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라이프, 만화로 만나다'

 

 
 

지친 오후의 푸념

 오후 3시 반. 초등학생 몇이 와서 책을 보고 있고, 나는 드디어 도서관에 '홀로' 앉아 있다. 지금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아침 9시 30분부터 지역 주민들과 모임을 하고, 연이어 두 번의 회의를 하고서 이제야 '홀로' 있다. 점심을 한참 넘겼지만 배가 고픈지도 모르겠다. 모임과 회의를 하면서 마신 커피와 집어먹은 과자 몇 조각 덕분이다. 이걸 감사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사는 건가?

 

 도서관을 중심으로 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 보겠다 했으니 사람 만나는 게 일이다. 이렇게  저렇게 활동을 하고 일을 벌이다 보니, 웬만한 영업사원들 만큼 사람을 만나는 것 같다. 그 가운데 40% 정도는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며 일을 만들어 가야 하는 만남이라 자연스럽게 그분들과 식사나 차를 하게 된다. 도서관 일과시간에 만나지 못하는 분들은 저녁시간에 만나게 된다. 이렇게 일주일이 훅훅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간다. 이런 일상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일로 만나고, 업무로 마지못해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면 이미 때려치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루하루 피를 말리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인 것은 사람을 만나 어울리고 수다 떠는 것이 즐겁고, 지역에서 재미난 일을 작당한다는 것이 아직은 행복하다. 더구나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이라는 가치에 동의하시고, 마음을 열고 삶을 나누고 기쁘게 동참하시는 지역 분들이 계시기에 힘을 얻는다.

 

나에게 상을 주고 싶다.

 그래도 정직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 커피를 마시고, 혼자 밥을 먹고, 저녁에 가볍게 홀로 맥주 한잔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고민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분주한 삶에 ‘쉼표’를 찍고 싶다. 회의하며 목을 축이는 차가 아니라 가슴 깊이 향을 맡고 음미하는 시간,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한 식사가 아닌 음식의 맛과 정성을 느끼며 대하는 작은 독상, 아삭한 숙주볶음에 시원한 맥주를 앞에 두고 하루의 수고에 스스로 격려하는 시간들. 상상만 해도 벌써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언론에서 사회의 새로운 모습으로 '혼밥, 혼술'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전문가들은 나름의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파편화되고 자기중심적인 사회현상으로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하여 '한솥밥, 식구'라는 말이 새삼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혼술, 혼밥이 사회적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은둔형 외톨이로의 '홀로'가 아니라 함께 가기 위해 잠시 '홀로' 있는 것이라면 적극 권할만하지 않을까? 온갖 정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쏟아지고, 거기에 뒤쳐지지 않고 쫓아가다 탈진한 영혼들에게 가끔 씩의 혼밥과 혼술은 다시 '한솥밥'을 먹고 '식구'가 되어 밥상머리에 어울리기 위한 충전의 시간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싱글라이프, 만화로 만나다. 하나

 오늘 도서관에 있는 책을 살펴본다. 소박한 나의 꿈을 지지하고 안내해줄 책이 분명히 있겠지? 사실 아직은 자발적 혼밥, 혼술은 쉽게 엄두가 나지 않기에 책을 통해 미리 엿보는 것이 필요하다.

