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내역의 역사

▲ 중동신시가지가 들어서기 전 중동들판

 

 중동벌을 품고 형성된 구지말,

송내역의 역사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구지말 애향비

솔안말에서 경인철도 서북쪽 건너편에 구지말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사라지고, 1994년 6월 4일자로 세워진 애향비만 있다. 이 애향비는 투나광장 구석에 있다. 투나라는 건물이 있어 투나광장이 되었다. 구지광장이면 좋았을 걸 그랬다. 나무숲 속에 파묻혀 있어 사람들로부터 눈길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송내역을 찾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이지만 구지말 유래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옛부터 복사골 은행나무를 마을 입구에 두고 구지리 마을이라고 부르고 살아왔다. 1991년 중동개발로 그 이름은 사라지고 송내역 광장에 두 그릇 은행나무만 옛구지리 마을을 지키고 있다.

- 옛구지리 마을 주민 일동

 

▲ 구지말 애향비

아주 급하게 돌에 새기면서 맞춤법도 살펴보지 않았는지 ‘두 그루’ 인데, ‘두 그릇’으로 표기 해 놓았다. 이 또한 정겨웁다. 한 글자 틀리면 어떠랴?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면 그만인 것을... 이렇게 구지말은 지도에서 영영 사라지고 역사적 의미만 남아 있다.

송내역 동쪽 광장 구석에 두 그루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은행나무가 나이가 그렇게 많이 들어 보이지 않은 것은 구지말 역사가 깊지 않음을 나타내 준다. 소새은행나무가 천년, 여월 은행나무가 오백년이 된다. 하지만 구지말 은행나무는 한 백여년쯤 될까? 아름드리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이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펼쳐 놓은 조그만 무대가 있다. 송내역 광장 자체를 크나큰 물웅덩이로 만들어 놓고 이를 ‘무지개 광장’이라고 명명해 놓았다. 여름에는 물놀이장, 겨울에는 썰매장으로 변신을 한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물이 가득 들어 있어 사람들은 그저 무관심한 표정으로 길을 걸을 뿐이다.

 

▲ 구지말 주변 지도

 ◆ 구지말 어원은 곶(串)

현재 송내역 근방에서 구지말 어원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동개발을 하면서 높고 낮은 것을 모두 평평하게 변모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낮게 형성되어 있던 중동벌은 까치울 시루뫼, 삼태기산을 깎아 메웠다. 그리고 구지말까지 펼쳐져 있던 상살미도 깎아 냈다. 상살미는 송내역 남부역 동쪽에는 구시가지라 산언덕으로 그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말’은 마을을 뜻한다. 구지말에서 ‘구지’는 곶(串)에서 나온 말이다. 곶은 '물쪽으로 쑥 튀어나온 지형'이란 뜻이다. 바다나 강쪽으로 툭 튀어나온 곳에 보통 곶을 붙였다. 서해안에 이 곶이라는 땅이름을 많이 붙였다. 바다쪽으로 울퉁불퉁한 지형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보면 곶(串)이 붙은 서해안 지형만 무려 70곳에 달한다. 강화도의 갑곶, 김포의 대곶, 대곶면의 대망곶이, 인천의 월곶, 화성군의 벼슬곶이, 보령군의 성주면의 개고지 등이다.

전국에 걸쳐 곶이 들어간 땅이름이 많다. 대표적인 곳은 서울의 살곶이, 경북 포항시의 장기곶인 호미곶, 울산시 울주군의 간절곶, 태안군의 안면곶, 황해도 해주의 장산곶, 함경북도 유진곶이다.

일반적으로는 갈곶, 돌곶, 배곶, 얼믈곶, 어울매곶, 어울물곶, 곶개, 곶다리, 곶모실, 곶뫼, 곶밭, 곶바위, 곶섬, 곶재, 곶쟁이, 곶안, 곶터 등이다.

이 ‘곶’에다 ‘이’가 붙으면 곶이이다. 이를 바로 발음하면 고지가 된다. 앞고지, 매고지, 질고지, 소고지, 동고지, 서고지, 느릅고지, 느즌고지 등이다.

곶이 ‘구지’로 변모하기도 한다. 구지로 쓰여진 땅이름으로는 뒷북구지, 뒷구지, 수구지, 누렁구지 등이다. 부천의 구지말은 여기에 속한다.

