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엔 복숭아 과수원 만들어

 상살미 아래에 있던 솔안말

구지말로 가는 소로길이 있었다.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1978년도 지도 구산말로 되어 있다.

● 솔안말의 옛모습

1899년도에 경인철도가 솔안말 앞으로 뚫렸다. 상살미의 높은 산굽이를 피해 남쪽으로 우회를 해서는 경인국도가 뚫렸다. 솔안말은 그 사이에 마치 섬처럼 갇힌 모양이 되어 버렸다. 경인국도에서 솔안말로 좁은 산길을 걸어야 했다.

경인국도가 뚫리기 전에는 한양에서 인천도호부로 가는 대로가 있었다. 이 대로에서 솔안말로 가려면 상살미의 산언덕으로 길게 이어진 좁은 산길을 걸어야 했다. 솔안말에서 구지말로 이어진 산길도 마찬가지였다. 이 산길이 솔안말을 다른 마을로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경인철도가 놓이면서 땡땡이 건널목을 건너 구지말로 가야 했다. 기차가 오면 땡땡땡땡 종을 쳐서 그 사실을 알렸다. 워낙 기차 속도가 느려 이 땡땡이 소리를 듣고 기차를 피할 수 있었다.

마을 앞으로는 산골, 도티골에서 길게 이어진 골짜기에 논들이 제법 있었다. 논까지 가려면 제법 먼 길을 걸어야 했다. 상살미는 황무지여서 밭으로도 사용하지 못했다. 지금은 상살미 산꼭대기까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이곳이 산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솔안말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논에서 나는 쌀이 전부였다. 그래서 쌀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솔안말 사람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래이인 상리쪽에 나아가 둑을 쌓아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거나 주변 산들을 개간해 밭농사를 주로 지었다.

솔안말 지역에는 조선시대에 쌀을 저장해 두는 창고인 조창(漕倉)이 있었다. 조창(漕倉)이 세 군데나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 쌀이나 다른 생활 물품들을 저장했다. 부평도호부에서 운영한 국가적 조창은 현재 인천 동구 만석포구에 있었다. 전국의 10개 조창중의 하나였다. 1919년도 지형도에는 이 조창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 시기에는 조창이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경상도, 전라도 지역 같은 원거리 고을에서는 미리 세곡을 운반해 와서 야적을 해야 했다. 쌀을 야적하던 곳이 부평도호부 관내 만석동, 영종도, 경서동 등지였다. 특히 만석동 포구에는 가장 많은 세곡을 야적하였다. 그 수량이 '만석'이 된다고 하여 '만석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세곡을 강화도로 빙 돌아 운반하지 않고 부천을 거쳐 운하를 통해 곧바로 한강으로 운반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중종 때의 김안로가 파다가 실패한 굴포천 운하였다.

솔안말에 있던 창고는 국가가 지정한 조창이 아니라 개인들이 쌀을 보관해 놓으려고 지어놓은 사창일 가능성이 크다. 사창인데 조창으로 잘못 알려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다리에 한다리개라는 포구가 있어서 수많은 배들이 들락거렸음을 알 수 있어 사창이 있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 사창에는 쌀을 비롯한 다양한 물품들이 보관되었다.

▲ 상살미 언덕에 있는 송내중앙교회

 ● 일제강점기 때엔 복숭아 과수원 만들어

일제시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솔안말 지역이 거마산, 상살미의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과수원을 가꾸기에 안성마춤이었다. 그래서 일본 지주들이 대대적으로 복숭아 과수원을 일궜다. 일본인 요코야마인 횡산(橫山), 다케토미인 죽부(竹富), 고쿠보인 소구보(小久保)가 솔안말 산등성이를 개간해서 복숭아과수원을 열었다. 그리고 깊은 구지에도 복숭아 과수원을 가지고 있던 다카오인 고미(高尾) 등도 복숭아농원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생산된 복숭아를 인천으로 내다 팔거나 인천항을 통해 본국으로 수송해 갔다.

일제강점기 대정 8년인 1919년도 솔안말 지형도에는 과수원이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1932년도 부평수리조합관개지(富平水利組合灌漑地)에는 경인국도변을 중심으로 넓게 과수원 표기가 되어 있다. 이 지형도가 일본인들이 확실하게 솔안말 상살미 산등성이에 복숭아 과수원을 열었음을 증명해준다.

솔안말에서는 복숭아 과수원 말고도 모종을 키우기 위해 까만 기름종이를 덮어 기른 청채미를 많이 심었다. 청채미는 당시 부천지역 전역에서 심던 참외였다. 마을 앞으로 흘러가던 개울에서는 참게를 많이도 잡았고 산골, 도티굴, 창골에서도 많이 잡았다. 사래이 들논에 나가면 두루미, 재두루미, 백로 등이 떼로 몰려 있다가 솔안말 근방의 솔숲에다 둥지를 틀었다.

충남 서산군 태안읍 도내리 창평 동쪽에 있는 솔안말, 충남 예산군 대흥면 갈신리 상갈신 동쪽에 있는 솔안말,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고항리 큰마섬 서쪽에 있는 솔안말이 있다. 충남 예산군 예산읍 발연리 솔안말은 소란말이라고도 한다.

충남 보령군 청라면 장현리 아래장밭 동쪽에 있는 솔안말, 충남 당진군 신평면 금천리 장뻘 서남쪽에 있는 솔안말, 경기도 평택군 오성면 금곡리 쇠누리 동북쪽에 있는 솔안말,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희곡리 일자말 동북쪽에 있는 솔안말,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금의리 먹절이 남쪽에 있는 솔안말,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안현리 길마재 안쪽에 있는 솔안말이 있다.

