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절이, 겉절리로 불리는 마을 이야기

▲ 겉저리(표절리, 춘의동) 4H 클럽지구 개관식 장면!

 

 배추 겉절이가 아닌 마을 겉저리,

것절이, 겉절리로 불리는 마을 이야기

 

한도훈(시인, 부천향토역사 전문가)

hansan21@naver.com

 

● 겉저리(春衣洞) 마을 이야기

‘겉저리, 겉절이, 겉절리’는 춘의동의 옛마을 이름이다. 것절리라고도 한다. 그냥 겉저리로 통일한다. 마을 분들이나 부천의 외지에서 겉저리로 불렀기 때문이다. 지금은 겉저리, 것절리로 부르지 않는다.

단지 춘의동으로 부른다. 겉저리는 사람들 눈과 귀, 입에서 사라져 버렸다. 배추 겉절이라는 뜻이 부천에 있었을까 의아하게 여긴다. 그게 전부이다. 워낙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옛마을 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매봉재 동편 봉우리인 춘지봉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춘의사거리 근방이었다. 현재 길주로, 길주로 391번길, 392번길 근방이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골목이 옛 겉저리 마을임을 증명해 준다. 춘지봉에서 출발한 산자락이 나지막하게 중동벌로 뻗어 있었다. 그 언저리에 겉저리가 자리를 잡았다.

겉저리 앞쪽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반전농장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농장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근방의 심원고교는 해발 11.5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겉저리에서 도당마을 사이에 중앙연초시험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겉저리 사람들이 주로 동원되어 담배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그래서 한때 겉저리라는 이름이 시험장 마을로 변질되기도 했다. 1977년 12월 21일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에 중앙연초시험장이 완공되어 이곳으로 이전을 했다. 그 뒤 겉저리 마을 이름을 되찾았다. 이 지역의 높이는 해발 22.3미터에 달해 제법 높은 언덕이었다. 그러기에 담배 같은 밭농사를 짓기에 적당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마을마다 4H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4H를 표시하는 표지석을 세웠다. 이 표지석에는 ‘것절리 희망 4H’로 되어 있다. 겉이나 것이나 한끝 발음 차이이다.

일제 강점기인 대정 7년(1918년)에 측도하고 그 해에 제판을 찍은 경성3호 지형도에 따르면 마을 앞으로 깊은구지에서 벌말을 거쳐 겉저리를 지나 약대동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또 한 길은 벌말에서 겉저리 남쪽을 지나 춘지동 남쪽 산언덕을 넘은 다음 당하리인 양지마을 지나 구룡목 고개를 넘어 멧마루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 다음엔 겉저리 아래에서 매봉재 산자락을 지나 도당마을을 거친 뒤 내리 마을로 가는 길이 있었다.

마지막 한 길은 멧마루로 가는 길 중간에서 멀미인 원미산 자락을 타고 돌아 조마루로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니까 조마루에서 겉저리로 오려면 이 길을 필히 이용해야 했다.

▲ 겉저리(표절리, 춘의동) 4H 클럽지구 개관식 장면!

 

● 겉저리 어원 찾기

겉저리는 조선지지자료에 표절리(表節里)로 되어 있다. 우리글로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인 대정 7년(1918년)에 측도한 지형도에도 표절리로 되어 있다. 이대로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표절리 사람들은 우리말인 겉저리로 불러 왔다는 데에 있다. 그러기에 겉저리를 중심으로 그 어원을 찾아나서는 게 순서이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에선 표절리(表節里)였다. 마을 사람들은 표절리(表節里)라고 불린 이유는 마을 입구에 풍산 홍씨가 받은 정려문이 있어 절개에 경의를 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표절리에서 절리(節理)는 절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겉 표(表)’는 경의를 표하는 말로 해석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표절리(表節里)라는 단어를 정려문에 맞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표절리는 겉저리의 한자 표기일 뿐이다. 겉이 겉 표(表)가 되었고 저리를 마디 절(節)로 쓴 것이다. 절리(節里)는 부천에서 역곡 안동네로 불리는 벌응절리에서도 쓰이고 있다.

