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신제 제사에서

소머리, 생선지, 생고기의 의미  

 

 

◆ 위패는 심곡동도당영위(深谷洞都堂靈位)

깊은구지 도당제를 지내는 세 분의 당주와 무녀가 풍물을 앞세우고 아랫말 도당할머니나무에 도착한다. 이 느티나무도 신목이다. 비록 목숨이 다해 빈껍질로 남아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깊은구지를 지켜주고 살펴 온 고마운 존재이다. 도당할머니나무 텅 빈 가운데서 손자의 손자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앙징맞게 느티나무 줄기를 키워오고 있다. 언젠가는 아름드리 큰 느티나무로 자랄 것이다. 먼 미래 깊은구지 마을에선 이 느티나무가 마련해주는 그늘의 혜택, 마을을 지켜주는 터주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것이다.

도당할머니나무 앞에 제상을 마련한다. 토신제이지만 터주신제인 제상 에는 위패가 맨 위쪽 가운데에 놓여진다. 그 위패(位牌)에는 심곡동도당영위(深谷洞都堂靈位)라고 적혀 있다. 도당신을 모신다는 뜻이다.

제상 양쪽에는 촛대가 놓여지고 촛불이 켜진다.

 

 

◆ 토신제 제상에 올려진 소머리, 생고기

제상 한 가운데에는 소머리가 생(生)으로 놓인다. 오른쪽에는 소의 생선지 일곱 그릇이 놓여진다. 이 소머리와 생선지가 깊은구지 도당제의 특징이다. 오른쪽엔 막걸리 일곱 잔이 놓여지고, 소의 생고기가 놓여진다.

소는 우리 민족과 함께 한 가족과 같은 존재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소는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름하는 잣대이기도 했다. 오십 가구 정도의 한 동네, 한 마을이라면 소가 있는 집이 겨우 한두 집에 불과했다. 이렇듯 소를 키우는 일은 소중하고 또 소중했다.

그러기에 조선시대 제상에 소머리, 소의 생고기를 올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마을의 제사뿐만 아니라 아주 잘사는 집안일지라도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을 나라에서 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잘사는 양반 집안의 제사에 소를 잡아 올리는 풍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마을 제사에서도 소머리, 소생고기를 올리는 풍습이 새로 생겨났다.

원래는 왕실의 제사인 종묘제례에서만 소를 잡아 제물로 바쳤다. 나라에서 제일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소이기도 해서였다.

 

 

◆ 우리네 소의 역사

우리 역사 속에서 소(牛)에 대한 기록은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우리 역사 시작부터 소가 함께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단군기에 "단군이 이미 도읍을 임검성에 세우고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옛 법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좋은 날로 정하고 흰소를 잘 기르는 것이 순서였다. 제사를 지낼 때가 되면 그 흰소를 잡아 그 머리를 산천의 제물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이렇듯 처음 희생 제물은 흰소였다. 지금은 없는 흰소가 그때는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소의 사육은 오천년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조에 “전쟁 때 희생으로 바쳐진 소의 발굽이 붙어 있으면 길하고 갈라져 있으면 흉으로 점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소가 희생용만이 아니라 점술용으로도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 357년경에 축조된 고구려 안악 3호분에 그려진 우사(牛舍)에서 검정소, 누렁소, 얼룩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의 수로부인에게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꽃을 꺾어 바친 노인도 암소를 끌고 있다.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 신화는 소와 말을 기른 기원을 말하고 있다.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농신(農神)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소를 제물로 바쳤다. 이 때 제단을 선농단(先農壇)이라 한다. 선농단 제사를 지낸 뒤 왕은 주민들에게 소고기로 탕을 끓여 나누었다. 그게 설렁탕의 유래이다.

 

◆ 무속에서 소의 의미

무속에서 소는 신의 제사상에 바쳐지는 제물이다. 칠성굿의 사설에 “소를 잡고 잔치를 시작했다”거나 성주굿을 할 때 “소를 잡아 성주 조상 위하여 놓고” 라는 사설에서 보듯이 소는 신에게 바쳐지는 신성물이다.