곶이 꽃이라는 말로도 바뀌었다. 꽂개, 꽃다리, 꽃모실, 꽃뫼, 꽃밭, 꽃바위, 꽃섬, 꽃재 등이다. 이 곶이 한자를 바뀌면서 꽃 화(花), 꽂 화(華)로 바뀌었다. 곶개와 같은 뜻인 화포(花浦), 곶다리와 같은 뜻인 화교(華僑), 곶뫼의 뜻인 화산(花山), 곶밭인 화전(花田), 곶바위의 뜻인 화암(花岩), 곶섬인 화도(花島), 강화도(江華島), 곶재인 화치(花峙) 등이다.

부천 구지말은 한자로 기록되면서 두 가지로 쓰였다. 1789년 정조 13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부평부 석천면 구지리(仇之里)로 기록되어 있다. ‘원수 구(仇)’자가 들어가 있어 그리 좋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는 부평군 석천면 구지리(九芝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내용을 정리한 신구대조에는 부천군 석천면 구지리(九芝里)로 되어 있다. 1917년인 대정 6년에 측도하고, 1918년인 대정 7년에 제판한 군포장 지형도에는 부천군 석천면 구지리(九芝里)로 되어 있다.

여기에선 ‘구’가 아홉 구(九)가 쓰였고, ‘지’가 갈 지(之)에서 지초 지(芝)로 바뀌었다. 구지라는 발음을 가지고 한자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불러온 땅이름을 한자로 바꾸면 엉뚱한 의미로 바뀌어 버린다. 땅이름이 원래의 뜻에서 왜곡되어 버리고 만다.

이 구지말을 ‘구진말, 꾸진말’로 부르기도 했다. 구지말의 이웃마을인 장말, 넘말, 사래이, 솔안말, 산골말, 산우물 사람들이 주로 불렀다. 이 이름이 붙은 계기는 1925년도 을축년 대홍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수해로 중동벌이 온통 바다가 되었고, 구지말 마을까지 물에 잠겼다. 마을 집들이 모두 침수 피해를 받았다. 비단 을축년 수해가 아닐지라도 구지말은 아주 적은 비에도 수해를 입는 상습침수지역이었다. 그러기에 땅은 항상 질척거리고 질었다. 그래서 ‘구질구질하다’거나 ‘꾸질꾸질하다’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또 하나의 설은 꾸지뽕나무나무에서 따온 거라는 이야기다. 꾸지만 따와 꾸진말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 1919년도 구지말 지형도

◆ 구지말의 변천 역사

군포장 지형도를 보면 구지말의 모습의 알 수 있다. 거마산에서 뻗어내려온 상살미의 끝자락이 둥그렇게 도드라져 있다. 중동벌을 향해 툭 튀어나온 모습이 구부러진 가지를 닮아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구지말이 유래했다.

약간의 솔숲이 있고 구지말엔 몇 채의 집이 있다. 장말과 사래이로 난 제법 큰 길이 있고, 경인철도 건너 솔안말까지는 소로(小路)가 있다. 현재도 솔안말과 구지말 사이에는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송내역을 통해서 솔안말로 갈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찍힌 항공촬영 사진을 보면 송내역은 아직 세워져 있지 않다. 조그만 간이역이다. 군포장 지형도처럼 구지말이 중동벌을 향해 툭 튀어 나와 있다. 이 때에도 동쪽으로 제법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다. 구지말을 배경으로 동부간선수로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도티골, 산골에서 출발한 구지내 한 줄기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구지말에서 솔안말로 가는 건널목이 선명하다. 장말 지역의 도시화가 끝난 시점이다.

