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빵집

 
글·사진 | 서금숙
 
 송내동 동신아파트 앞에는 오래된 빵집이 있다. 그곳에 가면 손님 얼굴을 잘 기억해주고 잘 웃는 빵집아저씨가 있다. 가게 이름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빵집아저씨는 그대로다. 빵집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다. 불이 켜져 있는 모습만 본 이웃들이 참 열심히 산다며 가게 문이 닫힌 날은 동네가 텅 빈 것처럼 허전하다고 한다.
 한 남자가 빵집 앞을 서성거렸다. 그 남자는 송내동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고향도, 친척도, 친구도 없는데 송내동 빵집을 찾아왔다. 빵집아저씨를 보고 출국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 남자는 잠깐 동안 추억에 젖어 살던 이야기를 하고, 빵집아저씨에게 장사를 오래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한국에 오면 꼭 들려서 아저씨의 얼굴을 보고 가고 싶었다고 하면서, 계속 장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손을 한참동안 잡고 놓지 않았다.
한 여대생은 중학교 때 살던 곳인데, 빵집아저씨네 빵을 많이 사먹었었다며, 상호가 왜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냐고 아쉬워했다. 그 여학생은 빵집이 네 번이나 바뀐 이유와 장단점에 대해 취재를 해서 학교 문집에 글을 실었고, 다시 찾아와 발행된 책을 주고 갔다.
 송내동 빵집은 오래된 시간만큼이나 아저씨에게 긴 인내를 요구했다. 주변 환경이 바뀌고 마트나 백화점이 생기면서 어려움이 찾아와 가게상호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마다 단골손님들이나 우연히 찾아와준 손님, 가까이에 사는 이웃들의 방문은 큰 힘이 되었다. 빵집을 해서 요즘 말로 빵빵하게 부를 축척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부모의 모습을 심어주고 싶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사업실패를 보고 자라 늘 일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큰아이가 세 살 때 둘째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긴 시간을 가게 안에서 보내야 하고 아이들과 여행도 제대로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모든 일에 만족을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이름 앞에 빵이 붙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빵민, 빵상이라고 불러준다며 재미있어 했다.
 적당한 온도와 물, 소금, 설탕, 계란,.... 재료가 섞여야 빵이 된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 빵과 더불어 이웃들과 호흡하던 시간이 흘렀다. 가게 상호가 여러 번 바뀐 오래된 빵집, 빵을 사간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아이를 데리고 빵을 사러 오고, 빵집아저씨의 머리는 희끗희끗해졌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듯이 사람들도 바뀌어 갔다.
 빵집아저씨는 오늘도 가게 문을 열고 오래된 빵집에 있다. 입대 전 인사하러 왔던 남학생, 빵집아저씨네 빵보다 빵집아저씨가 먼저 떠오르려나, 오래전에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취업자는 빵집아저씨와 찍은 사진을 보고 한국을 추억하겠지. 빵집아저씨의 유쾌한 인사를 기억하겠지.
“하이! 핫산!”
“하이! 미스터 베트남!”
 
▲ 빵집아저씨(오른쪽)와 손님
 
 송내동으로 이사 온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산 아래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작은 상가들....
 넉살좋은 빵집 아저씨와 콩나물신문 이야기를 간간히 나눴다. 물론 내가 궁금한 동네 이야기도, 내가 모르는 이야기도 그러다가 빵집을 운영한지 20여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빵집아저씨, 아저씨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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