겉저리에서 겉의 어원은 갗이다. 겉과 갗의 어원은 가장자리라는 뜻으로 같다. 가장자리를 겉으로도 쓰인다. 산이나 들의 끝자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겉저리가 매봉재 춘지봉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겉저리 마을 앞을 흐르던 앞개울이 고비골, 가재골인 것도 마을 이름과 무관하지 않다. 멀미인 원미산 골짜기에서 흘러온 개울 이름이다. 가재골이란 갗골로 가장자리 골짜기를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갗골이라고 해서 갗저리의 어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는 겉저리가 중동 벌판을 내다보는 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려준다.

저리란 들을 말한다. 들판이라는 뜻의 ‘들’을 벌이라고도 한다. 겉저리 바로 옆 마을이 벌말이다.

들의 중세어는 드르이다. 이 드르가 지역에 따라 ‘드르, 다리, 더리’로 쓰였다.

경기도 지역에선 더리로 쓰였다. 이게 저리로 변한 것이다. ‘겉드르, 갗드르’가 ‘겉더리, 갗더리’로 쓰이고, 다시 겉저리로 조금 복잡하게 변천을 거듭한 것이다. 그러므로 겉저리는 중동 들판 끝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 겉저리(표절리, 춘의동) 원인상씨집 연못

 

● 겉저리의 역사

겉저리는 1,500년도 중반 대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그때는 면단위를 표시하지 않았다. 당시 부천 지역의 호수는 약 100호 정도였다. 인구는 약 200명 정도로 아주 작은 동네에 불과했다. 땅은 넓은데 사람은 별로 살지 않는 궁벽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깊은구지, 소새, 범박마을, 벌응절리, 고얀마을, 조마루, 겉저리, 여월리, 점말, 멧마루, 대장마을, 시우물, 약대마을, 장말, 구지말, 사래이 등이 있었다. 마을 별로 몇 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겉저리는 1789년 호구총수 시대엔 옥산면에 속했다. 옥산면엔 200호에 774명의 사람들이 살았다. 세종 때에 비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옥산면만 해도 부천시 전체 인구 보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부천은 상오정면, 하오정면, 옥산면, 석천면이었다.

겉저리는 여지도서(1760년경) 옥모면에 속했다. 김정호의 동여도(1860년경)에도 옥모면(玉毛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1861년)에는 옥산면이나 옥모면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1872년 부평지도에는 옥산면(玉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옥모가 옥산으로 바뀐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광여도에는 다시 옥모면(玉毛面)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옥모면, 옥산면이 번갈아가면서 쓰여진 셈이다.

일제강점기 1910년도부터 시작해서 1911년에 완성된 조선지지자료에는 부평군 옥산면 표절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때 우리말인 겉저리로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당시 옥산면에는 소새인 소사리, 범박마을인 범박리, 고얀마을인 괴안리, 항동, 역곡 안동네인 벌응절리, 조마루인 조종리, 겉저리인 표절리였다.

일제 강점기 1914년 일제의 행정 개편 때는 부천군 계남면 표절리였다. 석천면이 계남면으로 바뀌었다. 면사무소는 장말에 있었다. 이후 부천군 소사면에 속했다가 부천군 소사읍에 속했다.

1973년도 부천시로 승격하면서 원미․춘의동으로 바뀌었다. 이때 처음으로 춘의(春衣)라는 동이름을 달았다. 춘의는 매봉재를 조선시대 때 춘의산(春宜山)이라고 했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그런데 춘의의 의(宜)자가 옷 의(衣)로 바뀌어 표기된 것이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부평군 옥산면 표절리 춘의봉(春意峰)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앞의 춘 자는 그대로 있고, 중간 말에 의(宜), 의(意), 의(衣)로 표기되었다. 결론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옷 의(衣)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1977년도에는 원미춘의동에서 중앙동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81년도에 춘의동으로 자리를 잡았다. 1993년도에 원미구가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중구 춘의동에서 원미구 춘의동으로 변경되었다. 2016년에는 원미구가 폐지되면서 부천시 춘의동으로 변경되었다.

이제 겉저리라는 옛마을 이름을 되찾아야 할 때이다. 이를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애용하면 좋겠다.