 작은도서관이지만 찾아보니 책이 있다. '싱글라이프'를 주제로 그려낸 책들이 생각보다 많다. 게다가 대부분 만화책이다. 일본작가들의 작품으로 그림이 이쁘고 앙징맞다. 역시 일본이다 싶다. 페이지를 오른쪽으로 넘기면서 왼쪽으로 읽어나가야 한다. 좌. 우 컷이 아니라 위. 아래 컷이다. 그래서 낯설다. 허나 어차피 혼밥. 혼술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뽑아 들은 책은 다카기 나오코의 [혼자 살아보니 괜찮다]라는 책인데, '달콤 쌉살한 어쿠스틱 싱글 라이프'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한국에 꽤 알려진 작가로 [30점자리 엄마], [150cm라이프], [혼자살기 9년차], [나홀로 여행] 외 여러 권이 이미 한국어판으로 나와 있고 우리 도서관에 모두 있다. 제목에서부터 '홀로' 살아가는 일상 이야기라 무겁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비혼 여성이 살아가는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옅은 미소를, 때로는 피식하는 웃음을 웃으며 잔잔하게 볼 수 있는 책이다. 싱글의 자유로움, 그러나 가끔씩 찾아오는 외로움과 때로는 혼자 사는 두려움까지, 마치 평상에 앉아 혼자 사는 옆집 자매의 폭풍수다를 듣는 것 같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혼자 살기 시작한 지 얼마인지 헷갈릴 정도가 된 작가의 이야기가 진정성과 함께 잔잔한 즐거움을 더해준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빠인 나는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비혼의 자유, 조금은 덜하게 느껴지는 책임 등이 부럽다. 한편 가정에서 지지고 볶는 재미를 누리고 있구나 싶은 마음에 서둘러 집에 가서 아내, 아이들과 저녁을 하며 각자의 오늘 일상을 나누고 싶어지는 묘한 감동이 온다. 다카기 나오코 작가의 책은 진짜 싱글 라이프, 곧 비혼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하여 스스로에게 상으로 주는 의미, 분주한 삶의 쉼표로 작용하는 혼밥, 혼술에 대한 이야기, 내가 찾는 이야기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싱글 라이프, 만화로 만나다. 둘

 서가를 정리하면서 만화책이 한 권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라진 만화의 후속편을 주문했기에 도서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런데 찾을 길이 없다. 분명 누군가 대출해서 안 갖고 온 것이 틀림없다. 사리진 만화책은 구스미 마시유키의 [방랑의 미식가]이다. 그 후속편은 [돌아온 방랑의 미식가]이다. 얼마나 속상한지 모르겠다. 후속편을 주문하지만 않았어도 덜 아쉬웠을텐데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혹시 [방랑의 미식가]라는 책을 대출하신 분은 반납을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자를 도서관 회원들에게 보냈다. 얼마 후 하늘의 은혜로 책이 돌아왔다. 진짜 '돌아온 방랑의 미식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가스미 다케시씨는 성실한 가장이다. 35년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가장으로, 직장인으로 지냈다. 우리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자신보다는 가정과 회사를 위해 살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여 모범적으로 살았다. 우리가 성실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어쩌면 정작 본인은 숨 막히는 삶을 용케 견뎌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정년 퇴직한 주인공 가스미 다케시씨는 회사를 출근하듯 이제는 혼자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며 스스로를 방랑무사로 여기며 거리로 나선다. 조직에 속한 직장인으로가 아니라 철저히 '혼자'를 즐긴다. 특별히 '혼밥, 혼술'을 통해 성실한 직장인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혼밥', '혼술 – 게다가 낮술'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가스미 다케시씨를 통해 용기를 내지 않아도 혼술과 혼밥의 세계를 누려본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홀로' 누리는 자유, 해방을 경험하다. 물론 지극히 평범한 일본의 음식을 알아가는 재미는 온전히 덤으로 주어진다. 식도락 만화라고 하지만 이 만화에서 가장 맛난 음식은 바로 '자유'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않고 밥집이든 술집이든 홀로 앉는 자유, 그 자유 끝에서 나는 치열한 만남과 관계 속으로 들어갈 힘을 얻는다.

 

싱글 라이프 – 더불어 함께를 위한

 숲의 생명력으로 작은 나무가 살아가고, 작은 나무들이 숲을 생명력을 이룬다. 마찬가지다.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심을 누리는 것이 우리를 보살핀다.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은 우리의 내면을 건강하게 만든다. 이러한 선순환이 건강하고 유쾌한 관계와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함께 하기 위해 혼밥과 혼술도 즐길 줄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게 사는 거지. 아름답지 않은 인생은 없다. 비오는 날 홀로 앉아 파전에 막걸리 한잔 해야겠다. 제 뒷모습을 보시거든 슬며시 술값 내시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이 글은 계간지 [그 너머] 여름호에 실린 필자의 글입니다.

 

글 | 남태일(언덕위광장 작은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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