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의심하라

 

  헬렌켈러–그는 누구인가? 미국정부의 전쟁을 반대하여 과감하게 연설하며 국민을 전쟁반대로 불러 일으켰던 여자, 혹시 러시아 혁명의 주인공은 아닐까? 놀랍게도 장애를 극복하고, 이겨낸 미국의 여류 저술가이자 사회사업가인 헬렌켈러다. “빛의 천사”라고 부르는 헬렌켈러는 20대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1909년 29세에 미국 사회당에 입당해 88세로 사망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그녀는 공공연하게 레닌과 사회주의를 찬양하며, 소비에트와 노동자계급을 지지했고, 미국과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이처럼 헬렌켈러는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 있었다. 이런 헬렌켈러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우리는 때로 상상속의 나와 현실 속 나의 모습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생각하며 놀랄 때도 있다.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의 심연 속, 서로 다른 두 모습에서 현실 속의 모습을 망각하며, 추앙하고자 하는, 비정상적인 모습도 현실 속의 참 모습으로 만들어 내세워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참과 거짓이 분간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만들어 내는 여기에 헬렌켈러의 참모습이 있는 것은 아닐까.

  헬렌켈러는 20대 전까지는 분명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사회주의 의식을 갖고 현실을 비판했다. 그녀는 기적을 만든 장애인 이었고, 작가, 연사, 영화배우, 보드빌 배우였고, 미국시각장애인협회의 고문으로서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진보적인 가치를 위해 노력한 활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목적의식적인 삶을 산 사회주의자를 장애와 맞선 여인으로 더 기억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사회는 그녀가 장애를 극복한 전형적인 미국인이어야 한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웠기 때문이다. 이것을 헬렌켈러는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자서전 “삶의 한복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 활동이 사회봉사나 시각장애에 국한되는 한 그들은 나를 현대의 기적이라고 과장되게 추켜올렸다. 그러나 내가 사회, 정치적 현안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그들의 어조는 완전히 바뀐다. 사람들은 내가 부도덕한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정함이지 호의가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상식으로 알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이나 헬렌켈러의 모습에 의문이 생긴다. 왜 누가 무엇 때문에 다윈과 헬렌켈러의 특정 부분을 인용하거나 침묵 시켰을 까. 그래서 그들이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정치란 그런 것이다. 정치를 위해 인간을 만들고,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현실 속 참 과 거짓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 오늘의 시대가 만들어 낸 냉정한 세계관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생각당하는 나에서 생각하는 나로 바뀌어야 할 시점에 도래 하였다.

  어떤 상황에 있던지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중립이 아닌 참과 거짓의 편에 바로 서 있는 나를 의식하고, 당당히 자기 주견을 말할 수 있는 나로 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필링의 인문학이 말하고자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고, 설국열차에서 보여주는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현실을 직시함에 있어서 생각당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떠한 기준의 틀을 만들고, 이틀 속에서 스스로 맞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 | 원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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