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나들이, 마을 나들이

 

 

본격적인 여름이 아닌데도 불볕을 자랑하는 그 땡볕을 뚫고 2017년 부천시민연합 회원 가족 나들이, 마을 나들이를 했다. 먼저 시민연합 사무실 앞에서 출발해서 돌내를 돌았다. 보통 ‘심곡 시민의 강’이라고 일방적으로 이름 붙여진 복원된 하천이었다. 심곡천이라고 했다가 오랫동안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었는데 이제야 햇빛을 보았다. 돌내이다. 돌내에는 방생한 물고기들이 여러 마리 눈에 띄었다. 그 돌내의 유래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심곡 시민의 강이 아니라 조선시대 이후부터 오랫동안 불려져온 돌내를 살려야 한다는 취지이기도 했다. 김만수 부천시장의 일방적인 이름짓기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지적이기도 했다.

그 뒤 돌내를 한 바퀴 돌고 부천북초등학교로 향했다. 1924년도에 개교한 순전한 부천사람들만의 학교였다. 개교 당시엔 소사보통학교로 불렀다. 그 보다 앞서서 1922년도에 개교한 부천남초등학교는 소사심상소학교로 순전히 일본인들만의 학교였다. 부천시민연합 회원 중에 북초등학교를 다닌 어르신이 있어서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개되었다. 그 어르신은 장말에서 북초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 소사보통학교에 다니기 위해 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교에는 오래된 버즘나무가 여러 그루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학교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나무들이었다.

원미시장을 거쳐 조마루 공원이어야 하는데 은행공원으로 이름 붙여진 곳에 들러 잠시 땀을 식히며 조마루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조마루뼈다귀로 잘 알려진 조마루. 그 유래는 ‘해가 뜨는 산언덕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거다. 그 마루가 멀미, 원미산이다. 사실 조마루 일대에는 멀미의 산등성이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곳에 복숭아 과수원이며 밭들이녀 논들이 이어져 있었다. 낮은 산등성이에 올라 대보름날이면 쥐불놀이를 했다.

조마루를 지나 멀미의 골짜기인 뒤골로 향했다. 조마루 뒤에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뒤골이다. 뒤골 원미공원엔 부천시립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원미공원 주차장은 아주 큰 저수지였다. 조마루 아래 논들이며 밭에 물을 공급해주었다. 늘 물이 풍부하게 흘러 저수지 아래 개울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었고, 그곳은 조마루 사람들을 위한 빨래터였다.

큰 저수지였는데 원미공원 주차장을 만들면서 메워버렸다. 주차장이 좋은지 저수지가 좋은지 단연코 저수지가 공원에 더 어울릴 것이다. 공원 만들 때 단견(短見)이 빚어낸 결과였다. 저수지로 다시 복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골에서 멀미 산등성이로 산길을 걸어 올랐다. 칠일약수터에서 약수물로 목을 축였다. 칠일약수터는 베르내의 발원지이다. 개울보다 조금 큰 내에 무슨 발원지를 따지냐고 물을 터이지만 그래도 발원지는 있다. 칠일약수터에서 베르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베르내는 ‘벼랑을 휘돌아가는 내’라는 뜻이다. 베르가 벼랑이라는 말이다. 칠일약수터 바로 아래는 미나리꽝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부천청소년 수련관을 지나 삼막골을 지나 지골에서 온수로 넘어가는 수렁고개를 넘어가니 부천무릉도원 수목원이었다. 지골 골짜기에 여러 나무들을 심어 수목원으로 만든 것이다. 다시 공사를 벌여 여러 붓꽃이며 꽃들을 보강했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느라 조금 지체 되었다. 그런데 무릉도원 수목원이라는 간판은 요란해도 ‘지골 골짜기’라는 명칭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골인데 지골이 없는 셈이었다. 부천자연생태공원이라고 해서 튤립축제, 국화축제를 벌이던 곳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양이 현저하게 바뀌었다. 이렇게 여기저기 요란하게 꾸며놓았다. 그런데 부천시 세금을 눈곱만큼만 쓰면 지골 유래에 대한 표지판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었을 터인데... 참 아쉬웠다.

부천시민연합 회원들이 모여 보물찾기, 마을 답사한 곳에 대한 퀴즈대회, 제기차기, 신발 던져 점수 내기 등의 게임을 했다. 특히 상품이 걸린 부천 마을 이야기에 대한 퀴즈대회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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