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에 맞아 죽은 할아버지 느티나무도 있어

깊은구지엔 아이들 불장난에 타 죽고,

벼락에 맞아 죽은 할아버지 느티나무도 있어

 

▲ 1960년대 깊은구지 주변 지도(최영철 제공)

◆ ‘깊은구지, 기픈구지’로 부르면 좋겠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않으니 시내를 이루고 바다로 가나니

용비어천가 제2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세종 대왕 당시에는 ‘깊은’에 대한 표기가 ‘기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깊은구지는 성주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심곡본동으로 불린다. 아마도 마을이 처음 들어섰을 때는 ‘기픈곶이’였을 것이다. 이게 표준어로 옮겨 쓰다 보니 기픈고지에서 깊은고지로 바뀌고, 이게 깊은구지’로 바뀐 것이다. 표준어로 자리잡기 전인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때에는 ‘기픈고지, 기픈구지’였을 것이다. 그 이후 60년대, 70년대 부터는 깊은구지로 표기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픈구지로 불렀지만 이를 표기하면서 깊은구지가 된 것이다. 그럼, 깊은구지로 쓸까? 아니면 기픈구지로 쓸까? 옛어원을 살린다면 기픈구지가 더 좋아 보인다.

한자로는 심곡(深谷)이라 한다. 이를 우리말로 표기하면 ‘깊은골, 깊은굴’이다. 그런데 골짜기는 ‘고지, 구지’로 부르지 않는다. ‘고지, 구지’는 곶(串)으로 산이나 바다나 강쪽으로 툭 튀어나온 곳을 가리킨다. 부천에선 송내역 근방에 있던 마을인 구지말, 약대의 꽂구지 등이 있다. 꽂을 가리킬 때도 곶으로 쓰였다. 위의 용비어천가에서도 꽂을 곶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래서 한자로 옮기면서 ‘꽃 화(華)’로도 쓴 것이다. 깊은구지에서 시흥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하우고개를 한자로 표현했는데 화오현(華梧峴)이다. 여기 ‘꽃 화(華)’도 곶(串)에서 기인했다.

이 구지는 ‘골 곡(谷)’하고는 반대 개념이다. 작은마니골 골짜기는 성주산 쪽으로 깊게 파 들어간 것이지만 깊은구지는 성주산이 툭 튀어나온 곳을 가리킨다.

1919년 지형도를 보면 깊은구지 마을의 위치가 성주산 자락이 길게 툭 튀어나온 곳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정명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곳까지 마을집들이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성주산 산자락 바로 아래에는 겨우 한 두채의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깊은구지는 깡시장이라고 불리는 곳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 소사경찰서가 위치해 있는 산언덕이 마을 뒤로 위치해 있다. 지금도 소사경찰서가 있는 곳은 언덕빼기이다.

깊은구지 마을이 위치해 있는 곳의 골짜기 이름은 심곡(深谷)이 아니라 마니골이다. 인천 남동구에 있는 성주산의 마니골하고 그 이름이 같다. 인천의 마니골은 골짜기가 크다. 깊은구지 마니골은 작다. 그래서 작은마니골이다. 작은마리골로 표기하고 있다. 마니골이 마리골이니까...

만약에 깊은구지가 이 마니골에 위치해 있어서 생긴 마을이라면 마니골로 표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은구지가 마니골 끝 부분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성주산 산자락이 길게 튀어나온 곳이 있어서 이름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깊은구지처럼 구지를 ‘골 곡(谷)’으로 표기한 예를 부천하고 이웃인 시흥 관곡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곡지(官谷池)가 있는 마을을 ‘베실구지, 벼슬구지’라고 한다. 한자로는 직곶(織串)이다. 베실구지에서 구지가 곶(串)이었음을 명확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깊은구지도 이와 마찬가지로 심곡(深谷)이 아니라 ‘심곶(深串)’이라야 옳은 표기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부터 심곡(深谷)으로 표기해 왜곡이 되었다.

여기서 ‘깊다’는 뜻은 골짜기가 깊은 것이 아니라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음 나타내준다. 아주 오래된 고목이 세 그루나 있고, 소나무들도 많아서 숲이 아주 무성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도 지형도에도 깊은구지 마을 뒤쪽 산자락에 소나무 같은 침엽수가 많았음을 표기해 놓고 있다. 이후 복숭아밭이 대단지로 조성이 되었다. 아주 무성한 숲을 파내서 과수원을 만든 것이다. 반면 전국에 있는 심곡(深谷)은 대부분 깊은골짜기를 가리킨다.

 

▲ 깊은구지 마을에 있던 1520년 경에 심어 495세 정도 된 손자 느티나무

◆ 깊은구지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 세 그루

깊은구지 정확한 위치는 정명고등학교 아래에 있는 심곡 604번지에서 624번지까지 그 일대이다. 경인로 194번길, 성주로 176번길에 해당한다. 이 길이 옛길이다. 그 위쪽에 큰 길은 심곡로(深谷路)이다. 사실 깊은구지 마을을 이어준 길은 성주로이다. 이 성주로에서 진말을 거쳐 겉저리로 갔다.

