 옛중앙로인 부천로(富川路)로 흘러내려 합류했다.

돌내의 물이 풍부해져서 벌말 앞으로 흘렀다. 이때 멀미의 뒤골에서 흘러내린 개울물하고 합류했다. 부천원미공원, 부천시립도서관, 현충탑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성주산의 뒤골하고 그 뜻이 같다. 그곳에서도 개울물이 흘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뒤골에 둠벙이라고 하는 저수지가 있어 골짜기 아래에 펼쳐진 논들에 물을 댔다. 그 위치는 부일초등학교 위 공영주차장이다. 그 아래 부일초등학교 교문 근처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조마루 사람들이 빨래감을 들고 와 너도나도 빨래를 하던 곳이었다. 이렇게 빨래 빨던 물도 돌내의 하류로 합류했다.

돌내엔 마지막으로 멀미 가재골에서 출발한 개울물하고, 장자봉산의 장자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져 흐른 개울물이 겉저리(춘의마을)를 거쳐 돌내로 합류했다. 중간에 매봉재 풍무골에서 흘러내려온 개울물이 합쳐졌다.

이렇게 크고 작은 골짜기 물이 합쳐진 돌내는 제법 많은 수량을 뽐내며 굴포천으로 흘러들었다. 이 돌내는 여름 장마철에 수해가 지면 하천 일대가 마치 바다처럼 드넓게 물들로 가득 찼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만 왔다하면 수해 걱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건 여러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들 때문이었다.

 

 
▲ 돌내 발원지 구부굴, 뙈기골(1976년도 지도)
▲ 1919년도 지형도에 표시된 돌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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