또 대문에 쇠코뚜레를 걸어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집에서 소를 잡아먹었다는 표시로 악귀(惡鬼)가 침입하다가 이것을 보고 혼비백산 도망간다고 믿었다.

부천의 마을에서도 소코뚜레를 많이 걸었다. 집에 걸어놓는 소코뚜레는 주로 향나무로 만들었다. 향나무는 제사향으로 쓰는 것이기에 잡귀(雜鬼)를 물리쳐주고 집안에 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집안에 향나무 향기가 피어오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부천은 마을이 주로 산등성이에 걸쳐 형성되었다. 한강으로부터 들어오는 물줄기가 차단되기 전에는 온갖 수해로부터 마을 집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한 것이었다.

외양간에도 악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소의 턱뼈를 귀신을 쫒는다는 엄나무 가시와 함께 문 위에 묶어서 걸어 두기도 했다. 소코뚜레와 같은 의미였다.

우리 선조들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다. 식구(食口)는 가족이며, 생구는 한 집안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이른다. 소를 생구라 한 것은 소는 농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고, 재산의 일부였기에 그만큼 소를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월 첫 번째 축일(丑日)은 소의 생일로 생각하고 일을 시키지 않았다. 소의 밥인 쇠죽에는 콩을 많이 넣어 배불리 먹였다. 소의 뿔은 모양이 기운 달을 닮아 특이한 생생력(生生力)을 상징하기도 한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같이 소의 뿔도 부활과 재생의 이미지로 상징되기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이 벌벌 떨면서 제물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불쌍히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 이 일로 백성들은 소를 아껴 양으로 바꾼 왕을 인색하다고 여겼다. 이에 맹자는 왕이 어진 마음으로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이라고 달래면서 소에 대한 어진 마음을 백성에게 미치게 하라고 했다. 이렇듯 예부터 소는 왕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귀하게 여긴 소중한 재산이었다.

 

 

◆ 조선시대 때 소 잡는 것을 일체 금지

농업을 장려한 조선시대에는 소를 잡는 일을 금했다.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 “소나 말을 사사로이 도살한 자는 장 백 대를 치고 삼년 간 노역에 종사시킨다”고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 혼인 잔치나 장례와 제사 때 소 잡는 것을 엄히 금했다. 다산 정약용은 `속대전'의 장 백 대를 오십 대로 낮추고 가죽, 힘줄, 뿔로 속전(贖錢)을 바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다산은 그 형벌이 너무 가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관에서 소 잡는 것을 속전을 받아 허가를 해 주었다. 목민심서에 서울은 28냥, 지방에서는 42냥을 속전으로 받았다 한다. 이렇게 속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양반이었다. 그러기에 다산은 일반 민중들을 생각해서 속전을 받는 것은 관리의 비행을 조장한다 하여 금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1904년 강릉 옥계면 산계리 유주사 집 노비 연분(年分)이 주인을 대신해 올린 소지(所志·관에 진정할 일이 있을 때 제출했던 민원서)가 있다. 상전 댁 시향(時享·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무덤에 지내는 제사)에 소를 잡아서 올리려 하는데 금령(禁令)과 관계되므로 특별히 소를 잡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본문 아래에는 관에서는 이를 허락한다는 처결이 적혀 있다. 유주사 집은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금령에도 불구하고 관에서는 이를 허락할 만큼 가세(家勢)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40여량의 속전을 냈을까? 가죽과 힘줄, 뿔로 대신 바쳤을까?

 

◆ 종묘대제에 소가 희생물로 쓰여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종묘에 제사를 드릴 때 소 대신 국수로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면생(麵牲)’이라고 하였다. 제물로 바치는 소를 ‘희생(犧牲)’이라고 하는데, 이 희생을 대신한 국수라는 의미이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이기에 국가의례에서도 불살생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였던 것이다. 불교에 심취했던 중국의 양무제도 소를 대신하여 국수로 제를 지낸 사례가 있다.