깊은구지 마을엔 해방후를 기준으로 5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50여가구 였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지형도를 보면 경인선(京仁線)의 소사역이 있는 곳에 몇 채의 집이 있었다. 소사역이 생기면서 새롭게 들어선 집들임을 알 수 있다. 깊은구지 마을 하고는 별개의 집들이 들어선 것이다. 이곳에 1905년에 설립된 소사우편취급소가 위치해 있었다. 소사우편취급소는 일제강점기 동안 그대로 유지되다가 1950년에 소사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그 뒤 1977년 부천우체국로 개국되었다. 그리고 1996년 부천중동우체국으로 분리되어 개국되었다.

  깊은 구지에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다. 이 중에서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살아남아 푸른 잎사귀를 자랑하고 있다.

보통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 손자나무라고 불렀다. 이중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는 고사했고 손자나무만 살아 있다.

할머니나무, 손자나무는 깊은구지 윗말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깊은구지 마을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곳은 윗말로 불리는 곳이었다.

최영철씨가 그린 1960년대 깊은구지 지도를 보면 느티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작은마리골이 마니굴로 표기되어 있다. 마니골, 마니굴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마니골 골짜기 서쪽 언덕에는 봉숭아 과수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마리골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은 깊은구지 윗말 입구에 서 있던 두 그루 느티나무 사이로 관통했다. 손자나무 위쪽에는 원명기씨댁, 원응기씨 집이 있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당시 사랑할머니댁이 있던 곳이다. 서쪽에 위치한 나무가 할머니나무였고, 동쪽에 위치한 나무가 손자나무이다.

당시에는 윗말느티나무로 불렀다. 할머니나무가 있던 곳은 심곡 623번지이다. 현재 심곡로 71, 부천시 심곡본1동 623번지이다. 이곳에 있는 또와치킨, 사랑방공인중개사무소 사이인 도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자나무에서 서쪽으로 3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였고, 정명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부천의 대부분의 오래된 나무들이 도로개설로 사라졌듯이 이곳 할머니나무도 그렇게 잘려서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곳에 할머니나무에 대한 안내 표지석이라도 세워놓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

개울 동쪽에 위치해 있던 손자나무는 심곡본1동 638-3번지에 있다. 부천시 성주로 176번길 28, 부천시 심곡본동 623-1번지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천시온장로교회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손자나무의 나이는 470(1991년) 살 정도이다. 나무의 높이는 23m(1991년) 정도이고, 둘레는 7.8m 정도이다. 아직은 싱싱한 잎을 매년 틔워내고 있다.

이 개울은 깊은구지 동쪽을 휘돌아 흘렀다. 깊은구지를 벗어나서 벌판을 흐른 뒤 든전물에서 흘러내려온 개울하고 합쳐져 자유시장으로 흘러들었다. 그 뒤 돌내로 합쳐졌다.

 

▲ 깊은구지 손자나무(겨울)

◆ 불에 타죽은 할아버지나무

할아버지나무는 동네 아래쪽인 심곡 604-1번지 앞 도로에 있다. 할아버지나무는 손자나무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아랫말느티나무라고 했다.

1960년대 깊은구지 모습을 그린 최영철씨 지도에는 김연호씨댁이 느티나무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할아버지느티나무 서쪽 언덕에는 복숭아밭이 크게 조성되어 있었다. 소사복숭아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멀쩡한 모습으로 찍힌 사진을 보면 할아버지나무의 우람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커다란 가지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가지 사이에는 커다란 공간이 생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가지는 그네를 매기 딱 알맞은 높이로 뻗어 있었다. 이 가지에선 단오날을 맞아 동네 처녀들이 그네를 맨 뒤 뛰었다. 여름날에는 잎이 무성해서 동네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와서 한참씩 쉬어가곤 했다. 할아버지나무 아래에서 웃통을 벗고 낮잠을 실컷 자기도 했다.

이 사진을 보면 나무 아래를 시멘트로 둘러놓았고, 삼표 연탄하고 가스를 취급한 대리점이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집들이 바로 곁에 위치해 있었다. 깊은구지 마을에 많은 집들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나무는 당시 700살 정도 나이를 먹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워낙 나이를 많이 먹은 탓에 아래가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이 텅빈 공간을 즐겨 찾았다. 당시 마을 아이들은 성냥을 가지고 장난을 많이 쳤다.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 잘못해서 느티나무에 불이 붙기를 세 번이나 했다. 한 번은 나무에 온통 불이 붙어서 부천소방차 9대의 물을 뿌렸다. 이렇게 했는데도 제대로 끄지 못했다. 소방대원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연신 물을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불에 탄 뒤에도 살아 있었다.

 그 뒤 어느 날인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탄 뒤 완전하게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나무는 죽었지만 그 고목이 된 몸은 현재도 도로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할아버지나무, 손자나무에선 깊은구지 도당제를 마을 축제로 승화시켜 치뤄낸다.

<다음 호에 계속>

 

▲ 깊은구지 아래 마을에 있던 고목이 된 할아버지나무(700살)
▲ 깊은구지 손자나무 표지석
▲ 깊은구지 마을에 있던 1520년에 심어 495세 정도 된 손자 느티나무
▲ 깊은구지 고목이 된 할아버지나무
▲ 1960년대 깊은구지 주변 지도(최영철 제공)
▲ 1970년대 깊은구지 모습. 오른쪽이 거마산이고 왼쪽이 성주산이다.
▲ 1963년 지도(깊은구지)
▲ 1917년에 측도한 지도, 깊은구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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