부평수리조합에서 굴포천 하구에 댐을 막은 신곡양배수장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서해의 조수가 밀려들었다. 서해의 조수는 굴포천을 타고 올라와 구지내를 타고 흘러왔다. 그래서 이 서해조수를 타고 산우물마을 앞까지 배가 들락거리고, 인천 부평 삼산동 마을까지 배가 들락거렸다는 증언이 있다. 이 증언 등을 통해 당시 굴포천에는 일상적으로 배들이 오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지말 앞뒤로 동정머리논, 두멍배미논, 소나무백이논이 있었다. 사래이 마을 쪽으로는 돌다리논, 운둥군논, 수렁배미, 앞자리논, 쪽다리논, 개새이논이 있었다. 사래이 마을 옆에는 앞방죽논이 있었다. 구지말 서북쪽엔 나중 배뜰마을이 생겨났다. 원래는 배뜰이라는 땅이름이 있었는데, 여기에 몇 채의 집이 지어지면서 배뜰마을이 되었다. 그 앞에는 물문개가 있었고, 대리미재가 있었다. 이 일대의 평야를 장포들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장포평이라고 했다. 그 뒤 중동벌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일대의 논들은 밤곶이논, 바퀴논, 수잿물논, 새벽구덩이논, 밭뜬논, 새발이논, 쪼갈논, 갈논, 동네방죽논, 배락논, 물문개논이 있었다. 장말 지경에는 봉추논, 장승백이논, 장승백이밭, 백제논, 세귀밭논, 장승백이논, 성머리가 있었다. 일곱집매 마을 지역에는 잉어가 있었고, 잉어논, 수수군논, 장구논, 큰도리논이 있었다. 그 서쪽으로 외딴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 마을은 김포 신곡양배수장이 세워진 뒤에 생겨났다.

이렇게 논들마다 이름이 붙은 것은 구지말, 장말, 넘말, 사래이 마을 사람들의 피어린 간척 역사의 결과이다. 굴포천을 타고 올라온 서해조수로 인해 농사물로 쓸 수가 없어 둑을 높게 쌓아 논을 일구었다. 해마다 수해로 인해 둑이 터지기 일쑤였지만 이를 극복해가면서 논을 새로 일구었다. 논들마다 그 형태가 달라 독특한 이름들이 탄생했다. 장승이 세워진 곳의 논은 장승백이논이라고 했다. 돌다리가 있는 곳은 돌다리논, 소나무가 많은 곳은 소나무백이논이라고 했다. 이렇게 수많은 이름들이 탄생했다. 1925년 같은 을축년 대홍수 때에는 논마다 둑이 다 허물어져 새롭게 다시 둑을 쌓아야 했다.

 

▲ 송내역 은행나무

◆ 구지말에 위치한 송내역

구지말에 송내역이 들어섰다. 원래는 구지역이라고 해야 하는데, 솔안말을 중심으로 해서 송내역이 되었다. 원래는 구지말이 솔안말 보다 컸지만 1970년대부터 솔안말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어 우선권을 갖게 되었다.

구지말에서 솔안말로 건너다니는 땡땡이 건널목에 역이 생겼다. 1974년도이다. 이 해는 부천시가 소사읍에서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이때는 그저 역무원이 없는 전철역이었다. 이후 그 해 8월 15일에 배치간이역이 되었다. 배치간이역은 역무원이 있는 간이역이다. 이곳에서도 열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83년에 보통역인 송내역으로 승격하였다. 광역전철이 운행되어 여객 업무를 담당했다. 이 역은 구지말을 직통으로 잇는 곳인 현재의 송내역에서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1998년 9월 25일 새롭게 역사가 건설되었다. 구지말 서쪽에 위치했다. 현재의 송내역이다. 노선은 경인선 수도권 전철 1호선이다. 중동신도시, 상동신도시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일일 수만명의 승객들이 이용하는 역이 되었다. 서울 방향으로 소요산행, 광운대행, 광운대행, 창동행, 동두천행, 구로행, 양주행이 있다. 인천 방향으로 인천행이 있다. 또한 동인천에서 용산까지, 주안에서 용산 간의 급행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1913년엔 전국 역에서 수원역에 이어 2위를 한 송내역엔 일일 15,560명 정도의 승객이 이용했다. 이후 승객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1916년도에는 송내역에 일일 8만6,099명이 이용했다. 천지가 개벽한 것이다. 현재는 송내역사가 새롭게 조성되어 송내역 광장까지 버스, 택시 승강장이었던 것을 무지개 광장으로 개조했다.

현재 구지말을 알 수 있는 곳으로는 구지공원이 있다.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 건너편이다. 이밖에도 투나광장, 둘리광장, 솔안공원, 서촌공원이 구지말 일대에 포진해 있다.

 

▲ 새롭게 변모한 송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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