▲ 겉저리 마을 4H 표지석

 

● 겉저리 마을의 변화

겉저리 동쪽으로 벌막 마을이 있는 곳으로는 길게 논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매봉재의 춘지봉 산자락에선 청채미며 보리 같은 밭농사를 주로 지었다. 겉저리 마을 서쪽 아래까지는 활엽수들이 드문드문 심어져 있었다. 소나무 같은 침엽수는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가재골, 고비골, 장자골의 개울물이 합쳐져 제법 많은 양의 물을 중동벌로 흘려보내던 그 개울 양켠으로 둑을 쌓았다. 당시 굴포천으로 흘러들어온 바닷물을 막는 역할을 했다. 서해조수가 굴포천을 타고 올라 돌내인 석천(石川)을 휘돌아 밀려왔다. 이때 이 골짜기로도 서해조수가 밀려들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 둑을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 때 한강이 자주 결빙해서 세곡선들이 한성까지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부평지역의 여러 사창(社倉)에다 부려놓았다가 결빙이 풀리면 수로나 육로로 운반을 했다. 부평군에선 굴포천을 통해 세곡선들이 들락거리며 사창에다 곡식들을 풀어 놓았다.

1872년 그려진 부평지도에는 이 사창(社倉)들이 확실하게 그려져 있다. 석천면에도 사창이 있었고, 하오정면, 수탄면에도 있었다. 겉저리가 있는 옥산면에도 사창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사창에 세곡미를 운반하려면 굴포천엔 당시 많은 배들이 들락거렸음을 알 수 있다.

겉저리 마을 개울 양켠에 이당(二堂)둑이 있었다. 이 일대의 들을 가리켜 이당들이라고 불렀다. 조선지지자료에도 부평군 옥산면 표절리 이당평(二堂坪)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당(二堂)은 둑을 가리키지 않고 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이당(二唐)들을 잘못 표기한 걸로 보인다. 당나라 당(唐)은 둑을 가리키는 말이다.

1976년 11월 현지조사한 지도를 보면 이곳은 앞논들로 불렀다. 겉저리 마을 앞에 있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당들이 앞논들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당시 역사를 모르니까 이렇게 왜곡해서 표기한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마을 앞에 멧마루로 가는 곳에 튼튼한 돌다리를 만들었다. 그 위로 자동차도 다닐 수 있었다. 또한 조마루 뒷골에서 내려온 물도 마을 앞에서 합류를 해 중동벌로 흘러내려갔다. 마을 앞 개울은 너무 맑고 깨끗해 게나 가재가 무더기로 잡혔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도 관야(管野), 하야(河野)라는 일본인이 살았다.

해방 후에는 겉저리에 중앙로가 뚫리면서 겉저리 사람들의 집이 헐려 중동쪽 논에다 다시 집을 짓고 이사를 해야 했다. 겉저리는 표절1리로 불렸고, 표절2리에는 양지마을, 가운데 당아래, 너머 당아래가 자리를 잡았다.

1976년도에 현지조사한 지도에 보면 춘의사거리 근방에 마을 회관이 자리 잡았다. 마을 회관 중심으로 마을 집들이 둘레둘레 서 있었다. 1980년대 겉저리에 살았던 원인상씨 집에 큰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에서 겉저리 아이들이 꾀벗고 목욕하고 수영을 하며 한 여름을 보냈다. 그만큼 당시 겉저리는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70년대 후반부터 춘의 공단이 들어서면서 겉저리 근방은 순식간에 공장들이 들어선 지대로 변모했다. 제일전기, ㈜낫소, 극동스프링크라(주), 두진기계공업, 신흥정밀(주)등이 세워졌다. 현재 겉저리 마을 바로 곁에는 중원화학(주), 고려화성산업, 태광금속, 극동삼광전기, 신명산업(주), 셋방물산 등이었다. 현재는 동원 F&B 경인사업부, 한애전자 등이 있다.

춘의사거리에는 서울지하철 7호선 춘의역이 건설되었다. 그 건너편에는 예손병원, 서림테크노파크1차, 경일건설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 1977년도 인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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