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

 

 
   

나의 고등학교때 꿈은 현모양처

 

고등학교 때 나의 장래희망은 현모양처였다. 생활기록부에 당당히 적어낼 정도로 나의 꿈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혼하셨고 엄마가 나를 붙들고 많이 우셨는데 그때는 엄마가 우니까 따라서 울었지 이혼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 중학교를 가고 가정환경 조사를 하는데 한 명씩 줄서서 선생님앞에서 가정환경에 대한 질문과 답을 하는 시간에 내 차례가 되었는데 엄마와 아빠가 같이 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다가 이게 이혼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커서 결혼하면 무조건 이혼은 안 할거라 생각하고 현모양처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혼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좋은 일만 있을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현모양처는 나의 꿈이고 상상이었지 현실의 나는 집에서 요리도 못하고 살림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이도 잘 본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도 못하고 나 자신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나의 성향이 외향적이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않은 결혼, 서툰 초보엄마, 나는 어디있을까?

 

적당한 나이에 연애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결혼하면 출산과 육아로 이어지는, 남들 사는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닥치면 다 하게되어 있다는 어른들의 말씀대로 닥치는 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꿈만 같은 결혼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요리도 못하고 정리도 못하고 집안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고 지금도 제일 힘든 일이다.

결혼전 자전거 동호회에서는 오렌지(닉네임)로 살아왔고 내가 하고싶은대로 자유롭게만 살다가 결혼을 하고나니 익숙하지 않은 주부라는 옷을 입어야 했다. 그런데 그 옷을 아주 잘 소화하고 멋지게 입고다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는것만 좋았지 집에서 뭐 하나 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남편이 해주면 완전 고맙고 요리 잘하는 옆집엄마 만나면 놀러가서 맛있게 먹어주고 나는 나들이 장소를 물색하여 가이드 역할을 했다. 그게 더 좋았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면 저절로 크는줄 알았고 엄마가 나를 낳고 키웠던 경험이 있으니 엄마 선배님에게 의지하려 했다. 그런데 완전 잘못 생각했다. 엄마는 식당 운영하느라 바쁘셨고 산후 조리하러 서울에서 경기도 연천군 신탄리까지 갔는데 1주일만에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산후도우미 아줌마를 불렀다. 아이는 병원간지 34분만에 병원 가자마자 내진하고 바로 출산했는데 산후조리가 이렇게 힘들고 산후우울증이 이렇게 무서울줄 상상도 못했다. 우는 아이 제대로 달래지도 못하고 내 몸은 힘들고 화가나서 아이가 너무 미웠다. 육아서적에 아이가 두달이 되면 외출을 해도 된다고 써있어서 달력에 표시하고 두달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찬바람이 불던 11월 중순에 아이를 안고 망토를 뒤집어쓰고 서울에서 성남으로 지하철을 타고 외출을 시도했다. 집들이에 갔는데 그 맛있는 음식을 앞에두고 우는 아이 얼르고 달래고 재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독방에서 서럽게 울었다. 그래도 집에 돌아오니 바깥공기가 더 개운하고 맛있어서 또 나가고 싶어 내일은 어디갈까 모레는 어디갈까 스케줄을 잡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를 데리고 주5일 스케줄을 잡아가며 춥거나 더울때는 아쿠아리움, 롯데월드, 날씨가 좋을 때는 어린이대공원, 한강, 박람회, 육아교실, 도서관 등 온라인으로 나들이 정보를 찾아서 동네 엄마들과 함께 신나게 돌아다녔더니 1년만에 저절로 공짜 다이어트가 되었다.

1년이 지나고부터는 점점 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또다시 우울해지고 슬퍼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외벌이로 경제관념 부족한 내가 대책 없이 쓰는 생활비를 감당하기도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엄마대상 설문조사 아르바이트부터 짬짬이 시작하다가 점점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나를 찾겠다는 생각보다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밖에 있을때가 나답고 일할때가 나답고 사람들을 만날때가 나답고 자연스럽고 밝고 활기찬 내가 될수 있어서 바깥공기가 자꾸만 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때 그 아이, 마냥 즐겁고 신나게 재밌게 살던 그 아이 다시 찾아보자!