전북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 정동 남쪽에 솔안뜸이 있다.

▲ 상살미 언덕에 있는 집

  ◆ 솔안말 지역의 기업체들

1977년도 실사하고 1978년도에 제작한 지도에 보면 솔안말 지역은 송내상동(松內上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송내상동이 현재의 송내1동으로 바뀌었다.

이때 솔안말은 구산말로 표기되어 있다. 왜 솔안말이 구산말로 바뀌어 표현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구지말과 산골말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새롭게 붙인 이름이 아닐까 여겨진다. 구지말에서 ‘구’자를 따고, 산골말에서 ‘산’을 따서 새롭게 지은 것이다.

이렇게 마을 이름조차 왜곡되고 변형된다. 이 구산말도 1990년대 지도에는 사라지고, 산골마을 지역까지 포함해서 솔안말로 바뀌고 만다. 이제는 산골말이 사라지고 솔안말이 주인 노릇을 한 것이다.

이 1978년도 지도에선 거마산에서 산골마을을 거쳐 솔안말을 지나고 구지말에 이른 상살미 아래에 마을이 길게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을이 크게 변하지 않고 마을 옆에 대광산업(주), 한국베어링 정밀공업(주), 은성플라스틱 등이 현재 송내역 남부역 산등성이 주변에 들어서 있었다. 그 반대편으로 중앙농기구제작소, 우진쇼트공업사, 은성공업(주), 진로주조(주) 등이 있었다.

솔안말에서 경인국도 건너편 산골마을 지역에는 반도기계공업(주), 대일기계(주) 등이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산골마을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도 당시 여러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업들이 들어서게 된 것은 경인로가 인천항까지 연결되어 제품 생산에 따른 유통이 편리해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들 지역은 경인철도와 연계되어 교통도 편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상살미 언덕에 있는 집

◆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표시된 솔안말

솔안말에서 동남쪽에 산골말이 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시기인 1911년도에 전국에 걸쳐 땅이름과 당시 부평군에 속한 부천 지역의 자연, 사회, 문화 등으로 분류하여 현지답사를 해서 기록한 지리책이 조선지지자료이다.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이 조선지지자료를 살펴보면 솔안말, 산골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자료에는 조선시대 면리 제도를 그대로 활용하여 면과 리만 표기한 것이다. 당시 솔안말과 산골말이 소속된 리는 구지리(九芝里)이다. 그래서 구지리만 표기하고 나머지는 그저 자연마을로 놓아 둔 것이다.

조선시대 어떤 지리지에도 솔안말과 산골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당연하게 면리제도(面里制度)에 따라 그런 것이다.

그 뒤 솔안말과 산골말이 기록에 등장한 것은 대정6년(1917년) 측도하고 대정7년(1918년) 제판한 군포장(軍浦場)이라는 지형도이다. 군포장(軍浦場)이라고 한 것은 당시 군포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군포의 군포장이었다. 이를 기본으로 해서 지형도를 제작한 것이다. 기본도라고 부른다. 군포 지역을 중심으로 그려진 지형도에서 부천지역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솔안말 지역은 지형도 왼쪽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다.

일제는 이 지형도에서 전국을 총 722매로 나누어 세심하게 분류를 했다. 이때 각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명을 사용하거나 그 지역의 유명한 문화적 지형이나 지리적 지형지물을 사용했다. 군포장이 아주 유명했기에 사용했다.

이 지형도는 대정8년인 1919년 3월 25일자로 인쇄하고 3월 30일자로 발행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 육지측량부가 인쇄 및 발행자로 되어 있다. 축척 5만분의 1로 제작된 아주 상세한 지형도이다.

제1차 지형도는 한일병합늑약이 이루어진 1910년도 이전에 제작되었다. 보통 약도라고 부른다. 일제에 의해 비밀리에 제작된 것이다. 제2차 지형도는 일제강점기 때 첫 번째로 이루어졌다. 약도를 보완하고 수정했다. 하지만 지형도로서 약도하고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1910년 한일병합 늑약이 체결되면서 칙령 361호에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으로서 조선임시토지조사국이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국토에 대해 측량을 시작해서 1915년까지 6개년에 걸쳐 220,762km2 측량을 완료하였다. 전국에 기선(基線) 13개소, 대삼각본점 400점, 일본의 2등 삼각측량 상당에 해당하는 동보충점(同補充点) 2,401점, 일본의 3등 삼각측량에 상당하는 동점이 31,646점, 수준측량(水準測量) 6,629km를 행한 것이다.

제3차는 한반도에 이같은 삼각점망이 완성되어 이를 기초 삼아 작성된 지형도이다. 일제의 실질적인 통치를 위한 비밀지형도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에 걸쳐 완성되었다. 솔안말에도 이 삼각점이 표시되어 있다. 삼각점은 당시 경인국도변에 표시되어 있다. 해발 20.78m로 이 지역의 높이를 알려주고 있다. 이 지형도엔 부천군, 시흥군, 수원군까지 포함해서 당시 지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지형도의 특징은 모두 마을이나 산 등이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선지지자료가 우리말을 병행해서 기록한 반면에 지형도에는 한자로 표기하고 그 옆에 일본어를 병기했다.

솔안말은 송내촌(松內村)으로 표기했다. 산골말에서 솔안말을 거쳐 구지말로 가는 소로길이 표시되어 있다. 상살미 서쪽으로 제법 큰 길이 경인국도에서 구지말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구지말로 가는 길에 만나는 경인철도에 2개의 건널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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