조선시대 국가제사인 종묘대제에 쓰일 소, 양, 돼지는 국가에서 특별하게 길러졌다. 한양에선 주로 밤섬에서 길렀다. 밤섬은 한자로 율도(栗島)라고 했다. 한강 마포대교와 서강대교 사이에 위치했다. 이때 밤섬의 동쪽과 서쪽에 걸쳐 있는 벼랑은 작은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1968년도에 섬의 바위며 벼랑을 폭파해버려 그 장관을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섬이 아주 작아져 버렸다. 섬을 폭파하기 전까지는 각종 약재며 염소 등을 방목해서 키웠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소는 누렁소인 황소와 검은소인 흑우(黑牛)였다. 태조부터 종묘대제 때는 희생물로 흑우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점점 흑우가 부족해지자 인조 16년인 1638년 이후에는 누렁소인 황소로 대신하였다. 이렇게 조선 말기까지는 누렁 황소만을 썼다. 암컷은 쓰지 않고 수컷인 황소만을 썼다.

만약 종묘에 있는 성생위에 오른 황소에 다른 색상의 털이 섞여 있다면 곧바로 불합격 판정을 받아야 했다. 종묘대제 때 황소는 잡털을 가장 엄격하게 가려냈다. 가장 순수한 황소를 잡아야 하늘에 있는 왕의 조상신들에게 그만큼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황소를 잘못 성생위에 올렸다면 종묘령 이하 관원들은 귀양을 가야 했다. 그러기에 종묘대제를 위한 황소 사육은 가장 엄격하게 관리되고 전문적으로 준비되어야 했다.

조선시대 소의 종류로는 황소, 흑소, 얼룩소, 점배기소, 칡소 등이 있었다. 누렁 황소라도 붉은 색이 진한 대추황소, 뿌연 회색이 많이 섞이면 부엉소라 했다. 눈두덩이가 검은소를 눈거멍이소, 흑소 중에서도 콧등에 흰나비가 앉은 것 같은 흰점이 있는 흑소도 있었다. 당연히 황소를 제외한 다른 소들은 종묘의 성생위에 올릴 수 없었다.

성생위에서 합격을 받은 소나, 양, 돼지들은 전사청에 있는 도살실에서 도살을 했다. 이때 제사 희생물들을 잡을 때는 ‘난도(亂刀)’라는 방울이 달린 큰 칼을 사용하였다. 칼에 방울이 달린 이유는 청동기부터 시작했다. 청동기시대 제사장이 착용한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검에서 유래했다. 청동방울과 청동검이 희생물을 잡는 난도라는 칼로 바뀐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천부인(天符印)이라 했다.

종묘대제 때는 희생물을 잡아 싱싱한 날고기로 올렸다. 깊은구지 도당제에 올려지는 소머리, 생선지, 생고기도 같은 의미이다. 소, 양, 돼지의 날고기의 일곱 부위를 각각 한 근씩 올리는 것이어서 성칠제(腥七體)라 하였다. 제사 때 생식을 한 것은 청동기시대 이후 조상들이 익혀먹지 않은 제사 역사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종묘 제사 때 올리는 짐승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황소였다. 황소를 희생물(犧牲物)이라고 했다. 이때 ‘희생 희(犧)는 소의 기운’을 뜻했다. 이는 종묘대제 때 황소를 바침으로써 왕의 조상신(祖上神)으로 하여금 소의 기운을 누리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어 ‘희생 생(牲)은 살아있는 황소’를 뜻했다.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 잡아서 들여온 소고기가 아니라 종묘에 살아있는 황소를 끌고 들어와야 했다. 이때 양과 돼지를 포함해서 세 가지 희생물이라는 의미의 삼생(三牲)이라 했다.

이렇게 성생위에서 희생물이 결정나면 전사청엔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을 눈코뜰새 없이 준비해야 했다. 제사음식은 ‘숙주’라고 하는 남자들이 만들었다. 종묘대제 때는 남자들만으로 제사를 지냈다. 여자들은 일체 근접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제사 때 부정을 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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