 

경단녀를 버리고, 진짜 나를 만나러 갑니다

 

나에게 일이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인문계로 진학할지 실업계로 진학할지 산업체 고등학교로 진학할지 상담하는 시간이 있었다. 성적이 중위권이기는 했지만 인문계로 가서 대학을 가기보다는 빨리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엄마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항상 힘들었고 학교 등록금 내기도 벅차서 행정실로 불려가기 일수였다. 내가 빨리 일을 하면 엄마도 덜 힘들고 생활고도 덜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산업체고등학교로 진학을 결심하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엄마는 마음 아프셨나 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하시며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가방만 들고 다니고 졸업하면 그때 일하라고 하셨다. 엄마랑 함께 남한산성 길을 걸으며 서로 이야기 나누고 울다가 웃다가 밤을 지샜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는 선물가게, 분식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고, 방학이면 친구들과 함께 공장에서 검수작업 아르바이트를 하여 등록금을 마련했다. 그렇게 나의 일은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하거나 침울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항상 주어지는 상황은 즐겁게 받아들이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다 보니 친구들보다 조금 더 인정받으며 샘플 작업실에서 직원 분들과 함께 일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는 사장님께서 졸업하고 다시 찾아오라고 했었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회사를 다닐 때도 저녁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필요할 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때는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며 부업이며 알아보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내용증명을 보내 환불 받기도 하면서 또래 친구들은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며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나의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그리고 더 잘 살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일 이정도 생각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하여 경단녀를 탈출하려고 결심했을 때, 집안 어른들은 내가 일을 시작한다는 생각을 반가워하지 않으셨다. 충분히 이야기 나누지도 못했지만 18개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도 편치 않고, 조금 더 키우고 해도 되지 않냐고 하셨다. 내가 의사, 약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도 아니고 당장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지 않냐고 하셨다. 경제관념도 부족하고 살림도 잘 못하는 철없는 며느리가 걱정돼서 해주셨던 말씀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나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경단녀를 탈출하고자 마음먹었던 나에게 일이란? 독립이었다. 나를 위한 독립, 나를 향한 독립, 엄마의 독립이었다. 내가 독립적인 주체로서 살지 못하고 나를 찾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싫었고 당당히 일하며 나를 찾고 가정경제에도 보탬이 되고 아이에게도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집에서 우울한 엄마는 아이에게도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비디오를 틀어주고 혼자 놀라고 장난감만 쌓아주는 나쁜 엄마였다.

이렇게 엄마의 독립이 시작되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겪느라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일을 놓지 않았다. 다시 집에서 우울한 엄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으로 살면서 남편과도 함께 일하면서 동료애도 느끼고 가끔씩 쉬는 날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놀이공원도 가고 수영장도 가고 자전거여행도 가는 지금 나의 생활이 더 좋다. 내가 지금까지도 집이라는 알을 스스로 깨지 못하고 아직도 갇혀 있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한번은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이가 또래보다 말도 늦고 혼자 노는 행동들이 약간 걱정스러우니 소아정신과를 방문하여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 하여 유명한 소아정신과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 받은 결과 아이는 문제가 없었고 나의 우울증이 문제였다. 의사선생님께 상담 받으며 결혼생활과 일을 하며 힘들었던 점들을 그 동안은 친정엄마나 언니에게도 말 못했던 마음속에 꽁꽁 쌓아두었던 일들을 다 털어놓고 눈물을 펑펑 쏟고 나니 응어리가 조금 풀린 듯 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힘들 때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서로 의지하고 이야기 나누며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사는데 내가 너무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살아서 화병이 생겼구나. 그 이후는 남편과도 알콜 소통으로 맥주한잔씩 기울이며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되었고 집안일 고민은 이사람, 일의 대한 고민은 이사람, 관계에 대한 고민은 이사람, 이렇게 이야기 상대를 정해놓고 상담하다 보니 정신과 의사선생님을 대체할 수 있는 여러 명의 고마운 무료 상담사들이 생겼다.

 

선택은 나에게 있다. 집에서 살림하고 육아하는 것이 우선이면 그렇게 하면 되고 일을 하고 싶고 일을 하지 않으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는 일을 해야 한다. 지금 같은 저성장 고용불안의 시기에는 남편의 직장도 안전하지 않다. 엄마의 일은 스스로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받으며 당당히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갈 수 있고, 남편의 무거운 어깨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줄 수 있고, 열심히 일하는 엄마를 위해 아이들은 안마사가 되어줄 것이고, 가족여행도 조금 더 여유롭게 계획해볼 수 있다.

 

단시간에 이뤄질 수는 없다. 경단녀의 사회 재진출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강점을 찾아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야 하고 창직으로 직업을 만들 수도 있고 나에게 맞는 분야를 찾아서 재취업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하고 싶었던 일들을 배우고 사이버대학교에 등록하여 국가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대학교도 무료로 다녀보고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과도 친하게 지내보자.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사회인학생, 주부학생, 장애우학생, 군인학생 등 다양한 분야에 있는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고 오프라인 모임도 활성화 되어 있으니 함께 공부하는 친구도 사귈 수 있다. 이러한 국가장학금 제도는 몰라서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직도 가고 싶은 길이 많다. 세상은 넓고 갈 길은 많다! 지금 당장 나의 길을 찾아보자.

 

글 | 박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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